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의 부활관

이신건

 

 Ⅰ. 들어가는 말

  어떤 사회든지 분화 뒤에는 통합이 이루어지고 또 통합은 새로운 분화를 촉진한다고 할 때 분화는 반드시 통합을 전제로 하고 통합은 또한 반드시 분화 위에서 이루어진다 통합과 분화의 과정은 서로 순환관계를 이룬다(분화→분전화→자율화→통합화→문제야기→통합화에의 압력→집권화→통합화→통제화→과통제화 야기→탈통제화에의 압력→분화→....) 그렇지만 분화와 통합은 각기 서로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져간다 하더라도 사회발전과정에는 반드시 주경향과 반경향이 있고 근본요인과 파생적 요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리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불가피한 다원화의 과정에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원사회에서는 정치적 주도집단의 다두화(多頭化), 사회적 다핵화(多核化), 문화적 다양화(多樣化)가 확연한 주경향을 갖는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 Toffler)는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력히 밀려오는 탈획일화의 물결을 “제 3의 물결“이라고 칭한 바가 있고 피터 드러커(P. Drucker)도 이미 시작된 21세기의 특징을 “새로운 다원시회의 출현”에 있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 탈현대화)에 관한 논란이 여러 분야에서 활발히 일어나면서 다원주의를 더욱 촉진시키고 있다. 이것을 보는 시각은 아직도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지만 대체로 대립적인 견해가 서로 비판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제국주의 문화의 침투결과(독점 자본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보는가 하면 어떤이는 이것을 전체주의적 억압구조에 맞선 주관성과 개체의 자유 시민 사회의 다양성 평등 연대를 찬양하는 반가운 신호로 바라본다. 여하튼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은 탈권위화 탈중심화 중심해체등을 가속화하리라고 생각된다.

  다원사회의 출현은 당연히 문화의 실체인 종교(P. Tillich)에도 파급될 수밖에 없다. 실로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적 다원주의가 새롭게 대두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종교다원주의를 낳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갈수록 좁아져 가는 지구촌에서 타종교의 활력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지만 그 밖에도 과정철학(모든 것은 끊임없는 변화 운동의 과정 새로움을 추구하는 과정에 있다), 세계 시민성을 통해 개인적, 민족적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현대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새로운 국제질서(공동의 세계건설을 위한 협력)등의 요인도 종교다원주의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출현은 어느 종교보다 그리스도교에 큰 불안의 원인이 되고 있다. 특히 감리교단 안에서 일어난 최근의 다원주의 논란은 더욱 성숙하고 책임적인 응답을 요구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부활관”을 다루기 위해 필자는 먼저 종교다원주의의 종교관과 틀(파라다임)을 분석한 뒤에 특히 폴 F. 니터의 부활관을 소개 비판하려고 하며 종교다원주의의 한국적 수용이랄 수 있는 홍정수의 부활관과 비판적인 대화를 나누려고 하며 끝으로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 과제를 한국교회에 제시하려고 한다.

 

Ⅱ. 종교다원주의의 종교관

  종교다원주의의 종교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문제삼는 종래의 종교관들을 잠깐 열거한 뒤에 종교다원주의자인 니터의 입장을 해명해 보는 것이 유익하다.

   1. 상대주의(Relativismus) : 상대주의의 가장 분명한 대변자는 트뢸취(E. Troeltsch)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종교들은 공통적인 그 무엇 즉 신의 현굴 또는 신의 계시를 함께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인 종교란 있을 수 없다. 어떤 종교도 자신이 모든 것에 해당하는 상대성을 초월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어떤 종교도 완전히 역사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생애 말기에 다른 종교들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우월성 또는 규범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 근거로써 그는 그리스도교의 성공 인격주의적 구원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우월한 영성을 들었다. 그러나 트뢸취는 1923년에 서거하기 전에 작성했다가 사후 유저로 출판된 한 강의록에서 다시금 자신의 견해를 수정했다. 그는 자신이 일종의 문화적 제국주의의 죄를 범했다고 자백하고서 한 종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는 판단은 그 어떤 것으로도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그는 상호이해와 사랑에 근거한 관용을 주장했다.

  니터는 종교의 역사적 제약성을 긍정하면서도 역사적 상대주의의 지나친 단순화에 이의를 제기한다. 예수에 의해 창시된 종교는 상대적이면서도 다른 종교들보다 더 우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그는 배제하지 않는다. 대체로 종교적 상대주의는 단지 새로운 절대주의를 위한 가면으로 보인다. 상대주의는 실로 절대주의의 쌍둥이와 같다. 왜냐하면 이 둘은 보다 높은 비역사적 전망대 위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절대주의(Exklusivismus) : 보수적인 복음주의는 “참된 종교는 오직 하나이다.”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크푸르트 선언(1970)에서 분명하고도 힘차게 표현되어 있다. 구원은 단 한번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십자가 사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신앙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구원의 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종을 위한 복음선포를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로 대치하는 것은 복음의 매춘행위로서 절대적으로 거부된다. 로잔에서 열렸던 세계복음화 국제대회(1974)도 성서의 절대적 권위 그리스도의 유일회성 복음주의의 절박한 요청을 강하게 재확신시켰고 일종의 절충주의나 대화를 일체 거부했다.

  칼 바르트(K. Barth)도 지금까지 절대주의의 전형적 투사로 이해되고 있다. 그는 자연계시의 잠재능력을 부인했으며 “종교는 불신앙이다.”라는 명제를 내세웠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도 다른 종교들보다 낫다고 볼 수 없지만(적극적인 우상숭배와 자기 의) 그리스도교는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죄의 용서 때문에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실재만이 종교를 참되게 하고 가치있게 한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교회 밖의 구원의 가능성을 배격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초된 세상 구원에의 참여는 오직 교회의 매개나 교회선포에만 매여 있진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활동은 모든 인간과 관련되어 있고 보편적, 우주적 경향성을 갖기 때문에 그의 말씀은 성서와 교회의 고백과 교의 외에도 세속적인 휴매니티 우주의 빛들과 진리에 의해서도 매개 확증된다. 이러한 입장은 포괄주의에 가깝다

  니터는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인간경험과 지평융합(가다머) 되었기 때문이며 문화는 역사적 상대성으로서 경험되기 때문이며 특히 다른 종교인들 속에서도 신앙 헌신 사랑 평화의 빛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주류 신학자들(P. 알트하우스, E. 브룬너, P. 틸리히, W. 판넨베르크 등)은 보수적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다른 종교들 안의 계시(원계시, 창조계시, 일반계시, 보편적 종교사)를 인정하는 방향을 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안의 구원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태도를 여전히 고수한다. 그들은 다같이 그리스도가 구원을 위해 필연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복음적 보수주의자들과 같이 이들에게서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구성적인(Konstitutiv)요소가 된다.

  니터는 일반계시와 구원계시 사이의 구분을 자의적, 임의적인 것으로 본다. 구원과 참된 신경험으로 전혀 이끌어 가지 못하는 계시를 제공하는 신은 변덕스럽고 고통을 주는 신이라는 것이며 이런 식의 범주(율법-복음의 범주)는 사랑의 신에 대한 신앙을 심각할 정도로 위태롭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니터는 지혜 혹은 로고스 그리스도론에서 모든 역사안의 말씀의 보편적 현존을 보려고 한다.

 

  3. 포괄주의 (Inklusivismus) : 포괄주의는 주로 제2바티칸공의회 이후의 가톨릭의 모델이고 이 이론의 중요한 개척자는 칼 라너(K. Rahner)이다. 그는 신의 보편적 구원의지 구원론의 낙관론을 그의 독특한 인간이해(초자연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와 결합시켜서 전개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초자연적 본성 안에 이미 선험적 계시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 은혜는 인간본성에 대한 외적 부가물로 죽어진 게 아니라 인간의식의 심리학적 구조 안에 주입되어 있다. 계시하고 있는 은혜와의 만남은 다양한 실제적 삶의 정황 가운데서 경험될 수 있고 이러한 신경험은 계시만이 아니라 구원도 포함된다. 따라서 비그리스도교 종교들도 신의 구원계획에 긍정적으로 포함되는 수단일 수가 있다. 이러한 이론은 종종 익명의 그리스도교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타 신앙인은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으로써 라너는 그리스도교의 배타주의를 깨뜨리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그리스도는 여전히 구원의 절대적 보증이고 그리스도의 구원은 규범적인(Normativ) 요소이다. 길은 많으나 규범은 하나이다.

  한스 큉(H. Kung)은 라너의 이론이 신학적 기만일 뿐이고 교회를 우주적 현존으로 증발시키며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사회적 특성과 독특성을 상실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규범성 궁극성을 견지한다. 그는 다른 종교들 안에서 그리스도로 구성된 구원계시록에서 발견되지 않는 보물이 발견될 수도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교가 모든 타 신앙에 필수적인 비판적 촉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톨릭의 모델은 성공회 동방정교 제3세계 신학자들(송천성, 고야마), 과정신학자들(J. B. 캅, S. 옥덴, N. 피텐저),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니터는 이 이론의 통찰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비판하며 그리스도의 규범성 궁극성에 대한 신념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이론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요구는 우리의 현 경험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Ⅲ. 종교 다원주의 (Pluralismus)의 틀

  1. 신 중심적 모델로의 전환 : 종교다원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의 궁극적 혹은 결정적 규범성이라는 지점을 문제시하고 이를 넘어가려고 시도한다.(J. Hick, R. Paniker, S. Samartha, P. Knitter, S. M. Ogden). 이들 가운데 옥덴은 조금 독특한 입장을 차지한다. 그는 배타주의 포괄주의 및 다원주의를 넘어서는 제4의 모델을 개발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배타주의와 포괄주의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구성적인(Konstitutiv) 요소로 보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 반면에 그의 제4의 대안을 이 사건이 구원의 가능성을 위한 재현적인(reprasentativ)요소라고 본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신의 사랑을 구 성 하는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재현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 이미 항상 은밀히(implizit) 현재해 있는 구원의 가능성을 다시금 현재화하고 명시화(explizit)함으로써, 신의 사랑을 결정적으로 재현한다.(reprasentiert). 다원주의가 실제로 많은 참된 종교들 혹은 구원의 길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옥덴의 제4의 대안은 실제로 그런 것들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점에서 양자는 서로 구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덴은 그리스도교가 참된 종교라면 다른 종교들도 똑같이 참된 종교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가능성은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 인해 구성된 게 아니라 오로지 영원 속의 한 사건(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성되었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신의 사랑은 항상 거듭 새로운 사건이 된다. 보편적으로 현재하고 모든 인간의 삶 속에서 활동하는 바로 이 사랑 때문에 구원은 항상 어디서나 가능하고 모든 종교적 실천은 변형되어서 그 종교는 참된 종교가 될 수 있다. 비록 옥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신의 결정적 재현으로 보긴 하지만 구원의 구성적, 규범적 원인을 영원한 신의 사랑에 두는 한에서 다원주의자들과 같이 결국엔 신중심적 모델로 접근한다.

  J. 힉은 그리스도교 중심적 또는 예수 중심적 모델로부터의 보편적인 모델인 신중심적 모델로의 패러다임 전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표현한다. 이 전환은 그리스도교가 중심이라는 교리에서 신이 바로 모든 인류가 선회하는 주변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으로의 전환이다. 그런데 힉은 종교적 숭배, 묵상, 체험의 대상을 영원한 일자(The Eternal One) 라는 말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체험은 세가지의 중요 유형을 갖는다. ① 인격적 존재와 의지로서의 신체험 ② 온 세계 또는 온 우주를 신적인 실재의 현현 내지는 매체로 경험하는 자연적 또는 우주적 신비주의 ③ 자아가 신적 실재에 일시적으로 흡수되어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일자(알려진 것)는 알고 있는 자의 양태에 따라 알려지고 종교적 신앙은 문화적으로 조건지어지기 때문에 종교적 신앙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종교라는 복합적 전체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동일한 신적 실재 이른바 영원한 일자에 대한 다양한 인간의 반응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만이 참 종교로 인정하는 것은 고집불통의 신앙이고 유일한 범주라는 것은 쇼비니즘적 동기를 갖는 저마다의 교리적 주장이다.

  니터에 따르면 예수의 선교와 인격은 철저히 하나님의 나라중심적이었고 이는 곧 신중심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철저히 신중심적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중심주의 없는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그리스도교 계시 뿐만 아니라 다른 신앙에서 발견되는 계시들에도 침입해 들어가는 우상숭배로 쉽게 빠져들게 한다. 예수에게 적용된 신적 칭호들은 모두 역사적, 문화적 문맥과 관심에 의해 조건지어진 신화적 모델들과 상징적 이미지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들은 문자적으로 취급되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니터는 신약성서의 그리스도론적 진술들을 모두 신화로 취급한다.

 

  2. 성육신의 거침돌 제거 : 종교다원주의 자들은 신중심적 모델을 위해 그리스도 중심을 해체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 예수의 신성을 벗기고 그를 인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 이를 위해 신의 성육신이라는 거침돌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J. 힉은 성육신의 개념을 은유적, 시적 표현 혹은 신화적 표현으로 본다.“그것은 진리나 어떤 가치가 인간의 삶 속에 살아 있을 때 그 삶에 육화되어 있는 것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은유이다. 예수는 신에게 자신을 개방하여 신의 뜻에 응답하고 신의 목적 앞에서 솔직하게 삶으로써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신적인 아가페와 더불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와 똑같은 실체를 지녔다든지 인간과 신이라는 두 가지 완전한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전적으로 인간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특수한 인간개념은 본래 상상력이 풍부한 많은 고대 문화의 언어에 속하는 은유적 관념이었는데 그리스도교 전통이 이런 시적 언어를 산문조로 바꾸어 버림으로써 은유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삼위일체의 인격인 형이상학적 성자(God the son )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R. 파니카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실재 즉 신 인간 우주의 전체성에 대한 살아있는 상징이다. 그리스도는 신 인간 세계 사이의 통일의 상징이자 그 본질이다. 그러므로 그는 아들이신 신 로고스와 동의어이다. 그리스도 또는 로고스는 궁극자의 외적 표현 창조적 전달로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성육신되었지만 이 성육신이 예수 안에서만 유일하게 궁극적으로 그리고 규범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니다. 어떠한 역사적 이름 또는 형식도 그리스도의 충분하고 궁극적인 표현일 수는 없다. 예수는 그리스도이지만 이 말이 곧 그리스도는 예수라는 것과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의 신의 성육신은 파니카에 의해 일반 종교사 안으로 평준화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다른 이름으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Ⅳ. 종교다원주의의 부활관

  로고스 하나님의 성육신의 역사성 내지 성육신의 유일회성이 신화로 격하되고 이 신화가 다른 종교의 성육신도 수용할 수 있게 되면 결국 예수의 부활도 그 역사성 유일회성을 필연적으로 상실당하고 일반 종교사 안으로 평준화되는 길만 남게 된다.

  니터는 부활절 신앙이 계시 또는 회개의 경험으로 묘사될 수 있는 깊은 인격적 신앙경험에서 발생했다는 설명에 동조한다. 부활절 사건은 단순히 객관적 사건으로만 묘사할 수도 없고 단순히 주관적 경험으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는 일반적인 견해를 니터도 수용한다. 그러나 그는 부활절 신앙을 신앙 또는 경험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평준화시킨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 실재란 예수 부활의 현실성(역사성)이 아니라 은혜 신의 능력 혹은 영이다. 부활절 신앙은 바로 이 은혜가 심리학적 실재와 인간 경험들을 통해서 중재된 것이다.(회개 또는 계시 모델) 그러므로 그러한 경험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에도 경험할 수 있거나 경험해야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며 그러한 회개 혹은 신앙경험은 뭇 선남선녀들이 그들의 전형적인 종교 지도자의 죽음 이후에 그에 대한 경험 속에서 느끼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예로서 니터는 부다(Buddha)를 소개한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사후 그들의 인격적인 변혁 즉 신앙 속에서 전수된 새로운 지속되는 소명을 받지 않았는가? 그들은 그들 한가운데서 계속하여 붇다의 영과 그의 참된 현존을 느끼지 않았는가? 불교인들은 물론 부다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하다. 이들의 문화 경험 속에는 유대교의 첫 예수 추종자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부활이 썩 유용한 해석의 신화 혹은 모델이 아니었다. 일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부활 모델을 사용함이 없이 살아있는 예수에 대한 그들의 경험에 관해서 말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만약 그리스도 사건이 인도인들 사이에서 발생했다.면 인도인들은 그의 영속하는 모델로 해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니터에 따르면 예수의 부활은 다른 경험의 모델로도 설명될 수 있는 신화적 해석의 틀이고 그 핵심은 제자들에게 일어난 영적 현존의 경험이다. 따라서 이런 경험은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예수의 부활은 그 모든 본래적 신비와 힘에 있어서 반드시 하나이며 유일한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니터는 대승불교의 트리카야(Trikaya) 신화를 또 예로 든다.

   이들 창시자들도 변형된 영적인 그러나 실제적인 방식으로 계속해서 존재한다. 그들은 죽음에 정복되지 않았다. 이러한 인상은 대승불교의 트리카야 신화에서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나는데 거기에 보면 부다는 신성화되었고 그럼으로써 그를 믿는 자에게서 참으로 현존하는 영광된 몸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U. 빌켄스의 말대로 예수의 부활에 관한 신약성서의 담화 안에서 다른 해석을 통해서도 잘 대체될 수 있을 신앙의 체험을 위한 표현의 수단만을 단지 인식하려 한다면(W. Marxen) 그것은 너무 경솔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의 현현은 부활한 그와의 늘 새로운 만남의 고백으로서 전승되지 않았고 첫번째의 조원적 증인들이 받은 전권(Bevollmachtigung)의 유일회적 행동으로서 전승되었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원시 기독교의 담화에서 결정적인 점은 역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전능이 발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체험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발생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Ⅴ. 종교다원주의의 부활관의 한국적수용(비판적 대화)

  한국 신학계에서 종교다원주의를 활발히 소개하고 도입하려는 신학자들 가운데 부활관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이는 홍정수이다. 그는 새로운 사유방식의 바람인 포스트모더니즘을 적극적으로 환영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다원주의 시대에 돌입했다.”고까지 선언한다. 그의 부활관에는 종교다원주의적 요소, 과정철학적 요소 및 상생(相生) 철학적 요소 등이 섞여 있고, 변증법 신학시대의 칼 바르트의 부활관(죽은 자들의 부활 : 1924)도 해석의 준거 내지 틀로 원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제한된 지면으로 인해 세 가지 관점에서 필자는 홍정수의 부활관과 비판적으로 대화하려고 한다.

   1. 육체절 부활의 문제 : 홍정수 부활론의 가장 예리한 쟁점은 부활의 육체성(혹은 신체성)에 초점 맞추어 나타난다 우리는 그와 함께 예수의 부활사건을 “실증주의적으로 해석할”수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할”수 없다는 점을 용인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을 역사실증주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성격에나 하나님의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 이치임을 시인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신체부활을 통한 영생에 대한 신앙이 “엄청난 이기심 아집 집착의 표현”이고 기독교가 오늘도 이런 “집착적 욕망을 부채질하고”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홍정수는 “만일 예수 부활 사건이 오늘날의 우리가 소빅하게 생각하듯이 그렇게 역사적으로 육체적으로 발생했다면 그 사건은 자연현상 중의 기이한 일에 불과하며 전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님을 뜻한다.” 말하면서 예수 부활의 역사성 신체성을 부정하는 듯한 입장을 보이며 ,“우리 자신의 신체가 언젠가 되살아나리라는” 것은 집착적 욕망이며, “부활이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해 주고 내세를 보장해 주는 것”임을 부인한다. 물론 성서도 바룩 묵시록(단12:1 에녹서22 참조 )외에는 부활을 시체(생전의 형태)에로 복귀라고 하지 않으며(앞의 본문도 생전의 형태에로의 복귀하는 변화를 언급한다). 바울도 썩은 몸이 반드시 썩지 않을 것을 입는다고 말하면서 영광스러운 변모(고전15:52-53)를 기대한다. 성서는 비록 부활을 신체로 복귀하는 것을 말하진 않더라도 육체적 부활 내세의 소망을 약속한다. 이스라엘인은 순수한 육체성과 마찬가지로 육체없는 영혼을 상상할 수 없었다. 영혼이 몸에 활기를 주는 생명인 것처럼 몸은 영혼의 활동창고이다. 따라서 몸으로 살고 있는 인간만이 본래의 의미에서 인간이다.

  홍정수 교수가 육체의 부활(소생?)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육을 떠난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것도 육체소생과 마찬가지로 이교도적, 비기독교적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부활이란 인간의 유한성 시간성, 곧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무신론적 생각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전체적으로 부활하신 영화로우신 그리스도의 삶과 일치하게 됨을 뜻한다.” 이것을 홍정수교수는 “몸의 부활”이라고 표현(재해석)하지만, “이 세상에서”라는 단서를 붙이기도 하고 생물학적 죽음 이후의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서의 불멸”을 말하기도 한다. 우리가 육체의 부활(신령한 몸)을 이성적으로 표상하긴 어렵지만, 육체부활이나 영혼불멸도 아닌 영생, 사나 죽으나 하나님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는 불멸은 더욱 더 표상하기 어렵다.

 2. 객체적 부활의 문제 : 육체적 부활,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이나 영혼불멸도 아닌 하나님 안의 불멸에 관한 홍정수의 설명은 그가 과정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의 말을 인용한 것에서 아마도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재들은 주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사멸하고 객체적으로는 불멸한다.” 이로써 홍정수는 비록 하나님 안에서 영생으로 몸의 부활을 말한다고 하더라도, 주체적 불멸(부활 혹은 영생)을 간접적으로 부인한 셈이 된다. 우리는 그와 함께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며 또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육체도 죽고 영혼도 죽는다면서 인간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제 홍정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 따라 “주체적으로 보면 만물을 매 순간 죽는다. 그러나 죽는다고 하여 기존의 나가 무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의 나를 이어받은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 안에서 의존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 아니라 객으로서 남아 있게 된다. 나는 죽지만, 나를 이어받은 새로운 존재들에 의해서 나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과거의 나를 다음 순간의 내가 또는 나를 사랑하는 타자가 사랑으로 포용하는 경우 주체로서는 죽은 우리가 객체로서는 살아 있게 된다. 이것이 부활이다. 몸의 부활이다.”라고 대답한다.

  과정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불멸(① 자녀들을 통한 불멸 ②타자에의 헌신을 통한 불멸 ③하나님 안에서의 불멸) 가운데 홍정수는 특히 하나님 안에서의 영생을 강조한다. “지금의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다른 신으로 변화되어 가거나 사멸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포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불멸한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사랑하는 이, 곧 하나님과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되며 소망이 될 것이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아무도 우리가 주체로서 죽는다는 그 한 사실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주체적 불멸이 객체적 불멸로 흡수되고 주체적 불멸이 용인될 수 없다면, 가장 큰 난제는 “어떻게 주체가 하나님 앞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부활은 단지 영생으로의 관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위한 부활이다. 이 문제를 홍정수는 역사 속의 부활로 풀려고 한다.

  3.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부활의 문제 : 홍정수는 예수 부활의 육체성과 사실성에 관한 성서의 보도는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과 표현방식을 전제로 이해해 볼 때 “죽은 예수에게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며 그것으로써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역사 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으며, 나아가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의 편에 서 있는 자들(지금은 세상에서 짓누림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새 세상 도래의 희망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죽음―부활―영원한 내세라는 부활사건의 해석범주를 말씀―정의―희망이라는 해석범주로 환원시킨다. “따라서 부활사건은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판정승이 아니라 세상의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승리, 인간의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포용(용서)의 승리를 말해 주는 표징적 사건이며, 이 표징은―한국적으로 표현하여―후천개벽의 단서가 되었다.” 홍정수는 말한다.

  역사 속에서 일어난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의 심판으로서 역사적 부활의 예로서 홍정수는 광주사태를 든다.“이제 아니 이미 광주사람들은 저들의 영령들이 되살아났다고 선포하고 있다. 살해한 자들이 되살아 났고 그들이 이 세상의 심판자들이라면 이 세상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부활사건은 한국에서지금 경험될 수 있는 역사적 심판의 사건이다.

  물론 부활의 문제는 유대적으로 생각하면 신정론(神正論) 문제의 맥락에 서 있다. 그래서 예수부활의 사건도 하나님이 그의 종말론적 선고의 효력을 가진 이 행위를 통하여 그를 정당하게, 즉 그를 의인으로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지나간 것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현재적인 것에서, 즉 지나가 버린 사건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야기시켰으며 또 아직도 야기시키고 있는 역사적인 작용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부활은 의의 미래만이 아니라 생명의 미래도 드러내준다. 죽은 자의 부활기대는 죽음을 넘어서 의로움을 획득하는 약속의 하나님의 능력을 해석하는 것으로서 무에서의 창조(creatioex nihilo)와 죽은 자의 부활(resurrectio mortuorum)이라는 약속신앙의 종말론적 여백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역사 속의 심판이라는 범주의 틀 안으로 협소화될 수 없다.

 

Ⅵ. 해결되지 않은 신학적 과제

  한국교회의 영생관은 아직도 모호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홍정수의 말대로 “한국교회들이 인간의 죽음에 직면하여 선언하고 있는 신앙고백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에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영혼 불멸(희랍사상)과 부활(후기 유대교의 사상)의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신교가 다같이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에 있다. 성서는 부활표상이 없는 종말을 기대하는 몇 안되는 본문을 제외하면(사26장, 겔37장 등) 압도적으로 부활을 통한 영생을 약속한다. 그러나 찬송가의 가사 가운데(암시적인!) 부활을 통한 영생의 소망을 담고 있는 귀절이 다소 있긴 하지만, 죽은 이후의 즉각적인 화려하고 영원한 그래서 부활의 소망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듯한 영광을 노래하는 귀절들이 압도적으로 많다(221, 222, 223, 224, 226, 228, 229, 230, 231, 232장). 이 귀절들은 오늘날의 가톨릭 신학자들(K. 라너 G그레샤케 등)이 주장하는 죽음 속의 부활 죽음을 통한 즉각적인 부활사상과 유사한 것 같지만, 논리적 구조를 살펴보면, 부활이 없는 영혼불멸을 찬양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개신교의 영생관은, 찬송가에서 나타나듯이, 매우 모호하고 비성서적인 채 남아있기에 신학적으로 미해결된 과제로 던져져 있다. 이 귀절들이 타계적 구원관 역사적 책임회피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주)

1. 송복, 한국사회의 갈등구조(서울:현대문학 1991), 292 이하.
2.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논의에 관해서는 월간 사회평론창간호(1991 5)와 6월호를 보라.
3. P. F. Knitter, 변생환 역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91) 13이하, 필자는 이 논문에서 대체로 니터의 분석에 의존하려고 한다.
4. 앞의 책, 48 이하.
5. 앞의 책, 67 이하.
6. J. Moltmann, 박봉랑외 4인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서울:한국신학연구소 1980) 176.
7. P. F. Knitter 같은 책 135 이하.
8. 앞의 책, 141 이하.
9. K. Barth, K. D. IV/1, 769.
10. K. Barth, K. D. IV/3, 122 이하.
11. P. F. Knitter, 앞의 책 154 이하.
12. 앞의 책, 164 이하.
13. 앞의 책, 192 이하.
14. 앞의 책, 206 이하.
15. 앞의 책, 216 이하
16. 앞의 책, 230 이하.
17. S. M. Ogden, Gibt es nur eine wahre Religion oder mehrere? in:ZThK, 88Jg, Marz 1991, 81-100.
18. J. Mick, 이찬수 역,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서울:도서출판 창 1991) 41.
19. 앞의 책, 106 이하.
20. 앞의 책, 58 이하.
21. 앞의 책, 103 이하.
22. P. F. Knitter, 같은 책, 277 이하.
23. 앞의 책, 287 이하.
24. J. Hick, 같은 책, 31.
25. 앞의 책, 6 이하.
26. P. F. Kuitter, 같은 책, 251.
27. 앞의 책, 351 이하.
28. 앞의 책, 317 이하.
29. 앞의 책, 318.
30. U. Wilckens, 박창건 역 부활(서울:성광문화사 1985) 156 이하.
31. 홍정수 이단자를 위한 신학―베짜는 하나님(서울:조명문화사 1991) 201.
32. 앞의 책, 205.
33. 앞의 책, 201.
34. 앞의 책, 205.
35. 앞의 책, 216.
36. U. Wilkens, 같은 책, 124.
37. 홍정수, 앞의 책, 214 이하.
38. 앞의 책, 218.
39. 같은 쪽.
40. 앞의 책, 317, 338.
41. 앞의 책, 332.
42. 같은 쪽.
43. 앞의 책, 333.
44. 앞의 책, 338.
45. 앞의 책, 340.
46. 앞의 책, 203.
47. 같은 쪽.
48. 앞의 책, 196.
49. U. Wilckens, 같은 책, 113.
50. 앞의 책, 161.
51. 앞의 책, 169.
52. J. Moltmann, 전경연 박봉장 역, 희망의 신학(서울:현대사상사 1973) 275 이하.
53. 홍정수, 같은 책, 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