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의 신학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신건 

 

 

문제 제기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중심으로 현대 신학 사상과 신학자들을 탁월하게 분석하고 비평한 책, "20세기 신학"의 공동 저자인 스탠리 그렌츠(Stanley J. Grenz)와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몰트만의 신학 사상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하면서 비판한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에서 초월성에 대한 강조를 하며 신론을 전개하기 시작했지만, - 심지어 그는 미래의 초자연성을 암시할 정도였다. - 그의 저술 전반을 통하여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과도한 강조 쪽으로 꾸준히 옮겨갔다. ... 미래성을 그 존재 양식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초월성으로부터 이 세계 안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 안에 이 세계가 존재한다는 만유재신론적 하나님의 내재성으로 점차적으로 옮겨가는 이러한 전이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계급적 구조에 대한 몰트만의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반감 때문에, 그렇지 않았더라고 창의적이고 통찰력으로 빛났을 그의 신학적 접근 방법이 뒤틀려져 버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1)

 

 같은 책에서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다음과 같이 몰트만의 신학을 평가한다:       

 

몰트만의 신학이 20세기 말의 기독교에 여러 가지 힘찬 새 이미지와 개념들을 소개해 주었다. ... 더욱이 몰트만은 칼 바르트 이후로 현대 신학에서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그 어떠한 사람보다도 더 많은 기여를 했다. ... 한편 몰트만의 신학은 긴장들로 점철되어 있다. ...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전통적인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접근 방법을 제공하려고 했던 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국 그 둘을 긴장 관계로 내던져 버리고 있다. ... 결국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려는 현대 신학의 항존적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다. ...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그렇게 흡수되어 버리니까 하나님의 신성이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버렸다.2)

 

 몰트만에 대한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비판은, 한편으로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미래의 초자연성)로부터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범내재신론)로 옮아갔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긴장을 여전히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였다. 즉 그 둘을 긴장 관계로 내던져 버리고 있다는 것으로 압축될 수 있다.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의 몰트만 이해와 비판은 정당한가? 비록 그들이 몰트만의 모든 저서를 다 훑어보지도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책의 분량적인 한계 때문에 몰트만의 글을 직접 충분히 인용하고 있지 않고 있지만, 그들의 몰트만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분량적으로도 적지 않고 내용적으로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몰트만의 저서들과 논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그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몰트만의 주요 저서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그리고 이 둘의 관계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몰트만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시간적 범주로만 표현하였는가?

 

 스탠리 그렌츠와 로저 올슨은 몰트만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초월자로서의 하나님 탐구의 출발점으로서 공간성보다는 시간성이 주효할 수 있다"3)고 지적한 적이 있다. 두 사람의 이런 지적은 마치 몰트만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어온 공간성의 범주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지시하는 범주로서 과연 '공간성'을 완전히 포기하였는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몰트만의 저서, 특히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4)을 보면, 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상징하는 범주로서 공간적인 용어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하늘 이해'에서 잘 드러난다.

몰트만은 '하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하늘'을 공간적인 범주로서 사용하면서 이를 하나님의 초월적인 영역으로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하늘'을 우리가 사후에 되돌아 가야할 고향, 혹은 본향으로 생각하면서 이를 구원의 궁극적인 처소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늘'은 예수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인가?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는가, 아니면 사후에 '하늘 나라'로 들려 올라가기를 기다리는가? 이 문제의 해결은 몰트만이 '하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달려 있다. 몰트만의 '하늘 이해'는 그의 책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에 잘 나타나 있다.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이라는 개념은 직접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성서의 전통에서 하늘은 구름과 나는 짐승들, 하늘의 새들을 위한 '공기의 영역'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서 하늘은 하늘의 별들의 영역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늘은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위에 있으며 인간이 지배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천사들의 세계와 하나님의 보좌와 '하나님 영광'을 위한 영역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사들의 영역과 하나님의 보좌의 영역을 뜻하는 하늘에 대해서 성서는 단수형으로 말하기도 하고, 복수형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제3의 하늘'(고후 12:2)을 말하였으며, 유대교적 표상의 영향을 받는 교부들은 '일곱 하늘'을 말하였다.

하지만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에 대한 표현들이 이같이 다양한 것은 창조의 영역이 인간을 통하여 규정되기 어려운 근본적인 불규정성 때문이다. 하늘과 하늘들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는 현실의 영역이다. 나아가 하늘들은 모든 한계를 넘어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개방성'을 의미한다. 창조 신앙에서 하늘은 하나님도 아니고 신적인 본성에 속하는 것도 아닌, '피조된 세계의 한 부분'이다.5)

여기서 우리는 몰트만이 '하늘'을 세 가지 의미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 하늘은 성서의 창조 신앙에서 새가 나르고 별들이 존재하는 실제적인 피조 공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하늘은 피조된 세계의 불가시성, 불규정성 혹은 개방성을 상징하는 용어가 된다. 그 밖에도 몰트만은 성서의 전승을 따라서 천사들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초월적인 영역인 하늘을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창조한 '자연의 하늘'(coelum naturae)이 있는가 하면, 아들이 성육신하고 승천한 '은혜의 하늘'(coelum gratiae)이 있으며, 성령을 통해 만물이 변화(변용)될 '영광의 하늘'(coelum gloriae)도 있다.6)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일방적으로 시간적 초월성으로만 이해하였다"거나, "그가 하나님의 초월성을 시간적인 초월성 안으로 완전히 해소시켜 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비록 몰트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진 창조의 면도 '하늘'이라고 부르지만, 이러한 피조 세계의 '상대적인 초월'까지 초월해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초월'도 분명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이 두 가지 하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인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면서 세계를 주관한다. 하나님은 세계에 대해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는 존재이면서도, 창조와 그 완성을 위해 세계 안에 내재하는 존재이다.7)  

하지만 몰트만에 의하면, 하늘은 영혼의 구원 장소가 아니다. 하늘이 영혼의 구원의 장소로 이해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현실주의적인 종말론이 약화된 탓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 위에서도" 임하길 바라는 기도는 "하늘에 가기를" 바라는 동경으로 대체되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과 혼동하는 사람은 희망을 체념으로 변질시킨다. 이리하여 하늘은 하나님으로 위축되고, 하나님 자신과 같이 피조되지 않는 영원한 실재로 변한다. 즉 하늘은 신성화된다. 그 결과로 우주는 동질적이고 폐쇄된 것으로 이해되고, 개방된 창조 이해는 불가능해진다. 이로 인하여 하늘 비판을 통한 하나님의 개념 비판은 불가피한 것이 되고 만다.8)  

 

 

2. 몰트만의 신학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부터 하나님의 내재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옮아갔는가?

 

몰트만은 후기로 갈수록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해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였는가? 후기의 몰트만에게서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흡수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신성은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버렸는가?

하나님에 대한 초기 몰트만의 이해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저서 '희망의 신학'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초월성에 대한 그의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이나 세계 밖에 있는 하나님도 아니고 엑소더스와 이스라엘의 예언에서 알려진 바와 같이 '희망의 하나님'(롬 15:13), '존재의 본질로서의 미래'(E. Bloch)를 가진 하나님,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신 속에서나 자신을 넘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자신 앞에서만 가질 수 있는 하나님, 그의 미래의 약속에서 인간을 만나는 하나님 ... 다만 적극적인 소망 속에서 기다릴 수 있을 뿐인 하나님이다.9)

 

몰트만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압도적으로 시간적인 초월성, 즉 미래적-종말론적인 초월성으로 이해하게 된 주요 동기는, 앞의 인용문에도 언급되다시피, 에른스트 블로흐(E. Bloch)의 자극 때문이다. 몰트만은 자신이 블로흐의 자극을 받아들인 동기를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희망의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1960년에 일어났다. 나는 스위스에서 휴가를 갖는 동안에 "희망의 원리"(Prinzip Hoffnung)를 동독판으로 읽었고, 이 책에 너무나 매료되었기 때문에 스위스 산의 경관을 감상할 틈도 갖지 못했다. 그 즉시 받았던 나의 인상(印象)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그리스도교 신학은 그 자신의 가장 본래적 주제인 이 희망을 내팽개쳤는가? 원시 그리스도교의 희망의 영은 오늘의 그리스도교 어디에 남아 있는가?

나는 희망의 "신학"에 착수했다. 나는 성서의 약속의 신학과 묵시적 희망의  신학, 사도직의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신학, 유물론적 성분을 지니고 있고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실천을 지향하는 희망의 철학을 서로 결합하였다.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 또 나는 그를 추종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 칼 바르트가 바젤에서 의심한 것처럼, 내가 그의 희망의 원리에 그리스도교적인 "세례를 베풀려고"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리스도교 신학 안에서 그 자신의 전제를 근거로 삼아 비교해 보려고 했다. 블로흐가 현대적인 무신론만을 희망의 근거로 생각했고, "무신론이 없다면, 메시야적 희망도 없다"는 테제를 제시했다면, 나는 처형당한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시켜서 세계의 미래의 주님으로 삼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했다. 블로흐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위로를 받는 사회적 유토피아를 철학적으로 다시 복권시켰고, 그래서 "억압당하고 멸시받는 자들"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정의의 유토피아를 실천하려고 했다면, 내게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희망과 성서적인 하나님 증언에 기초한 기다림이 중요한 것이 되었고, 사회적 유토피아와 정의의 유토피아를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물론 우리의 논의는 자주 단순한 양자택일로 빠졌다: 블로흐는 초월성이 없이 초월하고, 나는 초월성을 지니고 초월한다. 블로흐는 하나님을 거부하면서 희망하고,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희망한다.10)

 

'희망의 신학'에서 몰트만은 그리스도인의 신학과 생활에서 종말론이 갖는 비중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요약했다:

 

종말론적인 것은 그리스도교에 덧붙여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의 매개체이고, 모든 것을 조화시키는 음색이며,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기대되는 새 날의 여명의 빛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신학은 그 미래의 목표로부터 생각되어야 한다. 종말론은 그 마지막이 아니라 그 시작이어야 한다.11)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적, 미래적 혹은 종말론적 초월성이 몰트만 신학을 관통하면서 이를 이끌어 가는 주요 동기와 핵심적인 관점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리하여 몰트만은 '우리 위에 있는 하나님'(칼 바르트),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루돌프 불트만), '존재의 깊이로서의 하나님'(파울 틸리히), '중심에 있는 하나님'(디트리히 본회퍼)과는 달리 '우리 앞에 있는 하나님', '오고 있는 하나님'12)을 크게 부각한 신학자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몰트만은 자신의 신학이 항상 '종말론적인 방향을 갖는 신학'이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으며,13) 최근에 발간된 그의 저서 '생명의 샘, 성령과 생명 신학'14)에서도 그는 이 세계를 위해 오고 있는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여전히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의 신학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려는 현대 신학의 항존적 유혹에 대하여 무방비 상태로 남아 있고,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그렇게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이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버렸다."고 비판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무엇보다도 몰트만의 저서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에서 비롯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서 몰트만은 우리에게 또 한번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사고하기"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몰트만은 여기서 하나님의 내재성을 깊이 숙고하기에 이른다.

몰트만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새로이 숙고하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 때문이다. 창조 신앙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세계의 차이를 지나치게 강조한 전통 신학은 자연을 탈신성화하였고, 정치를 세속화하였으며, 세계를 수동적인 물질로 만들었다. 하나님과 세계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자연의 무자비한 정복과 착취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하였다. 그러므로 몰트만은 오늘날 생태학적 창조론은 이 구분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세계 내재'를 인지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성서의 전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근원적 진리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15) 몰트만이 말하는 생태학적 창조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은 글 안에 분명하게 요약되어 있다: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그의 '우주적 영'을 통하여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의 창조의 사귐 '안에' 임재하여 있다. ... 하나님은 그의 임재를 통하여 우주 전체를 관통한다. '삼위일체적 창조론'은 하나님과 세계의 '대칭'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내재적 '긴장관계'로부터 출발한다. 즉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그 안에 들어간다. ...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과 세계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다.16)       

           

비록 몰트만이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저서를 분기점으로 삼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내재성에 큰 역점을 두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종말론적 초월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내재성만을 과도하게 강조하지도 않는다. 몰트만에 의하면, 자신의 영을 통하여 창조 안에 있는 하나님은 아직도 창조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여전히 종말론적인 희망으로 남아 있다:  

 

영원하신 분이 지구에서 살기 위해 오신다면, 그때에 지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안식하시지 못하는 희망과 역사의 하나님은 "안식"에 이르실 것이다. 이것은 지구를 위한 위대한 성서적 - 유대교적, 그리스도교적 - 비전이다. 이것은 최후의 약속이다: "보라,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이 사는 곳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계 21,3). 만약 이 최후의 "세키나"(Shekhina), 즉 하나님의 우주적 내주(內住)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지구의 미래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미 여기서, 지금 지구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여길 것이고, 모든 지구 피조물들을 거룩하게 보존할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과 소유자"가 아니다. 아마도 우리는 어느 날 지구의 사제(priest)가 되어, 지구 앞에서 하나님을 대변하고 하나님 앞에서 지구를 대변할 것이다. 우리가 만물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맛보며," 하나님의 오고 있는 영광 안에서 만물을 느끼며, 우주적인 하나님 찬양에 참여할 때까지.17)

 

몰트만에 의하면,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아직도 애타게 기다리며 탄식한다.  

  

파괴당한 이 땅으로부터 오늘날 하나의 기다림이 일어난다. 그것은 해방하고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향한 부름이다. 위협당하는 피조물은 이 외침 안에서 하나님의 영의 도래를 향해 마음을 연다. 구원받지 못한 온 땅에는 슬픔과 함께 기다림도 있다. 그렇지만 봄을 향한 겨울의 기다림 안에는 생명의 봄 그 자체가 이미 예고되고 있다.   

피조물은 어떤 고통으로부터 그의 창조자를 향해 소리치는가? 이것은 두 가지 고통이다. 이것은 인간에 의한 무자비한 점진적 자연파괴이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런 공격이 야기하는 자연 자체의 파괴 가능성의 고통이다. 지구라는 자연은 오늘날 점점 더 인간의 문명에 의한 지배와 착취에 굴복당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오로지 지상적 피조물들, 식물들, 동물들과 인간들이 허무함, 시간의 힘과 죽음의 권세에 굴복당하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이 심연으로부터 생명을 향해 소리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한 측면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 인간의 폭력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고, 다른 한 측면은 자연과 인간이 시간과 죽음의 폭력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18)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몰트만 신학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초월성에서 내재성으로 서서히 옮아갔다고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세계 역사가 하나님의 내적 역사 안으로 흡수되어 하나님의 신성이 세계 역사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하게 될 만큼 하나님의 초월성을 무시하였다."고 몰트만의 신학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것은 몰트만의 사상 전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내린 성급한 비판이라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1) 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신재구 옮김, 20세기 신학,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IVF), 1997, 295쪽 이하.

2) 앞의 책, 298쪽 이하.

3) Stanley J. Grenz, Roger E. Olson, 앞의 책 274.

4) 몰트만, 김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7. 여기서 역자 김균진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숙한 '하나님'이라는 용어 대신에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무엇이 더 올바른 용법인가라는 문제와는 상관이 없이, 여기서 본인은 편의상 '하나님'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쓰기로 한다.

5) 앞의 책 195쪽 이하.

6) 앞의 책, 202.

7) 앞의 책, 222.

8) 같은 쪽.

9) 몰트만, 전경연, 박봉랑 역, 희망의 신학, 현대사상사, 1973, 15.

10) 몰트만, 이신건 옮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1998, 334쪽 이하.

11) 희망의 신학, 14.

12) '희망의 신학'에 나타난 초기 몰트만의 하나님 이해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최근에 발간된 그의 새로운 저서, "오시는 하나님"(김균진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이 바로 그 구체적인 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현재 안에 내재한 하나님'으로 파악되지 않고, 여전히 '미래로부터 현재 안으로 오시는 하나님'으로 파악되고 있다.

13)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 356.

14) 몰트만, 이신건 옮김, 생명의 샘, 성령과 생명신학, 대한기독교서회, 2000.

15)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28.

16) 앞의 책 28쪽 이하.

17) 몰트만, 이신건 역, 과학과 지혜(2000년 5월 19일 서울신학대원 방문 기념 강좌).

18) 생명의 샘, 144쪽 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