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교회론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신건

 

 

1. 지역교회론은 가능한가?

 

 "지역교회론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지역교회론 은 가능한가?"를 물어야 한다. 물론 지역교회라고 할 만한 현상은 항상 존재해 왔다. 인구의 유동이 비교적 적었던 옛날의 농경사회에서 교회는 지역공동체의 중심에 위치한 독특한 공동체의 하나였다. 지역적으로만이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으로 교회는 지역공동체의 구성원을 통합하고 또 통제하기도 하는 강력한 중심체였다. 특히 신화 혹은 종교가 인간의 생활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던 중세사회에서 교회는 지역사회, 아니 국가를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 중심적 세력이었다.

  그러나 지역공동체의 중심적 기능을 갖던 교회의 이러한 특색은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회의 출현, 특히 현대의 산업사회의 등장과 함께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익명성'과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오늘날의 세속산업사회에서 교회는 더 이상 지역의 중심을 차지하는 공동체로 자처할 수 없게 되었다. 정보사회의 가속화는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교회의 중심적 기능을 해체시키리라고 본다. 특히 교회의 중심적 기능의 해체는 한국사회에서 급속한 산업사회의 도래와 맞물려 급속하게 진행되어 왔다.

  그렇지만 서구 유럽의 교회는 여전히 강한 지역성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아직도 교회가 사회의 정신적 중심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는 데에도 있지만, 비교적 통합된 단일적 특성을 유지하고 있고 신구교를 막론하고 교구적 특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데에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유럽의 사회는 종교다원적 특징을 비교적 덜 갖고 있기 때문에 교회는 아직까지 사회의 중심체로서의 특징을 잘 유지하면서 종교적, 윤리적 흑은 문화적인 통합기능을 잘 수행해 나가고 있고, 때로는 강력한 사회적 압력 단체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 반면에 한국 교회는 다종교적이고 다양한 교파적 특징을 갖는 미주의 선교를 받았기 때문에, 이미 그 출발부터 사회의 중심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또 한국 교회는 전통종교의 강력한 사회적 통합적 기능에 도전하면서 선교했기 때문에, 유럽의 상황과는 달리 보장된 지위를 누릴 수 없었다는 점에서도 불리한 환경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교파 경쟁적 교회 성장의 정책은 교회의 사회적 중심의 기능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괴해 왔다. 한 지역, 아니 심지어는 한 건물 안에서조차 여러 교파의 교회들이 경쟁하듯 자리잡았기 때문에, 애초부터 교회의 지역성은 고려의 대상조차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과도한 교회 성장 지향의 목회는 지역성을 초월하여 신자들을 끌어 모아야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로 대형 교회들은 대형버스를 사들여 운행하고 멀리 이사간 교인들의 교통편리를 위하여 더 넓은 주차공간을 확보하는 일에 과다한 예산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즉 교회 성장의 '거룩한 이기주의'의 논리 앞에서 교회의 지역선교적 사명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근래에 교회는 교회 성장의 한계와 물적 자산의 확장 그리고 지역선교 혹은 사회선교에 대한 관심의 증대 등의 이유로 대형교회를 비롯하여 소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지역사회를 위한 선교 프로그램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징후를 보여주고 있음은 퍽 고무적인 일로 평가된다.

   그러나 '지역교회'라는 개념은 아직도 모호한 것이다. 비록 교회가 주변지역에 대해 점차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지역주민을 대변하는 공동체도 아닐 뿐더러 교회의 구성원들도 점차 주변지역을 이탈해가고 있다. 그러므로 지역에 대한 더 커지는 관심과 지역과 무관해지는 교회의 실정, 이 두 가지의 서로 상반되는 현상이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형성해 갈지 자못 궁금하다. 그리고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도 결국에는 교회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에서, 즉 선교전략의 변화에서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교회성장의 정체 아니 교회성장의 후퇴를 감수하고서라도 교회가 당연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한다는 인식의 변화 혹은 교회론의 변화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교회성장의 거룩한 환상, 즉 성장절대주의 혹은 무한성장주의에 깊이 몰두해 있는 한국 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에서 비추어 볼 때, 아무래도 전자, 즉 교회성장전략의 변화가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의 주된 동기로 작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의 지역선교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커진다고 하더라도, '지역교회론'의 확고한 정립은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학적 지역교회론의 필요성 내지 중요성은 크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지역교회론은 단순히 사회적 분석에만 기초할 것이 아니라 그 든든한 신학적 기초를 가져야만 비로소 영속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 지역교회론을 위한 신학적 근거들의 검토

 

1 . 보편적인 교회론

 

 "교회가 보편적(catholic)이다"는 말은 본래 유럽중심적인 뜻을 갖고 있었다. 즉 유럽 대륙만을 지구의 전부로 알았던 중세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교회는 이미 지구상에 편재한 보편적인 구원의 제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은 이미 교회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명제도 타당성을 지닐 수 있었다. 물론 이 명제에는 하나의 교회에 대한 열정도 깊이 깔려 있었다는 점도 무시될 순 없다. 그렇지만 가시적이고 역사적, 제도적인 교회만이 배타적 구원의 도구라는 주장은 여러 각도로부터 비판을 받아왔다. 비단 종교개혁자들만이 아니라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교회명으로 내건 교회 내에서도 이 명제는 의심을 받아왔고 또 그래서 수정되어 왔다. '보이지 않는 교회', '잠재적 교회', '교회 밖의 교회', '익명적 그리스도인' 등과 같은 신학 용어들은 바로 이러한 관심을 폭넓게 반영한다.

신학적으로 '그리스도가 존재하는 곳에 교회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현존의 범위는 분명히 가시적, 제도적 교회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만 임재하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형제들 가운데 소리 없이 현존하며(마태복음 25장 31-46장 참조), 단지 교회만의 머리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머리이기도 하다(에베소서, 골로새서 참조),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창조 이래로 어디서나 존재해왔고, 창조만큼 오래되었다. 그렇기에 가톨릭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회가 참으로 보편적이고, 그에게 속해 있는 자들은 하나의 보편적인 교회의 지체들이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지역사회에 두루 편만히 존재하든 아니든, 교회가 지역사회에 강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든 아니든, 이미 교회는 선험적으로 온 세상의 교회이고 온 인류의 대변자이며 제사장적 백성이다. 그렇다면 지역사회 혹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단지 윤리적이고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바로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요소이고 신앙의 핵심에 속하는 사안이다. 이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은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사회적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것보다 선행적이고 중요한 임무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분명히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교회에 속해 있다. 보편적인 교회에 대한 인식은 분명히 교회의 거룩한 이기주의, 성장 이데올로기를 깨뜨릴 수 있는 요소가 되고. 그래서 사회에 대한 관심을 폭넓게 유도할 수 있는 요소도 되지만, '보이는 교회'가 '보이지 않는 교회'로 도피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약점도 내포하고 있다. 혹은 개체적 교회가 보편적 교회에 흡수되어 오히려 정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 후퇴할 위험성도 갖고 있다. 보편적 교회론은 자칫' 보이지 않는 이상적인 교회'로 도피하게 만드는 신학적 장치로 작용할 수도 있고, '전투하는 교회'가 '승리하는 교회'처럼 느긋한 자세를 갖도록 만들 소지를 갖고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이미 세상을 자신의 몸으로 화해시키고 자신의 몸으로 세상 안에서 편만히 임재하며 통치하는 승리의 그리스도를 찬양할 수 있겠지만, 우리 자신은 아직도 적그리스도와 힘겹게 싸워야 할 그리스도의 군사이다. 우리는 승리한 그리스도의 분부에 따라 온 세계에 그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쳐 실천하게 할 선교적 위임을 받고 있다. 보편적 교회에 대한 신앙적 확신은 교회의 우주성, 일치성 혹은 연대성을 뒷받침해 주기 때문에 교회의 시야와 선교적 지평을 확대하도록 만들어야지, 교회의 선교적 열정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2. 민중교회론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편만하게 존재하는 '보편적 교회'에 대한 인식 외에도 '종으로서의 교회'나 '남들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본회퍼)의 재발견도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환기시켜주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재발견도 이런 방향을 주도했다. 이런 교회론적, 선교론적 인식의 확장은 한국 교회의 선교이해에도 큰 변화를 주었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한국의 특수한 상황 안에서 태동한 한국 고유의 해방신학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민중신학도 민중의 신학적 재발견을 통하여 민중 안에서 역사를 변혁시켜 나가는 하나님의 사건을 주목하도록 만드는 데 기여했고, 민중교회론만이 아니라 민중교회도 낳았다. 민중신학은 분명히 민중에 대해 편드는 당파적인 하나님,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하고 억압적인 현재의 지배상황, 기존질서를 전복시키는 민중의 하나님을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시정을 각성시켰다. 민중교회는 단순히 지역사회의 민중을 대변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있는 곳에 달려가서 민중을 위하고 스스로 민중이 되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민중교회는 종래의 지역교회와 구분된다. 종래의 교회는 애초부터 지역사회의 여건을 고려하여 설립되었다기보다는 다분히 인구밀집지역 안에 자리잡고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서 이차적으로 지역선교를 수행해 왔다고 보아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사회구원 흑은 사회복지의 차원을 고려하여 세워진 교회와 이와 같은 일을 병행시킨 교회들도 많이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대다수의 이른바 보수적인 교회들은 처음부터 영혼구원이라는 일방적 구원론에 집착하여 교회의 양적 성장만을 열광적으로 추구해 왔고, 구원의 사회적 측면을 애써 외면해왔다. 최근의 교회들이 사회선교적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것도 대개는 사회적 체면치레 흑은 사회적 비판을 모면하려는 궁색한 방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준다. 왜냐하면 교회의 재정지출 중에서 지역사회의 선교를 위해 배정되는 액수가 너무나도 적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민중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교회는 자신을 스스로 민중과 일치시키면서 모든 자산을 민중선교에 쏟아 부으려고 애써 왔다. 비록 민중교회가 민중 속에 효과적으로 뿌리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한 면이 많았고, 또 민중 교회도 실제적으로 기존 교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민중성, 하나님 나라의 민중적 토대를 강조한 사실은 한국 교회의 사회의식에 일정한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의 전반적 위기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전환점을 시사해준다. 민중교회의 사회적, 물적 토대의 약화, 민중신학의 구체성 결여 혹은 관념화('민중이 메시야냐 아니냐?'라는 문제는 그 신학적 문제제기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민중신학의 사변성을 드러내 준다. 민중적 현실과 무관한 듯한 이런 논의는 민중신학의 합리화에 따른 비민중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민중신학의 출발점과는 사뭇 동떨어진 현상이다. 이른바 민중사건이 없는 민중신학은 관념화 혹은 사변화를 낳을 위험이 있다)는 민중신학의 한계를 노정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역선교를 위한 새로운 신학적 전망이 요청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3. 지역교회를 위한 하나의 신학적 기여(?)

 

교회가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정당성과 신뢰성을 가지려면, 모름지기 예수의 메시지에 충실해야 한다. 그의 모든 관심은 온통 하나님의 나라와 이를 준비하는 메시야적 백성의 소집에 모아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움의 현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야말로 교회의 일차적 사명이고, 여기에 교회의 신뢰성과 미래가 걸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가까움은 자신을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헐벗고 굶주린 자들과 동일시하는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체험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남들을 위한 교회'(본회퍼)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들과 연대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자신의 세력확장이나 교인들의 수적 증대를 도모하는 일에 일차적 목적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 교회가 수적, 양적으로 확장되어야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은 신학적 착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옴으로써 교회도 이 땅에 견고히 심어지는 것이지, 교회가 많아짐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보장은 없다. 예수는 자신의 추종자를 많이 모으라고 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다윗처럼 이기적으로 인구계산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윗은 이 일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다!) 열린 교회는 적은 무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 누룩이 될 수 있는 교회이다. 누룩과 소금은 너무 많을 필요가 없다. 적은 양의 누룩이라도 빵을 다 부풀릴 수 있으며, 적은 양의 소금이라도 음식을 맛있게 할 수 있다. 도대체 부풀릴 능력이 없는 누룩이 아무리 많은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물론 교회가 항상 섹트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무조건 작은 교회가 성서적이라거나 아름답다는 말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수의 교인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 모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교회가 이 땅에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열려 있으며 이를 위해 열렬히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성의 나라에 대해 열려 있고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 열려 있는 교회는 당연히 좁은 테두리의 지역성에만 매여 있을 필요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지구가 하나의 지구촌이 되어 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당연히 지구의 먼 이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진정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긴급한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다. 이들을 가까이 하는 그 곳에 하나성의 나라. 아니 하나님의 가까움이 체험된다(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참조).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일정한 지역적 테두리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효소, 희망의 전염체인 그리스도인들의 전위집단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문제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투신할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그곳은 가장 가까운 바로 이웃 사회일 수도 있고 먼 이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특정 지역성을 유지하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복음의 통전적 능력을 어느 때나 보여줄 수 있느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