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와 민족희년의 과제
- 한국신학의 자본주의 이해와 통일비전-

이신건

 

들어가는 말

조선일보가 광복 50돌을 기념하여 연재한 특별기획(주제: 참된 광복은 통일이다)의 시리즈 2(민족 통일이념은 확립됐는가)의 필자 함재봉(연세대 교수)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 글에 들어가려고 한다.

이데올로기에 혼을 빼앗기며 살아온지 50년. 이데올로기 때문에 광복이 곧 민족의 분단일 수밖에 없었고 동족끼리 피를 흘리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제국주의로부터의 해방을 경축하고 있을 때 우리는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 전쟁에 휘말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살다보니 모든 것이 외국이나 다른 민족과의 경쟁보다는 동족간의 '체제경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외교도 국내 정치도 이데올로기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뛰었다.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이 지속되면서 우리는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었다. 가장 효율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고 하였다. 자유롭지 않은 민주주의도, 공정하지 않은 시장경제도 모두가 체제경쟁과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데올로기 전쟁이 끝났다. 냉전은 분명 자유-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안 실로 많은 것을 이룩하였다.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였음은 물론 전세계가 놀라고 찬사를 보내는 경제성장과 정치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냥 기뻐하거나 득의만만하고 있을 수 없었다. 냉전의 구조 속에 감추어졌던 많은 한계점들이 노출되기 시작하면서 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예전과 같은 힘으로 우리를 끌지 못하게 되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는 천민자본주의와 천민자유주의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존과 이념, 시장경제와 자유주의라는 미명 하에 어느덧 철저하고 조악한 이기주의와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남북한간에는 물론 남한사회 내부에서도 완전히 그림자를 거두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통일을 논하면서도 걱정이 앞선다. 우리는 과연 영광스러운 통일한국의 동력이 되어줄 수 있는 가치와 이념을 갖고 있는가? 물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통일한국의 이념의 큰 부분일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걸까. 통일한국은 그저 공산주의의 소멸만으로, 또는 현재의 남한식 자유자본주의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보다 원대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어야 한다.

통일한국의 이념은 무엇이어야 할까...

본인은 "냉전은 분명 자유-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로 끝났다"거나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통일한국의 이념의 큰 부분일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는 함재봉의 성급한 결론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도 않거니와, "전통문화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과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써 올바른 자유-자본주의의 이념을 실현시키자"는 그의 대안에도 흡족한 생각을 갖진 않는다. 그렇지만 본인은 왜곡된 자유-자본주의, 천민자본주의의 한계성에 대한 그의 솔직한 지적과 비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통일한국의 이념은 무엇이어야 할까?"라는 진지하고도 개방적인 그의 질문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신학적 질문의 영역 안으로 수용하여 우리의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한다.

광복 50주년을 민족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이를 통일의 해로 맞이하자는 한국교회의 간절한 소망은, 그 실현 가능성의 여부와 상관없이, 신학적-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통일을 말하기 전에 그 스스로 통일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그 바리새적 위선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분단고착화에 기여해 온 잘못된 온갖 죄 특히 '이데올로기적 죄'(K. Barth: 기만과 저주)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진정한 복음이 아닌 미국의 냉전 이데올로기의 선교와 세례를 받아 전투적 반공주의의 최전선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영향권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정통-보수신학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총신대의 교수 박아론은 지금도 다음과 같이 의기양양하게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적 복음으로 전도하고 있다.

...더욱이 요사이에는 우리 한국교회 내에서 중남미에서 생겨나서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해방신학의 한국판'이라고 볼 수 있는 소위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아서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죄악시하고 사유재산 자체의 폐지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런데 특별히 필자가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은 정통개혁신앙과 신앙을 표방하는 우리 교회와 신학교 주변에 자본주의 경제제도 즉, 자유시장경제제도가 세계적으로 또는 한국에서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를 유발하며 전자에 의한 후자에 대한 경제적 착취라는 '사회학'을 빚어내는 것으로 인식하고 정죄하는 의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자유시장경제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의 폐기를 전제로 하는 국가통제경제에 입각하는 소위 기독교 사회주의의 실현에 대한 신념이 바로 그것이다. 기독교 사회주의 또는 별칭 '종교사회주의'의 목소리는 이득의 추구와 물질주의적 탐욕과 개인적 이기주의 등을 유발하는 자본주의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고, 사회주의는 애타주의와 공동체의식과 같은 기독교적 가치관을 장려하기 때문에 옳고 좋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 이득의 추구와 사유재산의 부당성을 가르치는 교훈들이 있는가?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이 자본주의 특히, 자유시장경제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가르친다고 본다(마 25:14-30; 눅 19:11-27)

Wilhelm Röpke의 말과 같이 "자본주의는 인간의 경제적 자유를 수호하는" 까닭에 인간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이고 정신적인 자유의 확보에 기여한다. 자본주의는 '자유로운 가치교환제도'로서의 개인의 인격과 재능과 노력에 대한 집단주의적 침해를 방지하게 때문에 도덕적이다. 자유시장경제와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것으로서의 사유재산제도는 인류에게 근면과 저축과 기업심(기업을 일으키고 가꾸어 나가는 마음)을 가르치기 때문에 도덕적이다. 또 한편, 현실적인 고찰을 하더라도 오늘날 급진정치신학(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의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유시장경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격(인류의 특정가치들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에 대한 정보가 존재할 수 없으므로 사회주의도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자유시장 경제에 토대하는 자본주의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적 경제관이요, 기독교 사회주의 또는 종교사회주의는 진리인 듯 보이면서도 실상은 비진리요, 오늘날의 인류의 빈곤문제를 해결 못할 뿐 아니라 모든 인류로 하여금 경제적으로 번영할 수 있는 길로 결코 인도할 수 없는 한낱 '이론적인 허구'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민중신학과 종교사회주의가 사유재산의 폐지와 국가통제경제를 주장한다고 생각하는 그의 몰이해도 황당하거니와, 자본주의의 부도덕성과 폐해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성경의 이름으로 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찬양하는 그의 논지도 참으로 편협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견해가 단순히 그 자신만이 아니라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더 심각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위와 같은 편협한 이데올로기가 한국교회를 지금껏 지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신학이 '자본주의'를 그 자신의 신학적 반성의 자료로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한국신학이 연구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이데올로기는 압도적으로 '공산주의'라는 사실은 신학문헌들을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쉽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의 발전 안에 있는 교회와 신학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가 교회선포와 신학사고의 '콘텍스트'(Context)로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더욱이 통일을 바라는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어떻게 이 자본주의를 신학적-정치적(즉 정치신학적)으로 이해하고 그 현실의 한계점을 돌파하여 진정하고 복음적인 민족 공동체를 형성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는 예언자적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솔직히 자인해야 한다.

그러한 중에서도 최근의 한국신학이 자본주의를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특히 민중신학과 통일신학이 아직은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자본주의'를 심각하게 반성하고 있음은 다소 안위감을 주며 시사하는 면이 크다고 하겠다. 가난한 민중에 대한 관심을 그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민중신학의 한 대변자인 서남동에게서 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관심은 거의 나타나진 않지만, 최소한 그 단초가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남동은 일본의 니시가와(西川潤) 교수의 논문(貧困 : 21세기의 지구,1983)으로부터 빈곤을 세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을 받아들이면서(첫째는 '고전적 빈곤'으로서 도시의 빈민굴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사회현상이고, 둘째는 '새로운 가난'(도시빈민굴 현상)으로서 부자 지역이나 사회계층과 상관없이 우연히 생긴 현상이며, 셋째는 '주변적 빈곤'으로서 주변적, 종속적 자본주의가 그 존속,유지를 위해서 창출해낸 현상이다.), 특히 셋째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주변적 빈곤'은 종속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의 경제적,사회적 메카니즘의 과정이며 그 구조적 요인이다. 빈곤 없이는 부유가 생기지 아니하고 부유 없이는 빈곤이 발생하지 아니 한다. 부는 종속적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의 앞면이요, 빈곤은 그 뒷면이다. 다시 말하자면, 부는 빼앗음이요 빈곤은 빼앗김이다. 그러므로 부는 곧 권력이요 빈은 박탈당함, 억압당함이다... 오늘 날 제 3 세계 도시들의 구성적 요인인 '주변적 빈곤'은 단순히 발전의 지체가 아니다. 종속적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서 더욱 더 확산,확대일로를 치닫는 것이다.

여기서 서남동은 자본주의에 대한 신학적-본질적 탐구보다는 그 기능의 분석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런 후에 그는 빈민의 복음을 선언한다. 그는 '오로지 눌림을 당하는 가난한 자만 무조건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편드는 하느님'(K. Barth), '가난한 자의 변호자로서의 하느님'(G. Caselis), '가난한 사람의 하느님 -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는 하느님 - 가난한 사람을 위한 하느님'(A. Pierris S.J)을 고백하는 신학적 선언을 발표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관심은 민중신학자 안병무와 여성-통일신학자 박순경 등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본인은 지면의 한계상 이 두 사람만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최근의 한국신학의 입장을 정리해 보고, 이 두 사람을 비롯하여 한국신학계에서 통일민족의 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 신학자 두 사람(김용복, 김영한)의 입장을 검토하려고 한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한국신학의 결실들을 칼 바르트의 신학과 비교하려고 한다.

1. 안병무의 자본주의 이해

안병무는 신약성서학자이기 때문에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 그 자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주로 성서주석의 양식을 빌려서 물(物)과 물질주의(物質主義)의 본질을 고찰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한 특정한 이해와 비판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주목해야 할 점은 한국교회의 성장이 주로 물질적 기복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줄곧 지적해 온 비판적 신학의 풍토 속에서도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일차적으로 물질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와 먹는 것을 이상스러울 정도로 밀착시키고 있다... 사실상 예수는 그 나라의 현실을 더불어 먹는 잔치로서 표상한 경우가 많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당시의 민중과 더불어 먹고 마신 장면이 여러 곳 나오며, 예수 자신도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 11,19)라는 세평을 받고 있었는데, 이것은 단순히 가난한 자와의 친교라는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실천하는 행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 나라의 도래를 앞당겨 축하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나라의 내용을 현실화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느님 나라와 먹는 것을 직결시킨 또 하나의 구체적 사실은 예수의 기도의 내용에서 제시된다.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달라는 기원이 직결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루가 11,3 병행) 전체의 뜻으로 보아 예수의 기원은 그 나라의 임함으로 일용할 양식을 먹게 하소서라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는 예수의 말 즉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가 6,20)는 말의 뜻을 고쳐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도래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의 것이라는 혁명적 선언이다... 하느님 나라를 物과 유리시키면 그것은 오늘의 현실과 겉도는 추상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나 그 나라가 物과 직결된 사실을 인정하면 그 나라의 도래는 글자 그대로 혁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 나라 건설의 物性은 예수의 또 하나의 행태에서 구체화된다. 그것은 예수가 병을 고친 사실에서 본다... 예수의 치유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것이 하느님 나라 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육체(물)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물질을 천시하거나 멸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야 한다. 여기서 물질-영혼의 이원론은 바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리스도인도 이원론적으로 물질과 영혼을 나누어 물질을 멸시한다. 가장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 물질을 천시한다. 대지와 자연이란 하느님의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을 공동의 노동을 통해 가꾸고, 그 생산물을 나누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물을 존중한다는 것은 가장 정신적인 말이며, 곧 노동을 신성시하고 노동을 통한 인간의 연대 추구를 귀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물질은 인류가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하느님 나라 건설에 이바지하는 데 쓰여야 한다.

물론 물(物) 혹은 물질(物質)에 대한 안병무의 적극적인 신학적 평가가 물질의 오용을 간과할 정도로 소박한 것은 아니다. 그에 의하면 "物은 그 자체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그 성격이 결정된다. 物은 인간의 노동과 더불어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을 생산하며 새로운 세계를 개척한다. 物은 인간의 노동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현하며 인간은 物로써 자기를 구현한다." 그러므로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인 실체로서의 물(物)은 올바른 인간관계 속에서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직결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릇된 인간관계 속에서 오용됨으로써 타락의 표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안병무는 물질오용의 표본을 성서에서 끄집어낸다.

예수의 이야기 중에는 가난한 자와 부자의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물질오용에 의해 파생된 표본적 구조악이다.

한 부자가 풍년을 만나 더욱 부자가 되었다(루가 12,16 이하)... 이 사람은 풍요한 물질을 앞에 두고 그것을 완전히 독점하여 자기의 삶의 안전을 보장하려고 한다. 그는 부자로서 이미 있던 창고를 헐고 새 창고를 지어야 할만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소유했지만, 그 곡식들은 소작인들이나 종들에 의해 생산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 물질은 착취한 것이다...그 물질이 정말 그의 것인가? 그가 독점해도 되는 것인가? 물질은 자기의 개인 생활을 보장하는 도구 이상 아무 것도 아닌가? 이러한 자세를 갖는 경우, 이 물질은 그를 부패하게 하며 그것은 동시에 남을 괴롭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둔다는 것은 하느님에 대해서 가난하다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의 부자 이야기가 있다(루가 16,19-31). 그의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는 19절로 짐작할 수 있다... 그에게는 어떤 사람도 안중에 두지 않는 철저한 자기중심적 인상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그는 물질을 오용했다. 그는 物의 본질을 무시했다. 物은 결코 독점하라는 것이 아니다... 처참한 이웃을 곁에 두고도 독점한 物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기 향락만을 위해 낭비하는 그것 자체가 그의 죄인 것이다. 그의 삶의 양식이 그가 소유한 물질을 악한 것으로 만들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와서 영생의 길을 물었다(마르 10,17-22병행).. 그 청년은 슬픈 표정으로 근심하여 떠났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22절)... 예수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物에 의한 구체적인 행위이다. 부자청년은 物을 뺀 어떤 일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러한 그는 예수의 요구를 통해 자기의 삶의 허구성이 폭로되는데도 거기서 탈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그가 이미 물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 있어야만 하는 물질을 너(이웃)를 위해 바칠 수 없다면, 그는 물질의 노예인 것이다. 위와 같은 이유로 그가 찾는 영생의 길이 막힌 것이다. 영원한 삶의 길은 물질과 뗄 수 없는 함수관계에 있다(마르 10,29-30병행).

물질독점으로 인한 물질오용과 물질의 노예화를 경고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병무는 물질지상주의, 물신숭배에 빠진 물질의 반신적(反神的) 속성도 분명하고 신랄하게 지적하기에 이른다.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다. 그러면 예수 운동은 물질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냐 하는 것이다.

예수의 민중들은 가난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지상주의에 빠져 물질의 노예가 될 위험성도 갖고 있었다. 예수가 시험받은 이야기(마태 4,1 이하 병행)는 이런 정황에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사탄은 사십일을 금식함으로써 배고픈 예수에게 광야의 돌들로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한다. 배고픈 자가 피할 수 없는 요구를 잘 포착한 것이다. 떡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인가? 이에 대해서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응수한다. 이 말은 일단 물질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이 빠져들 수 있는 물질에 대한 유혹을 계속 경고하고 있다. 물질은 인간의 삶을 창조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데 불가결의 요소이지만, 그것 자체가 섬김의 대상이 될 위험성이 있다. 물질은 삶을 위해 있는 것인데 거꾸로 삶이 물질을 위해 있게 되면, 그것이 바로 反神的인 현실로 된다. 그런 뜻에서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Q).

物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보다 앞서서 물질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이 사람의 의무이다. Q자료(마태 6,24; 루가 16,13)에는 가난한 자가 범하기 쉬운 물질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옷보다 중하다는 것이다...먹고 입는 것은 인간의 삶에 절대불가결한 것이나 그런 것을 위해 염려해서는 안된다. 까닭은 그럼으로써 물질의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물론 노동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의 추구보다 먼저 앞서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그 물질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여져야 할 것인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마태 6,33)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을 갖고 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물질에 결코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물질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에서 이해된다. 단적으로 말하면 사람이 물질의 주인이어야지 물질이 사람의 주인이어서는 안 되며, 사람은 물질의 본래성의 회복 즉 정의를 구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병무에게서 '자본주의'는 탐욕스럽게 물을 팔아 돈을 버는 유물주의이다. 이 사회는 실체가 무시되고 명목상의 허영적인 돈이 모든 가치를 좌우하는 사회이며, 대지에서 멀어지고 뿌리뽑힐수록 노동과 생산물에 대한 간접적인 관계를 갖게 되고 소비와 향락만이 강조되는 사회이다. 그리고 '물질주의'는 가장 탐욕스럽게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물질을 혐오하는 체하며 남에게 물질을 경시하도록 하면서 물질을 독점하려는 이데올로기이며, '유물론'이란 물질의 독점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유심론(관념론)에 대한 상대개념이요 대안이다. 그러므로 물질의 공유와 정의로운 분배는 물질주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안병무도 부자를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게 된다.

'부자'란 쓰고 먹는 것이 남아도는 사람이다. 또 남은 것이 하나의 자본이 된다. 그는 자기 힘 외에 '자본'이라는 힘을 빌려 이웃 위에 군림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도 된다. 그 자본에 남을 예속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도 예속된다. 자본으로 자기 힘을 확대하려던 것이 자본에게 예속됨으로써 비인간화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부자들을 그렇게 비판하고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주라고 했을 것이다.

물질의 오용(독점과 착취), 물질주의-자본주의-유물주의 그리고 물신주의와 물질의 반신적 성격 등에 대한 안병무의 지적은 타락기사의 독창적 해석을 통하여 더욱 더 체계적(조직-신학적) 특성을 부여받게 되고, 따라서 물에 대한 이해와 마찬가지로 물질주의에 대한 비판도 단순히 정치-경제적 기능만을 갖는 게 아니고 그 신학적인 뿌리에까지 닿게 된다.

모두가 더불어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사유화해서는 안 되는 것이 '공' 또는 공적인 것이다. 가령 하늘은 공이다. 하늘을 어느 누구도 사유화할 수 없다. 땅도 본래는 공이다. 그것을 경작하고 그 소산을 나누어 먹을 수는 있으나 사유화할 수는 없다. 하느님도 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있으나 어느 누구에게 소유될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떤 이유에서 아담(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어야 했는가? 이것이 바로 공이 침범당함으로 시작된 것이다...

물(物)도 공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권력을 사유한 자들에 의해 찢겨진 것이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도 바로 이 공을 지킨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종교마저도 사유화로 줄달음침으로써 점점 분화되어가고만 있다. 그래서 교회도 개교회화, 즉 사물화되어간다. 이것이 타락의 과정이다....

...공을 사유화하는 것이 바로 죄이며, 이같은 죄인은 더 이상 낙원을 향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과 이브는 낙원에서 추방되었다.

2. 박순경의 자본주의 이해

주석의 양식을 빌려 물(物)과 물질-자본주의를 해석하는 성서학자 안병무와는 달리 조직신학자 박순경은 주로 정치신학적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있다. 특히 민족과 통일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때, 그는 자주 복음이 자본주의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는 점, 기독교선교가 서양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대세 속에서 잘못 이루어져 왔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기독교 선교는 잘되었든 잘못되었든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결코 자본주의, 식민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는, 또 민족주의운동을 초월하는 복음 혹은 하나님의 구원을 주제로서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기독교 선교는 19 세기의 자본주의,식민주의의 세계팽창의 대세를 따라 동양 혹은 한국에 들어왔으며, 선교사들을 알게 모르게,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서양의 그러한 팽창주의에 협조했다. 그들이 청교도적인 보수주의자들이었건 어쨌건 19 세기의 서양 자본주의, 자유주의 문화를 대변했고, 피선교자에 관한 정보들을 서양 자본가들에게 제공했으며, 그럼으로써 서양의 동양지배의 길을 평탄하게 했다. 한국기독교는, 카톨릭이든 개신교든, 처음부터 그러한 서양의 자본주의, 자유주의의 문화의 배경과 기반에서 성립되었고 성장해 왔으며, 따라서 서양문화에의 예속의 길을 걸어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본래부터 지배자 서양의 소유물이 아니라, 가난한 자,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하나님의 영(靈)의 능력이다... 서양기독교 선교에 의해 전해진 복음이란 처음부터 서기(西器)의 정신, 즉 지배자 서양의 정신으로 잘못 전해졌고 잘못 수용되었다. 서양의 정신이란 곧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임을 구별할 수 없이, 따라서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해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한국 기독교는 인식하지 못했고 아직도 대체로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 기독교는 소위 자유서방에 밀착해서 민족분단을 지탱시켜온 분단이데올로기를 복음의 진리라고 잘못 생각한다...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결코 서기의 정신, 지배자의 정신이 아니요, 오히려 이것을 의로운 심판대 앞에 세우기 때문에, 바로 눌린 자를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한국분단의 일정한 책임도 서양자본주의 지배세력과 이에 편승한 기독교에게 돌려진다.

민족분단의 요인들이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이 분단을 넘어서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즉 민족분단의 요인들은 첫째로 일본을 비롯한 서양 제국주의, 자본주의 지배세력에 의해 비롯되었으며, 둘째로 미,소의 분단상황의 일환이며, 세째로 기독교의 편당에 의해서 정신적으로 밑받침되어왔다.

그래서 박순경에게서 바로 자본주의의 극복과 이로부터의 해방은 북한의 무신론의 극복과 함께 기독교의 중요한 과제로 여겨진다.

...북한의 무신론은 극복되어야 하지만, 자본주의의 물신상(物神像)이라는 우상 또한 극복되어야 한다. 남한의 기독교가 서양문화와 자본주의 정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북한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북한의 반기독교적 무신론을 극복하게 될 것이다. 남한에서는 서양 자본주의문명에 복음의 초월성이 매몰되어 왔고, 북한에서는 복음의 초월성이 권력구조에 예속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도 역시 안병무와 같이 기독교 신앙의 영성이 몸적, 물적 현실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는 점,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바로 몸과 물질구조의 성취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힘주어 재삼 강조한다. 그리함으로써 그도 역시 영혼과 물질의 잘못된 이원론에 빠진 잘못된 기독교적 영성을 비판하며, 공산주의 혹은 마르크스주의가 바로 기독교적 영성의 물질적 특성을 상기시켜 주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공헌도 일정하게 긍정적으로 수용,평가한다.

복음은 공산당을 초월하며, 이것과 동일화될 수 없다. 그러나 평등한 인류와 자유의 왕국에 대한 공산주의적 비전은 성서적 종말론의 형으로서, 어쩌면 쌍동이로서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 비전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향해 박두해가기 위한 이념적 도구이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신앙의 영성(靈性)의 몸적, 물질적 현실의 문제를 일깨워주고 변혁하게 하는 이념적 도구이기도 하다. 20 세기 기독교인간학은 영과 육의 통일성을 성서적 근거에서 역설하지만, 기독교는 신앙의 영성에 집중한다면 몸에 속하는 물질구조문제는, 정치, 사회, 경제는 과학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밖에 없다. 주목할 것은 몸과 물질구조의 성취에 관한 종말론적 비전으로 이것은 종말론적 구원신앙에 상응하며, 사상사에 있어서 그것은 성서적 종말론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와 신학의 전통은, 거기에 예외적 사례들이 있으나, 대체로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불의와 죄악, 억압과 착취와 무관하게 기독교적 영성 혹은 신앙을 추구해 왔다... 교회적 영성은 육체, 물질의 질서, 자연물질의 세계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침묵한 채로 애매하게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에 안주해 왔다. 이 때문에 교회적 영성은 분단된 세계들의 화해를 매개하는 영성의 새로운 세계성을 증언하지 못한다...

기독교 전통에 내포된 추상적인 영성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무신론에서 수행되었다. 그러한 비판은 기독교로 하여금 물질세계의 영적인 신학적 의미를 새롭게 각성시켜 주는 계기로서 우선 긍정되어야 한다.

공산권에서 정식화된 무신론, 유물론은 신학적으로 상당히 비판되어야 할지라도, 그 본래적 의미를 포착하지 않고는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 신앙의 영성을 추상적으로 말하는 데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 영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일 뿐만 아니라 창조자로서 물질세계의 영이기도 하며, 신앙의 영성은 그를 증언함으로써 동시에 인간적 육체의 영성, 자연물질과 경제질서의 주체성이기도 하다. 영성과 물질의 참된 통일성이 성취되는 날, 무신론은 무신론이길 중단할 것이며, 유물론의 역사적 기능이 성취될 것이다. 신학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유(唯)자를 탈락시키고 물질론(物質論)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좋다.

하나님의 말씀의 수육(受肉)으로서의 인간 예수와 그의 부활의 몸은 인간 일반의 육체적 삶과 자연물질의 차원의 영원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구원의 날, 마지막 날에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영(행 2장)은 새로운 육체, 물질, 피조성을 창출하는 영이다.

부활의 영, 부활의 몸은 잘못된 물질세계의 변혁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종말적인 새 하늘, 새 땅, 새 인간의 성취와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인 피안의 유령이 아니라 물질세계의 변혁의 목표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요, 물질세계의 변혁은 아래부터의 운동이다... 인간의 물욕과 물신상, 지배욕과 착취, 침략과 소유...와 같은 것이 그러한 변혁의 과정에서 불살라지고 새 인간, 새 하늘, 새 땅이 탄생하는 그 날이 곧 영의 종말적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주기도문은 새 땅의 질서, 즉 자연물질, 육체의 경제적 삶 전체의 새 질서, 그의 자유와 의와 사랑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복음선포는 마르크스주의적 물질, 역사변혁론을 성서적 근거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그 무신론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지 않은가. 교회가 물질구조에서의 하나님의 정의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이 정의를 증거한다는 말인가? 불의한 물질구조의 변혁의 실천없이 우리는 하나님 나라, 새 인간에로 행진할 수 없다.

3. 자본주의를 넘어서 통일로 가는 길

아쉽지만 지면의 한계상 우리는 안병무와 박순경 두 사람만의 자본주의 이해와 그 비판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본질적으로 중요하게 제기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서양 자본주의의 굴레와 예속 안에서 왜곡된 삶을 살면서 고통당하는 남한을 해방시키고 분단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하는 통일이념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한국교회는 진정한 복음적인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 부분에서 본인은 앞의 두 사람 외에도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청종하여 함께 정리하고자 한다.

민중신학자인 안병무는 공(公)의 이념을 통하여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하려고 한다. 공(共) 혹은 공산(共産)의 개념보다 이 공(公)의 개념을 선택함으로써, 아마도 그는 반공주의에 젖은 일반인의 거부감을 완화하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여하튼 그는 물질의 독점과 착취, 억압의 폐해를 낳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행동방식으로서 나눔 즉 물질의 공유화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 '나눔'의 과정에서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봐야 합니다. 루가는 하느님 나라가 실제로 무엇인가? 그것은 공(公)을 공(公)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유화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해요. 정치나 경제나 모든 것을 다 포함해서 사유화함으로써 분열되고 찢긴 그것을 다시 공으로 돌리는 일은 하느님 나라 성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거예요... '공을 공으로 돌려라'라는 말은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로 돌리라는 말인데, 이것은 결국 민중의 언어로 바꾸면 다 빼앗긴 사람들, 밭 한 뙈기 없이 거덜난 사람들에게 자기 것을 되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 농민에게 그 생산한 몫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이에요. 이렇게 잃어버린 제 것을 도로 찾는 운동만큼 하느님 나라를 의식할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란 '공은 공으로', 곧 사유했던 것을 다시 참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안병무의 이 공(公)의 이념이 분명히 집산주의적-국가사회주의적인 공산주의의 이념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더 구체적으로 이 공(公)의 사상은 현존하는 경제이념들 중에서 어느 것에 더 적합한 것인가? 그는 이것을 단지 '제 3의 체제'라고 말할 뿐, 더 이상 구체적인 설명을 하진 않는다.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은 그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겠지만, 여기서 그는 성서학자답게, 아니 신학자답게 단순히 추상적인 이상을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물론 자본주의 체제도 맞지 않고, 공산주의 체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3의 체제가 이룩되어야 한다. 그것은 경제와 권력이 평등하게 최대한으로 잘 분배되는 사회체제일 것이다. 지금은 그 이상을 말할 수는 없다.

여성신학-통일신학자인 박순경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에 대한 신앙에 근거해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편을 다 초월하여 궁극적인 화해로 나아가는 길을 '제 3의 길'이라고 부른다.

제 3 세계, 피억압민족들은 제 3의 길을 개척하는 역사적 주체세력의 되어야 한다...제 3의 길은 민족통일의 방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적 차원에 직결된다. 그것은 신학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나라에 대한 신앙이 주어져 있는 체제의 이데올로기로 둔갑해서는 안되는 자유, 즉 이것을 넘어서는 역사의 자유를 의미한다. 반공은 역사에 대한 자유가 아니라, 적대하고 있는 양편을 넘어서지 못하고 결국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자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물론 하나님 나라와 신앙은 사회주의도 아니다. 사회주의는 주어진 역사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으나, 그것에 의해서 역사의 궁극적 구원이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제 3의 길로서의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은 한국 민족과 제 3 세계의 중립의 길 이상이며, 역사의 종말적 구원을 의미한다. 그러한 종말적인 제 3의 길은 궁극적으로 화해의 길이다... 남북한의 화해의 길은 민족적 동질성에 기초하되, 그러나 민족 내에서의 사회평등 없이 성취되지 못한다... 그의 나라의 도래와 성취에 대한 신앙은 세계로 하여금 주어진 체제에 있어서의 기득권에 고착하지 못하게 하는, 즉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다. 그 신앙은 역사를 변혁하는 실천의 능력, 즉 주어진 세계를 초월하여 새 역사를 창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리라.

...그것(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주어진 세계체제들에 있어서 자유서방이라는 한편에 자체를 일치시키고 다른 한편을 배제하는 이데올로기일 수 없으니, 그렇게 될 때에는 복음의 빛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 즉 분단된 세계 양진영들의 갈등, 대립을 넘어서는 자유, 종말적인 구원에로 역사를 지향하게 하는 증언의 자유는 상실된다...

...종말적인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역사 내에서의 분단된 세계의 양편을 다 초월하며, 이 때문에 분단을 넘어서는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궁극적인 화해의 가능성이며, 교회로 하여금 남과 북 사이에, 제 3의 위치에 서게 하는 가능성이다. 궁극적인 화해는 인류공동체의 성취를 의미하며, 양편에 주어져 있는 문제들을 끝까지 변혁해나가게 하는 역사의 역동적인 동력이다.

박순경의 '제 3의 길'의 이념은 그 자신의 말대로 가로디(Roger Garaudy)의 '제 3의 사회'의 이념에서 따온 것이다.

...남북의 정치적인 협상이 열린다면, 기독교는 제 3의 입장에서 거기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제 3의 입장에 서야 한다는 것은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와 사상의 경직성이 정치적 협상이나 흥정에 의하여 좀처럼 또 근원적으로 풀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자본주의적 세계의 병폐가 자본주의적 구미와 아시아 혹은 제 3 세계에서 크게 비판되어 왔으며, 한국민족의 분단을 극복하는 길이 어떤 제 3의 길이 아니고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의 종말론적 신앙은 어느 주어진 체제에 안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화시킨다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로디의 '제 3의 사회'라는 개념이 무엇인가를 암시해 준다.

박순경이 말하는 '제 3의 길'은 남북의 한 체제에 의한 다른 체제의 흡수통일이 아닌 제 3의 새로운 민족 국가 사회의 건설을 지시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민주사회주의'나 '사회민주주의'라는 서구의 용어로 말하지 않고, 그 구체적인 미래상을 어디까지나 민족의 자유와 재량에 맡기고 있다.

남한에로의 북한의 흡수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근,현대의 민족, 민중의 유혈사 희생제단을 무효화시키는 일이며, 미, 일과 같은 자본주의 열강들과 민족독점자본가들의 지배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민족잠재력을 상실하는 일이다. 자본주의 발달은 어디까지 이를 것인지 예상할 수 없으나 인류평등을 위해 자체의 견제세력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북한에로의 남한 흡수통일은 가능한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현재의 세계상황이다. 사실상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남북 7,4 남북공동성명은 민족동질성이라는 근거에서 어느 한편의 흡수통일을 배제하는 공존의 길, 자본주의, 사회주의 체제들의 협동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어떻게 양 체제들이 협동하여 제 3의 새로운 민족 국가 사회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과제는 민족의 슬기와 창의력에 달려 있다.

민중신학자인 김용복도 역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다같이 기독교적인 경제질서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에 동의한다.

자본주의 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는 이론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제3세계 민중의 기본적인 인간적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민중을 너무도 착취하고 억압해 왔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 경제질서는 불의와 불안정의 정도가 심해져 이제는 그 극에 달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정의 개념은 시장에서 이익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을 통해 균형을 이룬다는 논리에도 불구하고 결함을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의 정의 개념은 독재적 통치 아래서 자유를 희생할 것을 강요해 왔다. 이 두 사회-경제적 체제는 모두 일정하게 수정된 것이기는 하나, 세계 민중이 요구하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는 너무나 불충분한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그 어느 것도 "기독교적 경제질서"로 간주할 수 없다.

...역사적 위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렇지만 김용복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적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제 3의 길' 혹은 '제 3의 체제' 등을 제시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주권이 관철되는 정치경제학 즉 '하나님의 정치경제'를 제시한다.

...하나님의 주권의 정치경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오늘날의 경제 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 데 기준이 되어야 할 토대여야 하고, 실제로 그러한 토대일 수 있다...하나님이 재산의 주님이라는 개념은 재산이 전체 공동체의 안전의 근거로 정의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계약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재산과 그것에 관한 정의가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재산 개념은 정치적 경제적 권력자들의 탐욕을 정당화해 주고, 그럼으로써 민중의 충만하고 온전한 삶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재산의 주님이라는 개념은 사회주의와 저를 막론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일체의 독단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재산개념에 도전한다.

김용복은 민중신학자로서 하나님의 주권의 경제학을 '민중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민중 경제학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민중의 생활을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 민중의 복지는 하나님의 정의에 근거를 두고 있고 하나님의 샬롬 안에서 성취된다. 그들의 신체적 사회경제적 안전은 그들의 총체적 복지의 핵심적 차원이다."

개혁신학자로서 그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고 있는 김영한의 입장을 들어보기로 하자.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초이데올로기적 혹은 탈이데올로기적 성격규정에 근거하여 양극화된 이데올로기를 '제 3의 길' 안에서 초극하려고 한다.

한국기독교는 양극화된 이데올로기로 분단된 민족을 향하여 이데올로기를 초극하는 제3의 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제3의 길이란 결단코 중립적 이데올로기의 길이 아니다. 제3의 길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역사의 종말론적 구원이다. 복음은 주어진 세계의 지배구조를 극복하며 피지배 민족의 실제적인 해방을 성취한다. 복음은 주어진 체제에 대한 기득권을 포기하도록 하며, 체제에 의한 지배구조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양극화된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와 지배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적 심판이요,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적 구속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초이데올로기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서양 자본주의 문화의 담보물이 아니고,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의 담보물도 아니다. 복음의 정신에 입각한 기독교 신앙은 따라서 결단코 주어진 정치체제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다. 복음정신에 입각한 기독교신앙은 자본주의를 향하여 부의 사회적 평등화를 역설하고, 사회주의를 향하여 권력구조의 민주화와 인권의 천부적 존엄성을 설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국민족의 분단의 아픔에 같이 하시는 하나님은 그의 계시된 성경 말씀을 통해서 양체제 이데올로기를 심판하시고, 양체제 이데올로기를 상대화시키시며 진정한 통일의 이념을 제시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북한의 주체사상- 김일성 한 개인을 우상화하고 있으며, 한 인간을 신격화시킴으로써 사이비 종교로 전락하고 있는- 을 심판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외면적으로는 민주와 정의와 자유를 표방하나 물량의 확대를 신격화시키고 있으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소외계층들을 민주, 자유, 정의의 향유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남한의 이데올로기를 심판하신다... 남한의 물량주의적 세속주의 사상은 인격신 대신에 세속주의적 과학기술과 이 기술을 개발하는 인간성을 신앙하고 있으며, 진리와 가치의 상대주의와 다양주의 속에서 물질의 풍요성이 인간을 지배함으로써 세속주의적 인간을 만들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물질의 신격화가 아닌 물질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을 위해 종속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이 대립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심판하고 지양(止揚)시키는 제3의 길이다.

그러면 일방적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초극하는 탈이데올로기의 방향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김영한은 인간의 존엄성, 상호의존과 이해, 자유화, 평등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는 1. 인간화, 2. 사회적 복지화 그리고 3. 민주화 안에서 그 방향을 본다.

인간화 이념은 인간개인이 자유와 인권이 최대한으로 존중되고, 개인의 창의성과 노동의 효과를 최대한으로 보장받으며, 양심에 따라서 의사를 개진하고 행동하며 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는 사상을 말한다. 인간화이념은 개인의 능력과 창의성을 최대한으로 인정하는 자본주의의 강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물신화(物神化)에 의해 인간존엄성을 억누르는 자본주의의 취약점과 국가권력이나 당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인간의 양심적 자유와 사유와 행동을 억누르는 공산주의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다.

사회적 복지화 이념은 가진 자가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빈한 자가 더욱더 가난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있으며, 개인의 비대화보다는 사회적으로 부(富)의 정의롭고 평등한 배분을 중요시하는 공산주의의 강점을 취하고 있다.

민주화 이념이란 비인간화와 사회적 가난을 야기시키는 좌익이나 우익의 권위체제나 전체주의체제를 거부하고, 소수에 의한 통치가 아닌 국민다수의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제도를 말한다.

그런데 김영한에 의하면 이러한 이념의 실현은 바로 자본주의가 자유방임의 원리를 부단히 수정시키고 공동체 정신을 함양시켜야만 가능해진다. 이로써 그는 구체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이상적인 기독교적 경제질서의 대안으로 제시한 셈이다.

... 그러면 자본주의는 과연 승리하였는가?... 그러나 아직도 자본주의가 종국적으로 승리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는 하나 그 본산지인 미국경제는 날로 침체하고 있다. 그 이유는 생산하는 것보다 소비하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점, 불평등, 부정 등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실험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수정시켜 왔다.

동구에서의 민주화와 개방화 바람이란 결단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이고, 사회주의의 패배이다... 자본주의는 이 자유의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동시에 평등의 정신을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무책임한 자본주의는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모래와 같이 원자화(原子化), 군중화(群衆化)되어 공동체에 대한 기여와 책임은 뒷전에 놓고 무절제한 요구와 자기 권리만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결국 자유방임 자본주의에서의 사회는 분열되고 공동체는 파괴될 수밖에 없다.

역사의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이 자유방임의 원리를 부단히 수정시켰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직도 자본주의 내에서는 심각한 소득 불균형, 불평등, 권위주의와 관료적 부정부패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공동체(共同體) 정신을 함양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무책임한 민중적 자유가 아닌 성숙한 시민자유가 될 수 있다. 또한 자유의 원리가 독과점의 자유, 정경유착의 자유, 과소비의 자유, 소수 가진 자들의 자유, 기득권 계층의 자유가 아닌, 경쟁의 자유, 기회균등의 자유, 분배정의의 자유, 모든 사회구성원의 자유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가 추구하는 평등과 정의의 이념을 공동체 정신의 함양 속에서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민주주의로 발전될 수 있어야 한다.

나가는 말

자본주의를 이해,비판하며 이를 극복하여 통일의 비전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앞의 신학자들의 글을 모두 다 면밀히 훑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들의 결론은 대체로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닌, 이 양자의 장점을 수용하고 그 단점을 극복하는 '제 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이 제 3의 길을 표현하고 담는 이념의 색채는 조금 다양하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비록 그러한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실천방안도 제 각기 상이하다고 하더라도,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한국신학의 비전은, 현존하는 정치-경제체제의 이념과 비교하면, 사회민주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넓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20세기의 위대한 교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행동한 정치신학자였던 칼 바르트(K. Barth)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이해와 그 비판 그리고 이를 변혁하는 신학과 교회의 과제에만 국한해서 말한다면, 본인은 "과연 한국신학자들의 이러한 사상들이 바르트의 사상에 비하여 얼마나 새롭고 진보한 것이며 또 구체적인가?" 묻고 싶다. 한국신학은 바르트의 신학의 정치신학적 측면을 너무나 소홀히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과소평가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에 대하여 무지하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안병무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민중을 만나면서 민중신학이 체험한 것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시각의 전도입니다. 모든 사물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보는 도식에 철저했던 재래 신학적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물을 아래로부터 보게 되었습니다. 곧 '신으로부터 인간을'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신을' '인간에서부터 민중'이 아니라 '민중에서부터 인간', '계시도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아래, 수난의 현장에서 온다' 등등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칼 바르트(K. Barth)를 중심으로 한 위기신학 등등에서 본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나는 서구 신학이 역사현실을 무시하기만 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이른바 '변증신학'은 역사적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르트(K. Barth)는 목사로서 한 손에 신문을 들고 또 한 손에 성서를 든 고충을 반영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바르트의 손에서 신문은 사라지고 도그마만 남았습니다.

바르트가 자펜빌(Safenwil)의 노동자 앞에서 행한 강연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1911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원하고 지향했던 것이 전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놀라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에 틀림없이 놀라게 될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바르트의 생애 전체를 관통하면서도 결코 변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칼 바르트의 위기의 신학이 인간과 땅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바르트가 하나님을 이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분(전적 타자)이라고 말함으로써 천상에서 이 세계를 관조하는 신학자로 상승한 것이 결코 아니라, 바로 이를 통하여 이 세계를 전적으로 변혁시키는 하나님을 고백하고자 했음을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있다. 바르트는 시종일관 "하나님은 혁명 안에 있다"고 했고, 이 세계의 혁명마저도 혁명하는 하나님을 지시하고자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게 바르트의 손에서 신문은 사라지고 도그마만 남았습니다."라는 식의 도그마가 언제부터 한국신학계에서 생겨나기 시작한지는 모르지만, 이것이야말로 정말 피상적이고 도그마적인 판단이 아닐 수 없다. 바르트의 '도그마'가 단 한번도 현실의 '프락시스'와 추상적으로 유리된 적은 결코 없다.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앞에서 거론한 신학자들이 바르트의 신학체계 전체를 다 알든 모르든, 혹은 그를 추종하든 넘어서든, 적어도 자본주의 문제를 보는 방식에서는 철저한 문제제기와 정치-신학적 해석과 변혁대안을 제시한 바르트의 '제 3의 길'을 여전히 추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논쟁의 치열성, 학문적 엄밀성과 구체성의 면에서도 아직 그를 능가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한국신학은 여전히 바르트로부터, 그러나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양대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학문과 실천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탁월하게 증언한 그의 사상과 용기에 우리는 아직도 크게 빚지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서구의 경험으로부터 아직도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물론 우리의 지혜와 역량을 다 동원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통일희년의 비전을 그릴 자유와 책임은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이제는 비전을 그리는 데만 몰두하기보다는 한 가지 실천방안이라도 내어놓고 한국교회가 솔선수범하는 길이야말로 통일을 앞당기는 길일 뿐 아니라, 갑자기 닥쳐올지도 모를 통일 후에 민족과 하나님 앞에 얼마 되지 않는 체면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