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함으로 얻어지는 교회성장

이신건

 

Ⅰ. 한국교회의 성장요인

한국교회의 성장은 세계교회가 부러운 생각을 갖고 이구동성으로 경탄할 만큼 가히 기적적인 것이다. 이 사실은 굳이 불분명한 문공부의 종교 통계자료나 다소 과장된 각 교파의 교세자료를 들추어 보아야 실감나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밤이 찾아올 무렵 아파트나 동네의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보면 한국교회의 성장의 실상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마치 두 집 건너 한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수많은 붉은 네온의 십자가들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밤하늘의 흰 별들보다 더 많이 셀 수 있는―사실은 공해로 인해 창조의 장관을 볼 수 없게된 지가 오래되지만―땅의 붉은 십자가들을 손꼽아 볼 때 어떤 연상이 먼저 떠 오를까. 어떤 순수한 신자들은 하나님이 한국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온통 붉은 보혈의 복음을 모판처럼 심어 놓으셨다고 감격하여 찬송할 것이다. 그러나 간혹 비판적인 자들은 마치 교회가 이젠 그리스도의 무덤이나 된 것처럼 거대한 공동묘지를 보는 것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성장은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무릇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자기안정과 더불어 자기성장을 추구한다. 염세주의자들 외에는 퇴락과 소멸을 찬양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기적적 성장의 요인은 무엇일까. 노길명 교수는 한국교회 성장의 사회적 배경이란 논문에서 그 요인을 사회적 요인과 종교내적 요인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전자에 속하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과 불안의식의 고조. 상대적 박탈감의 증대. 기존의 가치. 권위 및 공동체의 붕괴가 있고. 후자에 속하는 것은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한 현실도피적, 내세지향적 신앙유형. 선교사들의 정교분리의 선교정책. 종교의 조직적 성격. 종교의 사회활동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요인도 있다. 그것은 세계교회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이 자기희생적인 목회자들의 노고와 신자들의 뜨거운 헌신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각별한 구원경륜적 섭리가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Ⅱ. 한국교회의 공헌과 문제점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 끼친 긍정적 역할은 자못 크다 할 것이다. 인경배 교수는 사회변혁적 입장에서 우상과 미신타파. 의료선교와 인간화. 농촌개혁운동. 기독교 교육사업 등을 통한 사회개혁과 변혁에 기역했다고 본다. 이만열 교수는 문화변혁적 입장에서 반봉건의식의 고취. 구습타파. 부패조절. 전통과 한글의 재발견 등을 통한 문화적 변혁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정치변혁적 입장에서 동학농민혁명과 기독교 개화운동의 관계. 민주화운동에의 참여 등에서 한국교회의 역사적 공헌을 본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지닌 문제점들도 이에 못지 않게 숱하게 지적되어 왔다. 가장 많이 거론된 점만 열거한다면. 교직(교권)주의. 개교회주의. 역사도피주의. 개인주의. 교회분열과 신학교난립 및 저질교역자의 양산. 이단종파의 범람. 내세주의. 반에큐메니칼 성격. 신학의 빈곤. 교회론의 약화. 정치무관주의. 합리성의 결여. 이원적 신앙. 성장제일주의와 경쟁주의. 물질주의. 기복신앙. 도그마주의 등등이 있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성장하는 일 외에는 여념이 없었고 우선은 성장에 온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어느 정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젠 교회의 수. 예산. 시설에서 엄청난 업적을 쌓아 올린 황금기의 한국교회는 자신의 성장이 올바른 법칙에 따른 것인지 점검하고. 자기갱신에 지금까지 쏟아 온 힘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잠시 어느날 필자가 우연히 경험한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할까 한다. 전철 안에서 남루한 옷을 걸친 세 명의 노무자들이 조금은 술취한 기분 속에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다. 놀랍게도 비신자들인 그들은 교회를 화제거리로 삼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담화를 엿들었던 필자가 대략 그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요즈음은 교회도 사업이 된 것같다. 같은 동네에 대학원까지 나온 젊은 목사가 30여명의 신도들을 데리고 교회운영을 했는데. 어느날 그 목사가 신자들과 싸웠는지 신자들이 다 교회를 떠나 버렸다. 그 후로 그 젊은 목사는 밤낮 술에 취해서 아내와 심하게 다투는 걸 보니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이야기는 필자의 심중에 큰 충걱파를 일으켰다. 그리고 분명히 위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물론 비신자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말은 하나의 잡담으로 흘려 들을 수 있고. 크게 신경쓸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들은 교회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의를 위하느라고 세상사람들에게서 비난과 조롱을 받는 것과 교회가 자신의 치부 때문에 비판받는 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사실 정직한 신자들이라면 이런 비판에 무조건 대드는 몸짓을 내보일 순 없을 것이다.

  일전에 교회건축을 위해 권총으로 살인까지 저지른 어느 목사의 일화는 극단적 예라고 하자. 신자들도 투기와 사기를 행하고 교회성장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제 비신자들에게도 상식이 돼버렸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교회도 일종의 사업이니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목회자들의 사고에까지 깊숙히 침투해 있다.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장의 그늘에는 수많은 독버섯이 함께 자라나고 있는게 아닐까. 교회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라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이에 어느덧 교회 주위에. 아니 교회 안에까지 생명을 죽이는 암세포도 함께 키워온 게 아닐까. 교회도 이젠 구원기관이 아니라 일종의 향락소비산업이 되어가는 것은 아닌가. 혹시 산업사회에서 소비성향이 증대하는 것과 함께 교회라는 소비산업도 함께 성장한 것은 아닌가.

  사회학자 피터 버거 (P. Berger)의 말에 의하면 다원주의의 상황에서 종교제도는 점차로 매매기관이 되고 경쟁적인 시장기관으로 변형된다고한다.

  그렇다면 술집과 여관의 번창과 교회의 숫적 증가 사이에는 일종의 함수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즉 세상인들은 술과 섹스로써 육체적 스트레스를 풀고. 신자들은 달콤한 위한. 심리적 보상. 죄책감의 해소 등으로써 정신적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아닐까.

 

Ⅲ. 두 종류의 교회성장

만약 우리가 교회를 오로지 사업번창 성장 그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회적 기관으로 본다면. 한국교회는 대단한 사업적 성공을 거둔 단체로 평가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미래도 자연히 교회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물량적 비중. 현실적 헤게모니의 범주 안에서 고려될 것이다.

  교회는 사회적 변동에 가장 민첩하게 적응하는 한. 앞으로도 크게 성장할 것이다. 계속 우수한 상품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교회는 크게 번창하여 전국적 체인망을 갖는 거대한 산업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그렇지 못한 교회는 영세한 구멍가게로 남아 골목의 모퉁이에서 생존을 유지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중산층 이상의 인구가 밀집된 지역의 교회는 가급적 종말론적 예언자적 비판적 설교를 하지 않고 고상한 중산층의 이데올로기에 잘 영합하는 설교를 하고 그것을 선전하는 한 부유하고 거대한 사업체로 발전할 것이다.

  서민층의 인구가 밀집된 지역의 교회는 사회구조적인 악에 눈을 돌려 피곤하게 부딪히라고 부추기지 않고 내세적 보상. 기복적, 기적적 희망을 계속 주입시키는 한. 어느 정도의 고객을 확보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시의 대교회 주변에 있는 중소교회들은 제각기 독특한 상품개발에 성공하고 개성적 고객을 잘 유치하는 한. 대교회에서 식상하고 서민교회에도 어울리지 않는 자들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를 순수히 숫적 성장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일종의 사회적 실체로 본다면 이 이상 더 적절한 성장전략이 있을까.

  그러나 교회는 교회로서 성장해야 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결코 물량적 성공에 토대를 두는 사회적 성장이 아니고 그 신학적 내용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마땅히 성장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교회로서. 즉 신학적 실체로서 성장해야 한다.

  분명히 교회는 외형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아니 교회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하는 성령의 사역 때문에 성장한다. 이것은 단지 현실적 산술계산이나 낙관적 역사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겨자씨,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의 불가시적, 기적적 성장을 암시하지만. 교회가 그 나라의 전조형태로 역사 속에 심겨지는 한. 교회도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성장할 것임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숫적 증가는 용이하지도 않거니와 무한 성장은 불가능하다 (겨자씨, 누룩의 비유는 또한 제한된 범위를 암시하고. 또 변화. 용해를 통한 자기제한을 의미한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 지양되고 능가된다). 그리고 외형적 성장은 아무리 대단한 성장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내실적, 질적성장을 통하여 일어나지 않는다면. 물과 술이 섞이듯 혼탁해질 것이고. 종내는 교회라고 볼 수 없는 초라한 성장만이 남게 될 것이다. 질적 성장은 당연히 양적 성장을 동반하기 마련이지만. 양적이기만 한 성장은 결국 교회의 질을 망가뜨리고 교회 전체를 다른 모습으로 일그러뜨린다.

  아무리 큰 규모인들 교회가 아닌 모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안공적인 유전자공학의 세포증식에 의해 만들어진 쥐가 아무리 고양이보다 더 큰들 어찌 그것을 고양이라고 부르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양적 성장보다 질적 성장에 우선 비중을 두어야 한다. 오직 내실적(영적)으로 성장함으로써만 교회는 외형적(물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Ⅳ. 교회성장의 교회론적 분석

그렇다면 교회의 진정한 성장의 준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성경적 교회론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교회는 성장에만 급급하느라고 자신의 본질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역사 속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묻지 못했다. 그 사실은 특히 개신교회에서 교회론이 얼마나 초라하고 미약한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교회의 근원에 대한 질문은 소박한 복고주의나 환원주의의 요구가 아니다. 또 성경의 교회상을 오늘에 그대로 옮겨놓는 일을 불가능한 비역사적 이상주의의 환상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 속에서 변천하면서 자신의 근원에 관해 묻지 않는다면. 도대체 교회의 목표를 어디서 찾을 것이며. 부패한 교회의 갱신의 근거를 어디서 끌어올 것인가.

  갈 시대마다 교회상은 조금씩 바뀌어 왔고. 또 교회사를 판단하는 척도도 변해 왔다. 그러나 한스 큉 (H. Kung)의 말대로 신약성경의 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그대로 본뜰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의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서 적용하여야 할 근원적 설계다. 만약 교회의 진정한 성장의 준거를 여기서 가져오지 않는다면. 아마 남는 것은 시대정신에의 영합. 기업성장 전략의 적용. 목회자의 이상실현. 신자들의 군중심리에의 적응. 사회적 요청 등등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교회이기를 그치고 사회단체의 하나로 전락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경의 교회상 전체를 모자이크식으로 짜맞출 순 없다. 단지 가장 중요하고 빈번한 세 가지의 교회론적 개념의 틀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 성도들의 교제)안에서 한국교회의 성장을 신학적으로 원론적으로나마 진단해보고자 시도하겠다.

 

  1)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유래하여 그 나라를 향하여 나가는 중간기적 실체이다. 예수님은 생애 중에 직접 교회를 설립하시지 않았고. 더욱이 전 이스라엘과 분리된 다른 집단과 제도로서의 교회를 창안하시지 않았지만.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 (야웨통치) 는 그분의 백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그분과 계약을 맺은 평등한 계약공동체로서 전 인류를 위한 제사장적 중보의 소먕과 예언자적 사영을 위임받았다. 신약성경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에서 새롭게 제정되고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성취된 언약 위에 세워진 형제적 공동체로서 그분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와 치유. 말과 행위로써 증언하도록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신에게 목적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 반영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올바로 지시하고 그것의 성장에 여지를 주는 한. 교회도 성장한다.

  한국교회는 국운이 기울던 암울한 시기에 설립되어 옛부터 하늘을 섬겨오던 백성들에게 하나님 (하늘)의 나라의 소망을 전해 주고 그들을 위로하고 각성시켜 왔다. 백성들은 새로운 종교에서 새로운 용기와 기쁨을 얻었고. 각종 모임을 통하여 감화받고 교육받아 교회의 일꾼으로서 헌신적으로 봉사했다.

  한국교회의 성장 배후에는 열렬한 구령열에 불탄 사명자들. 희생정신으로 교회를 섬겨온 평신도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다. 그들의 뜨거운 유산은 지금까지도 한국교회의 성장의 큰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 전래된 하나님의 나라는 대체로 근본적인 선교사들의 신학적무지. 정치적 계산. 한국의 억압적 상황. 백성들의 종교적 심성 등에 의해 심히 굴절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다분히 내세적, 영적, 기복적, 주술적 피안세계를 의미했고. 위로의 기능만을 주로 수행했을 뿐 비판적 기능은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교회는 세상의 빛이라기 보다는 도피처. 세상의 소금이라기 보다는 설탕. 하나님의 나라의 전위대 (돌격대)라기 보다는 구원의 방주 (하늘 두레박?) 의역할을 주로 수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나나님의 백성의 예언자적 사명은 억압당했고. 제사장적 중보도 다분히 개인 근본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오늘의 강단에서 들려오는 설교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진지한 주석이 아니라 대부분이 목회자의 신념강의. 도덕설교. 적극적 신념과 긍정적 사고방식. 성공신앙. 기계장치로서의 하나님. 세상적 처세술의 전파가 되고 있다. 여기엔 세상나라. 인간나라. 맘몬나라가 세워질 토양은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할 여지는 척박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의 성장은 초라하고 기형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 반영해야 할 교회가 그것을 억압하고 대체하거나 사부의 세계로 추방시켰다. 진정한 교회는 복음이 순수히 선포되는 곳에 있다고 종교개혁자들은 말했다. 한국교회는 다시 새로이 탈출해야 한다. 진정한 복음에로 돌파함으로써 교회는 이 세상 안으로 돌입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할해 전열을 가다듬고 진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군주적 개념 (하나님의 유일통치)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민주적 개념 (보편적 형제사랑)이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는 성직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부자와 빈자. 높은 자와 낮은 자 사이의 구별과 장벽이 철폐된다. 한국 교회가 특히 여권을 신장시키고 인간성을 회복하는 일에 크게 기여했음을 주지의 사실이다. 교회는 민주훈련의 장이었고 협동적 사랑의 산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교회 안에는 유교적 권위주의. 위계질서. 폐쇄주의가 강한 힘을 떨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매우 비민주적일 뿐만 아니라 보수적, 권위지향적 아니 체제지향적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교회는 도도한 민주화의 물결에 떠밀릴 게 아니라 앞장서서 교회 안에서부터 바깥을 향해 아래로부터의 폭넓은 민주개혁을 주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증인이 되고. 세상에 대해 진정한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

 

  2)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통치가 실현되는 영역이다. 그분은 단지 하늘에서만 통치하시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 교회의 머리로서 통치하시고. 또 자신의 몸을 교회의 몸으로 구성하신다.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서 통치. 현존하는 형식은 무엇보다도 선포와 성례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이길 원한다면.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 오직 그분만을 교회와 세상의 주로 고백하고 그분이 주신 은혜를 공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대신에 다른 세상적 척도. 전력이나 명예. 물질이나 성공. 신비나 도덕이 우세를 떨치는 곳에는 그분은 현존하시지 않는다.

그분이 현존하시기로 약속한 곳은 허약한 인간의 언어를 통한 복음선포. 죄인들의 예배와 사귐. 비천한 자들과의 연대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한국교회만큼 많이 설교하고 듣는 교회도 없다. 주의 말씀을 통해 주의 영이 지배하는 곳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교회는 일차적으로는 듣는 교회이다. 매스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 언어의 의미상실 등으로 인해 점차 설교가 위협받고 있지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설교를 대신할 순 없다.

  한국교회는 참으로 듣는 교회이다. 신도들은 수많은 설교를 듣는다. 아직도 신도들의 영혼은 가난하기에 복되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려하기에 복되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려고 모이는 그곳에 교회가 성장하고 번식한다.

  그렇지만 한국신도들은 아직도 계속듣지만 하는 허약한 신자들이다. 평신도들의 성경연구의 열기. 제자화운동 등의 발전이 있지만. 아직도 평신도들의 성경지식의 수준은 걸음마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성경읽기는 많아도 깊이있는 성경연구는 미진하고. 때로는 목회자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다.

  목회자들은 계속 비성숙한 신자들은 양성함으로써 의존적인 신자들을 길러낸다. 간혹 성경연구에 몰두하고 질문하는 똑똑한 청년이 있으면. 목회자들은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신학교를 가는 게 낫지 않느냐고 밀어붙인다. 신도들의 신학적 비성숙성과 더불어 심각한 문제는. 신자들은 듣기만 할 뿐 증언할 줄 잘 모르며. 더욱이 행함이 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육적 목회와 실천지향성 교육의 부재로 인해 신자들은 제사와 분향에만 몰두하고 인애와 순종에는 소홀하게 되었다. 주여 주여 하고 주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가 어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듣기만 할 뿐 스스로 성경을 탐구하고 말하고 행하는 신도들이 적다면. 교회는 매우 초라하게 성장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보이는 말씀인 성례전의 집행에 너무 소홀하고 그것도 관습적이고 폐쇄적이다. 초대교회에서 성례는 선포와 동등한 비중을 차지했다면. 지금의 개신교회에서 성례전은 단지 설교의 장식물이거나 일년에 몇번 치르는 연례행사로 평가절하되고 있다.

  또 성만찬의 의미도 너무 과거지향적이다. 즉 성만찬은 십자가를 회상하고 통회하는 참회행사만 될 뿐 크리스챤들 상호간의 횡적 일치의 제전. 하나님의 나라에의 소망의는 치의 요소는 완전히 빠져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나누셨던 개방적 식사의 의미는 완전히 퇴색하고. 성만찬은 단지 등록된 세례교인들의 비밀식사가 되어 오히려 신자들 간의 불일치를 조장할 위험이 있으며. 개신교회에서도 가톨릭의 미사집전처럼 성례전집행이 목사들에 의해서만 독점되어서 자주 실시될 수 없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지만 성경적 근거에서 볼 때. 그리고 폭넓고 의미있는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특히 성만찬은 과감히 열려진 은총의 표지로. 공동체의 일치와 희망의 표지로 자주 나누어져서 실시되어야 할 것이 요청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나타낸다. 신약성경에서 공동체는 다수이면서도. 또 서로의 신학과 환경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임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기에 교회의 단일성은 꼭 제도적, 교권적 단일성일 필요는 없다. 교회의 일치는 다양성 속의 일치다. 그렇다고 그것은 다양성을 통한 분열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은 가끔 세포분열을 통해 가능한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세계교회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제각기 찢어 나갔다. 대개가 교권투쟁. 이권싸움에서 비롯된 분열이었다. 그래서 남북통일만이 아니라 교회일치에서도 매우 큰 장애물은 바로 교회이다. 세포분열을 통한 성장이라고 교파분열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암세포도 많이 증식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양성 속의 일치는 다양성을 통한 일치이지 다양성을 억압하는 획일성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분열상의 이면에는 획일적 교권주의가 도리어 분열을 초래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가장 보수적인 교회가 가장 분파적임을 드러냈다. 한국교회의 폐쇄성은 전통적인 유교적 패쇄주의. 집단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신학적 도그마주의의 탓이기도 하다.

  교권주의. 폐쇄주의와 도그마주의는 한국신학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다. 신학은 이론논쟁에서 설득력을 얻거나 쇠퇴함으로써 걸러지는 것이지 교권적 인사들의 독단의 칼로써 다듬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분열로 인한 자중지란. 이전투구. 교회권위의 상실을 회복하고. 억압으로 인한 분열과 자유의 질식을 없애기 위해 에큐메니칼한 교회로 나가야 한다.

 

  3)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친교)이다

  교회는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바로 믿는 신자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모임의 사건성과 나눔의 사회성을 특징으로 한다. 예배를 위해 모이는 일에 한국신도들은 다른 나라의 신도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가장 자주 모이고 가장 큰 교회를 만든 게 한국교인들이다. 이것도 한국교회의 성장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나눔(사귐)의 사회성은 너무나 미약하다. 이미 큰 교회는 성도들의 친교이기를 그치고 성도들의 집합이 되었다. 신자들 간의 횡적인 사김과 나눔이 없는 교회는 엄밀히 말한다면 교회가 아니라 대중집회손나 공연장과 같다.

  이 문제만 심각한 게 아니다. 큰 교회는 더 커지려는 속성. 아니 더 커질 수 있는 잠재성을 가졌기 때문에 재정의 대부분은 시설확장에 계속 투자됨으로써 교회의 다른 중요한 사명은 뒷전으로 미루어진다. 대형버스로 마치 작은 물고기까지 잡아 올리는 대형 저인망처럼 넓은지역에 있는 교인들을 한군데로 몰아 넣는다.

  그래서 교회는 철저히 자본주의의 생존경쟁의 철학에 순응되고 결국 교회 간에도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히 조장된다. 큰 교회의 목회자들은 큰 교회의 위압감을 등에 업고 큰 위세를 부리고 큰 감투를 쓰려고 애쓴다. 교회 안에서도 성도들의 따뜻한 친교보다는 군중심리가 교회의 성격을 좌우한다.

  더욱이 핵가족 풍조. 개성문화의 발달. 세속도시의 익명성과 유동성 때문에 간편한 인스턴트 교인들이 늘어나고. 거기에 잘 적응한 대형교회는 잘 성장하고. 약한 교회에는 사전답사하러 오거나 이전해 오거나 이사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진다. 이로 인해 교인들은 교회 안과 교회 주위의 공동체를 위해 함께 논의하고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예배가 끝나기 바쁘게 총총 흩어져 버려서 교회의 공동체성. 지역성은 점차로 증발된다.

  이러한 현상은 산업사회의 세속화의 현상이지만. 또 세속화는 그 자체로서 악한 것도 아니지만. 교회는 세속화에 역류하지 못하고 계속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성장전략을 세우기에 바빠진다. 농촌교회는 피폐되고 도시교회는 살이 찌며. 도시 인에서도 상대적 차이가 날로 커진다. 이리하여 교회의 공동체성. 보편성. 연대성 보다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한다.

  이러한 문제는 지역교회들이 더불어 하나가 되는 노력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교파와 지역을 초월한 공동체성 회복을 통하여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며. 교회와 국가의 과제에 협력하기 위해 개교회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당연한 교회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성도들의 공동체는 성도들 간의 친교안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에의 참여이다. 크리스챤들은 스스로 거룩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참여함으로써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진정한 거룩은 예배. 그리스도의 말씀의 수납. 그분의 뒤를 따름. 그로 인한 사도적 고난과 가난의 감수. 끝없는 회개와 순종에로의 결단을 통해 선사된다.

  그런데 한국교인들은 예배에의 열망에 비해. 그리고 거룩한 것들에의 열망에 비해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제자도의 실천. 순종적 삶이 약하다. 목회자들은 신자들과 세상의 어두운 면을 고발하는 설교를 자주 하면 교회성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거룩한 삶을 호소하기 보다는 가급적 평안한 삶을 강조한다. 신자들도 세상에서 지친 마음을 목회자가 어루만져 주길 바랄 뿐 자신의 양심을 찌르거나 자신의 기득권에 도전하는 설교를 달가와하지 않는다. 그런 교회는 대개 보수적이고. 온 보수적인 교회는 대개 숫적으로 성장한다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저지하면서 숫적 성장을 도모하는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때 버림받을 운명에 처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숫적증가의 심리에는 단순한 구령열 못지 않게 우월욕구. 지배욕구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포기하셨던 것이다.  

  한국신자들은 수동적인 은혜의 수납자만이 아니라 능동적인 실천가가 되어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일도 수행해야 할 임무를 빚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없으리만치 큰 교회는 교회 안에서 작은 교회를 만들고. 더 나아가 자신을 남에게 부여하여 세상의 전체에 넓게 퍼져 흩어지는 교회를 강조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은 끊임없는 자기희생. 자기숭배의 거부. 나눔과 더불어 사는 것을 실천함으로써만 가능하리라 본다.

  끝으로 성도들의 거룩은 자신의 자질 때문이 아닐 끊임없는 자기갱신. 회개를 통해 선사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도인 것이 아니라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즉 죄를 고백하기 때문에 성도인 것이다.

  한국교회가 칭찬과 영광을 받을 일은 많다. 그러나 칭찬과 영광은 주님의 것이고 교회는 무익하고 불충실한 종임을 회개하기를 그치지 않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은 남달리 자주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도록 요구받아 왔다. 부흥회나 절기집회등을 통하여 신자들은 간절하게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교회는 공공연히 지은 죄를 하나님과 민족 앞에 고백한 적이 드물다. 특히 신사참배의 죄. 남북분단과 그 고착화에의 책임. 독재정권에의 협조. 민중들의 고난의 외면 등등의 죄를 한국교회는 공공연히 회개함으로써 거룩한 길을 걷도록 힘써야 한다.

  회개는 결국 교회갱신의 첩경이고. 문제투성이의 죄인들의 (Communio Peccatorum) 성도들의 공동체 (Communio Sonctorum)가 계속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semper reformanda).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는 여전히 알곡과 가라지가 섞인 혼합된 단체 (Corporis Permitum)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진정한 성장은 얼마나 진지하게 자신을 절대화. 합리화하지 않고 자기갱신을 강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올바로 성장했는지 심판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의 외형적 성장이나 비대가 아니라 얼마나 비천한 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가 하는 그 정도에 있다. 결국 교회의 성장과 성공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그 나라 안으로 지양되는 것에 달려 있다. 교회는 오직 기다리는 교회일 뿐이다. 나라이 임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