다가오는 미래와 교회의 갱신과제

 

이신건

 

I. 사회와 교회의 변화

1. 오늘 날의 세계경험의 특징적 인상(印象)은 "모든 것이 변화가능하고 상대적이고 추월가능하다"는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학문과 기술의 최첨단 업적이라고 찬양받던 것도 오늘은 벌써 낡은 것으로 변한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이 놀랍게도 벌써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우주 탐험). 이전의 세대가 존중하던 규범과 행동방식도 오늘의 세대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성관념(性觀念), 권위에 대한 태도, 종교와 신앙의 평가, 전통과 인습에 대한 태도가 그러하다.

오늘날 만큼 변화와 단절, 그로 인한 불확실성이 그처럼 큰 시대는 없었던 듯하다(J.K. 갈브레드의 책 '불확실성의 시대' 참조하라). 오늘 날에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기 때문에 견고하고 안정된 것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모든 분야에서 폭 넓게 경험하고 있다. 과거에 사람들이 영원한 진리, 불변적 법칙, 확고한 전통이라고 여기던 것이 오늘 날엔 더 이상 인정받지 않고 있다. 우리 시대의 특징은 바로 변화, 갱신, 혁신 등에 관한 언어가 매력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사실에 있다. 생활 양식, 산업기술, 교통과 통신 등의 급격한 변화를 넘어서,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신념을 변화시키고 재정립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을 이 변화의 주체로 의식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자연의 지배자로 경험한다. 이전에는 개선할 수 없는 힘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그래서 전능한 신의 영역에 속한다고 믿어졌던 자연법칙을 현대인은 이제, 자신의 지배영역을 넓히기 위하여 이용한다. 현대인은 자연법칙을 자신의 계획과 유익을 위하여 바꾸기도 한다. 환경과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도 조작, 조종할 수 있게 되며, 이제 구원이나 치유도 신에게 기대하지 않고 인간의 활동과 계획의 결과로 기대한다.

세계를 지배하고 계획할 수 있다는 신념과 함께 맞물려 현대인의 특징이 되고 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관심이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것과 미래적인 것은 현대인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기존 현실의 변화, 미래를 위한 계획수립과 그 실현에 대한 기대는 변화와 새 출발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든다. 이미 달성된 것도 거듭 의문시되고, 모든 기존 현실의 상대성에 대한 통찰은 전통과 결별하게 만든다. 현대인은 미래를 내다보고 실험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요구받고 있으며, 이런한 심성은 전통적 사고방식과는 결정적으로 구별된다. 평생교육에 대한 증대하는 관심, 견해와 생활방식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 기동성과 유동성, 인간들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폭넓은 인식 등이 현대인의 심성을 결정짓고 있다.

2. 사회와 세속 세계와는 달리 교회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지 않고 몇 세기 이상 견디어온 불변적인 실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세기를 한번 살펴 보면, 그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몇 가지 변화들을 열거해 보면,

1) 성서학의 발전: 19세기는 성서가 그리스도인의 경건생활의 중심에 놓여졌을 뿐만 아니라(성서운동, 성서연구의 열기), 성서학의 놀라운 발달을 가져온 시기이다. 이로 인해 한편으로는 개인과 교회의 생활의 갱신이 강한 영적 자극을 얻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이한 본문 해석과 주석 방법론의 다양성으로 인해 견해의 차이가 생겨났다. 성서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어 있고, 항상 새로이 해석을 필요로 하며, 실로 서로 모순되는 진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2) 에큐메니칼 운동: 타종파와 비기독교적 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의 관계에서도 분명한 입장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의 종파끼리 서로 이단시하고 배척해오던 대신에 상호이해의 노력이 증진하고 있으며, 타종교에 대해서도 신구교 공히 배타적 입장 대신에 포용적(포괄적)입장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종교다원주의도 거세게 대두하고 있는 실정이다.

3) 교회의 자기 이해: 19세기에 교회는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카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자신을 '완전한 사회'로 절대시하던 이전의 태도를 바꾸어, 항상 회개와 갱신을 필요로 하는 불완전한 나그네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즉 카톨릭 교회는 자신을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함으로써, 항상 거듭 새로운 탈출,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백한 것이다.

이 점은 개신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개신교회도 꾸준히 교회적 자의식을 갱신해 왔으며,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백하면서 자신의 역사성, 잠정성을 인정해 왔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개방성, 선교적 정신, 대화의 마음가짐, 인간을 위한 투신들에 역점을 두어 왔다.

교회사를 개관해 보면, 개혁, 변화, 발전이 항상 불가피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임을 입증할 수 있다.

1) 교회 직제의 변화: 초대교회 당시에 팔레스틴 교회는 주로 장로에 의해 지도되었으나, 헬라교회는 감독, 집사에 의해 통솔되었다. 2세기 초엽에는 다양한 요소의 결합을 통해 감독-장로-집사의 직책서열이 생겨났으며, 이것은 그후에 결정적 영향을 주어 왔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하고 국가 종교로 승인한 후, 특히 교회는 사회,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크게 입으면서 발전했다. 감독은 이제 높은 국가 관리가 되어 그 의상(衣裳)과 권위, 특권을 누렸으며, 5세기부터 로마 교황의 수위권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으로 합법화되었다.

종교개혁을 통해 신구교가 분리된 후 신교는 제나름의 교회직제의 개혁을 수행하였으나(장로교회, 감독교회, 회중교회, 형제교회, 무교회, 민중교회 등), 카톨릭 교회는 '교황 무오설'을 교리화하기까지 했다(1870년) 하지만 이 교리는 오늘 날에 카톨릭 교회 내부로부터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H. 큉). 그리고 남미의 카톨릭 교회는 독자적으로 발전하는 모습도 띠고 있다(바닥 공동체).

2) 교리의 변화: 교리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변화와 발전을 추적할 수 있다. 4세기 후반기까지 신약성서를 카논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교회는 경전을 결정하지 못했고(공동서신, 요한계시록의 경전성에 관해서는 매우 격렬한 논쟁이 있었음), 교회가 헬라지역으로 확장되면서 복음을 새롭게 진술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수차에 걸친 교리논쟁과 공의회의 교리확정은 교회의 역사적 배경 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즉 복음은 히브리적 사고방식과 언어방식에서 헬라적 문화권으로 번역되어야 했으며, 이러한 헬라화의 과정에서 삼위일체론, 그리스도론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과 언어방식은 헬라적 문화권과는 판이하기 때문에, 변화된 역사적 상황 안으로 다시 새롭게 번역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오늘 날에 새로운 신학이 계속 등장하는 것이다.

3) 기타: 그 외에도 예전의 갱신, 교회건축 양식의 변화, 교회 예술의 변화, 윤리관의 변화 등을 우리는 지적할 수 있다.

II. 변화의 신학적 기초

교회(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항상 역사적으로 중재되는 형태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용과 형식을 쉽게 분리할 수 없다. 성서이해와 교리, 신학 등도 그렇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앙의 변화와 재해석의 요구가 단지 외부에서 강요된 것인가? 아니면 예수의 복음에서 생겨난 것인가? 또 어느 한도까지 변화가 요구되는 것인가? 교회의 변화와 갱신의 필요성은 단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의 요구와 선포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예수의 '회개요구': 예수의 회개요구(마 4:17, 막 1:15)는 단지 부정적으로 죄로부터의 돌이킴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사고와 행동 전체의 전환을 요구한다. 회개는 마음만의 돌이킴이 아니라 전 인간의 포괄적, 전체적 방향전환이다. 그리고 회개는 일회적 행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또 이웃을 향해 마음을 여는 계속적인 태도이다.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는 그들의 자기의(自己義), 전통-형식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이웃의 새로운 요구에 귀가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2) 예수의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견주어 볼 때, 지상의 모든 것은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방향전화, 개혁, 갱신, 자기비판의 요구 앞에 서 있다. 교회는 스스로 하나님과 역사 속의 하나님의 행동에 대해 폐쇄적일 수 있는 위험에 항상 처할 수 있다. "세상의 소금이 되라",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 "한 알의 썩어가는 밀알이 되라"는 예수의 말씀은 바로 자기희생, 자기포기를 요구하며, 하나님의 새로운 활동에 마음을 열어 놓을 것을 요구한다. 교회는 자기 자신을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반영하는 거울일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목표로 삼는 교회는 항상 자신이 약속의 지평 위에서 움직여 나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고착된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전망을 획득해야 한다. 교회는 예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를 완전히 다 이해했다거나 실천했다고 말할 수 없다. 교리와 신학도 진리를 향해가는 길 위의 정류소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항상 심화하고 확대하도록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III. 교회 갱신의 과제

변화하는 세계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 교회는 세계에 복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는 형식, 구조, 언어, 사고는 현대인을 예수 그리스도로 초청할 수가 없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와 세상의 주님으로서 새로운 탈출, 새로운 회개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과거의 형식을 꾸준히 재검토하고 새로이 출발해야 한다. 교회는 새로이 실험하는 용기를 지녀야 하며, 예언자적, 카리스마적 요소를 강화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갱신'이라는 것이 현 세계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 예수의 복음을 변화된 세계에 옮기는 작업은 그것을 대중적인 그리스도인, 대중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평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복음, 즉 하나님 나라의 도전을 우리 시대에 항상 새로이 설명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일이다. 세계에 적응하느라 교회와 복음의 정체성까지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어린이를 목욕물과 함께 내버리는 행위와 같다. 그렇다고 교회가 늘 과거의 형식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한다면, 변화하는 시대에 뒤떨어져서 적응성과 적합성을 상실한 고물로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교회, 교회의 미래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오늘 날에 교회의 미래상을 제시하는 신학자들(호켄다이크, 라너, 몰트만, 큉, 후버 등)의 대체적인 견해를 따르면, 미래의 교회는 탈성직주의적인 교회, 세계에 대해 열린 교회, 일치하는(공의회적, 에큐메니칼적) 교회, 아래로부터의 교회, 민주화된 교회, 사회비판의 교회, 인간에 봉사하는 교회, 구체적 지성(知性)을 제시하는 교회, 참된 영성(靈性)의 교회 등으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