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적 코이노니아 교회론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 토의문서와 대화하면서-

 

이신건


Ⅰ. 들어가는 말

교회를 '코이노니아', 즉 친교, 교제, 사귐, 교통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자명한 것이며, 그렇기에 새롭거나 남다른 것이 결코 아니다.(주1) 비록 코이노니아의 개념은 압도적으로 바울적인 어법으로 나타나지만,(주2) 그 개념의 뿌리와 의미는 성서 전체에서 매우 포괄적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1991년의 캔버라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의 성명서(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일치: 은사와 소명)도 하나님의 경륜의 넓은 틀 안에서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사용했다. 즉 이 개념은 창조세계와 인류를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주3)

교회를 코이노니아로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은 바로 거룩한 가톨릭(보편적) 교회의 자기 이해의 중요한 핵심을 전승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의 토의문서(신앙과 생활과 증거에서 코이노니아를 지향하여)는 바로 사도신경의 본질적 내용을 오늘날에 새롭게 고백하려는 시도이다. 오늘날 세계교회가 오래 묵은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재삼 활성화하려고 하는 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그 동안 간과되고 억압되어 왔던 코이노니아의 정신을 고취함으로써, 신앙과 생활과 증거에서 가시적인 일치를 도모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고 여겨진다.(주4)

본 소고는 앞의 토의문서와 대화하면서 그 기본적 인식을 수용할 뿐 아니라 교회론적으로 더욱 더 심화시켜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또한 사도신경에 기초한 교회의 일치를 공동으로 고백하고 생활화하는 일에 이 소고가 기여하길 바라며, 아울러 '코이노니아'의 개념을 통하여 한국교회의 갱신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Ⅱ. 삼위일체론과 교회론

세계교회의 자기 이해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는 것은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이다. 캔버라 총회(1991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와의 관계에서 이런 사귐(필자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사귐)을 미리 맛보는 곳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의 조짐으로 살게 한다. 교회의 목적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 백성을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여 이 사귐을 드러내고 하나님과 인류와 전체 창조세계와의 사귐의 완성을 가리키는 데 있다.(주5)

1993년 8월에 산티아고에서 열린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의 토의문서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을 더욱 더 분명히 드러내고 발전시키고 있다:

예수는 아버지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예수와 그의 아버지와 성령 사이의 신적인 사귐의 신비로운 삶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이다. 즉 그들 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주고받는 사랑의 삶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신적인 삼위일체의 삶(곧 사귐) 안에 다양성이 함께 융화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갈라놓을 수가 없고, 또한 일치도 그저 획일적인 것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게 되었다.(주6)

나눔의 삶은 삼위일체적인 삶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그것을 반영하고 있다.(주7)

교회는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주8)

택함받은 자녀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성부와의 사귐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의 의지가 강하게 영원한 성자의 활동과 관계될 것이다.(주9)

이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써, 그분의 삼위일체적인 삶이 모든 코이노니아의 원형이요 근거이다 교회의 독특한 사명은 이 코이노니아를 실천해내는 일이다.(주10)

물론 1961년 뉴델리 총회에서 러시아정교회가 정식 회원교회로 가입하게 됨으로써 삼위일체론의 추가를 통한 헌장수정이 이루어졌고, 교회론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강조되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리스도 중심적인 보편주의가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주11) 그러나 1963년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렸던 제4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의 토의문서(그리스도와 교회)는 보편적 그리스도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으로 불가피하게 인도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론과 삼위일체 신앙의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분리할 수 없다는 신앙은 오로지 삼위일체 신앙의 틀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다.(주12)

그리하여 삼위일체론적 교회 이해는 교회론을 그리스도론과 성령론으로부터 발전시킬 것을 요구했고, 교회를 그리스도가 성령의 능력으로 다스리는 곳, 즉 성령의 사귐으로 이해하도록 제안했다. 그렇지만 이 문서는 하나님의 영으로서의 성령과 예수의 영으로서의 성령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으며, 성령의 위격적 주체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함으로써 아직까지도 교회를 삼위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는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주13) 그런 점에서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에서 큰 진보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겠다.

삼위일체론적 교회론은 종래의 그리스도 일원론적 교회론(루터교회)이나 성령 일원론적 교회론(희랍 정교회)을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깊이와 불의한 자의 칭의에 대한 인식이 없는 성령론적 교회론의 위험과, 성령의 넓이와 은사의 충만에 대한 인식이 없는 그리스도론적 교회론적 교회론의 위험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의 포괄적 영역 안에서 교회를 서술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주14) 왜냐하면 교회는 세계와 관계 맺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운동과 그 포괄적인 삶의 연관성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주15)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산티아고의 토의문서와 대화하는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교회를 고찰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먼저 삼위 하나님의 활동으로서의 교회를 그 코이노니아적 특성의 관점에서 각기 해명할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 각 교회론의 상호관계를 해명할 것이다.

Ⅲ. 삼위 하나님의 역사(歷史) 안에 있는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삶

1. '하나님의 백성'의 코이노니아

하나님의 백성은 일차적으로 신학적 실체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부름을 통하여 형성된 거룩한 백성이다(신 7:6, 14:2, 21, 26:19, 28:9 등). 교회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과 부름을 전제로 하며, 이 부름은 개인의 모든 행위에 선행하여 온 백성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의 공동체 전체이다.(주16)

구약성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자의식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속한다는 확신에 뿌리박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의 소유이다(출 19:5; 민 11:29, 17:6; 신 9:26, 27:9 등). 야훼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다양한 비유들을 통해서 가시화되었고(야훼의 아들; 딸; 혼인관계; 포도나무; 포도원; 주의 무리 등), 다양한 용어를 통해서 표현되었다(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 너의 하나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 조상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이스라엘의 주; 아버지; 심판자; 왕; 창조자; 돕는 자; 구원자; 방패와 보호; 산성과 바위 등). 하나님과 백성은 서로 속해 있다. 백성의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은 곧 백성의 일이다. 이스라엘의 승리, 행운은 야훼의 이름과 명예를 드높인다(삼하 7:26; 시 106:8; 렘 33:9 등). 이스라엘이 정복당하면 야훼의 이름도 다른 백성의 조롱거리가 된다(수 7:7-9; 신 32:27; 시 79:9 등). 야훼는 그의 위대한 백성 때문에 칭송받고, 이스라엘은 그의 위대한 하나님 때문에 칭송을 받는다(시 33:12, 144:15; 신 4:7, 32:43, 33:4 등).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친교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히브리적 표현은 '계약'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생활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통해 규정한다. 계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친밀한 교제를 규정하고 백성의 삶 전체를 규정한다. 계약은 야훼의 공동체 창조 의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계약 안에서 사는 자야말로 의로운 자, 선택된 자, 거룩한 자, 경건한 자이다.(주17) 계약은 이스라엘 종교의 공통 분모이다.(주18)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코이노니아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실체를 규정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인류 사이의 사귐의 일치(communion)를 좀 더 넓은 토대 위에서 기술한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이해가 관계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삶을 기초하고 규정한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사는 한 인간의 실존적 행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서적인 이해는, 우리 인간이야말로 근본에서부터 관계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또 그밖의 삶의 온 차원에서 코이노니아를 형성해 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빚음으로 그 인간이 자기와 하나가 되고, 서로가 사귐의 일치를 이루며, 창조세계의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 살게 하신 것이다.(주19)

여기서 계약은 바로 이러한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체의 표현과 연속(계속)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관계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하나님의 사귐의 의지에 근거를 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사귐의 의지는 노예 상태와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행위에 기초하고 있다. 이 은혜 행위를 기반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가 되었고, 율법 안에서 살도록 영감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의 조화로운 삶은 하나님의 공동체(qahal yisrael) 안에서 함께 사는 삶으로 표현되고 확대되었다.(주20)

하나님의 공동체는 예배(제의), 전쟁, 율법과 풍습의 공동체였다.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결정적인 의미를 주었다. 예배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성소는 또한 전쟁기지가 되었다. 제의에서처럼 전쟁에서도 야훼의 현존을 통한 백성의 영적 능력의 집중과 갱신이 이루어졌다(야훼의 거룩한 전쟁). 그리고 카할은 법 공동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백성의 일치는 동일한 율법과 풍습에 기초한 것이었다. 율법은 이스라엘 전체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고, 야훼는 율법의 보호자였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생활은 계약관계에서 기인한 것이다.(주21)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폐쇄적이고 자기 완결적 실체가 아니고 종말론적 실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은 미래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행동의 종말론적 개방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은 하나님의 포괄적인 세계 구원의 행동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스라엘과 맺어진 하나님의 계약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종말적 선교를 지시한다. 이스라엘의 소명은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선포에 있다. 새로운 출애굽, 새 계약, 새 백성의 회집, 메시야 기대, 새 성전 등에 관한 예언적 발언들은 바로 이를 지시한다.(주22)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도 이점을 적절히 지적한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성서의 경전에서 창조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 이야기보다 앞에 있다는 것은 인류의 일치를 강조하고 있음이다. 거기서 노아와의 계약 이야기로 계속되는데, 여기서 하나님이 전체 인류와 그리고 전체 피조물과 계약을 맺으셨음이 분명해진다. 이런 우주적 차원이 아브라함 안에서 모든 나라와 민족이 축복을 받게 될 것(창 12:3, 18:8 이하)이라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잘 나타나고 있다.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지니는 세계적인 의미를 놀라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사 40 이하; 슥 8:20-21, 14:9). 이스라엘의 소명은 '뭇 민족들의 빛'(사 49:6)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주23)

2. '그리스도의 몸'의 코이노니아

예수의 모든 활동은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그의 활동의 유일한 의미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소집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설교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의 소명과 분리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그의 소명 안에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가진다. 열두 제자의 임명은 종말론적인 구원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의 회집을 예언자적 표징으로 나타내는 행동이며, 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의 백성의 회복에 봉사하는 종말론적 차원을 가지며,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바라는 주의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의 소집과 갱신을 비는 기도와 다름이 없다(겔 20:41 이하 참조). 이처럼 예수의 활동은 병든 이스라엘 백성의 치유와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소집을 지향하고 있다.(주24) 예수운동은 하나님의 백성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났고, 뒤따라 오라는 부름은 이 백성 한가운데 주어졌다.(주25) 이 사실은 신약성서에서도 여전히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는 사실을 통하여 증명된다(벧전 2;9-10; 고후 6;16; 히 8:10; 계 1:6, 5:10, 21:3 등). 그리고 예수와 초대 공동체가 예수에게 적용한 '인자'(단 7:13)라는 칭호는 바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을 대리하는 예수의 집단적 인격과 활동을 나타낸다. 인자는 하나님 앞에 그의 백성과 함께 나아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그의 백성에게 넘겨준다(단 7:27). 바로 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창시자가 예수의 인격 안에서 도래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고백했다.(주26)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유유상종하는 인간들의 자연적 군집 욕구와 협동 욕구로부터 생겨난 게 아니라 예수의 소집과 결속으로 인해 생겨났다.(주27) 따라서 교회의 주체는 예수이고, 교회의 삶을 예수의 삶에 따라 맞추는 한에서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존재한다.(주28)

예수 안에서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의 희망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과 온 백성과의 좀 더 친밀한 교제로 들어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이제 '아버지'로 계시되었고, 인간들은 모두 형제(자매)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약성서의 교회는 민족적 한계를 넘어섰다. 낮고 천한 사람들,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됨으로써, 교회는 온 백성을 위한 사귐의 일치의 표징이 되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규정하는 것은 할례라는 옛 계약표지가 아니라 세례(그리스도의 할례, 골 2:11)가 되었다. 이로써 코이노니아는 투쟁과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현실성이 되었다.(주29)

종말론적 인격, 장차 올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예수(주30)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종말적 잔치)을 선포하는 사도직 속에(마 28:18 이하), 이를 대망하며 거행하는 성만찬 속에(고전 11:23 이하), 그리고 형제적 사귐 속에(마 18:20) 현존한다. 바울은 이런 공동체 속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으로 설명한다. 이 표상의 기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분분하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교회가 살아 있는 주와 결합되어 있음을 표명한다는 점이다. 세례와 주의 만찬은 주의 몸의 지체가 되는 데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세례는 몸과 하나 되는 사건이고(롬 6장), 주의 만찬은 그 몸에 속해 있음을 축하하는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 예식이 친교와 일치해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도 이 점을 분명히 설명한다:

코이노니아라는 말로 표현되는 하나님과 믿는 이들의 관계,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의 관계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고후 5:17-28; 요 15:1-11 참조) 있다는 다른 말로도 쓰여졌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스도에게서 세례받은 이들은 그분과 하나가 되고 서로 한 몸이 된다(롬6:4-11; 고전 12:13).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 안에서 함께 듣고 주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고전 11:17-26), 그들은 그분 안에서 삶을 나누고 코이노니아의 선물을 받게 된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고전 10:6-17).(주31)

그러므로 교회는 본질적으로 친교, 일치, 교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찬이 진정한 일치로 나타나지 않는다면(함께 나누어 먹지 않고 분열이 있다면), 진정한 식사의 친교도, 진정한 주의 만찬도 있을 수 없다(고전 11:17 이하). 그리고 교회가 오로지 성찬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는 것은 신앙 가운데서 주어지는 선물이면서도 매일의 윤리적 삶 속에서 구현되는 임무이다(롬 12:1-2). 초대 공동체는 자신의 모든 소유물을 공유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구현했으며,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한 코이노니아적 삶을 실천했다(행 2:42). 이런 코이노니아적 삶은 물질적인 은사뿐 아니라 영적인 은사의 공유(삶의 변화, 가르침, 기도, 기쁨과 슬픔, 진리를 위한 투쟁, 복음 선포, 창조세계와의 조화, 부활의 영광의 대망 안의 사귐)로써도 이루어져야 한다.(주32)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더욱 더 포괄적이고,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큰 분'이다. 예수는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자들과의 연대성 안에서 숨어 있는 방식으로 세상 안에 현존한다(마 25:31-46). 그러므로 이들 속의 인자의 현존은 윤리 이전에 교회론에 속한다.(주33) 그러므로 교회는 이들과의 사귐으로 부름받고 있다.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도 이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는 그 자체 공동체의 고난뿐 아니라 그밖의 모든 고통에 참여할 수 있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 고통이란 가난한 자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 또 한계상황에 있는 자들을 변호하고 보살피며, 인간 사회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에 힘을 보태고 인류의 심령에 산 희망을 유지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온 세계의 섬김 곧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는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주34)

그리고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그리스도의 몸이 우주적 형태를 가지고 있고 모든 피조물을 포괄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도 그리스도로 인한 갱신에 참여하고 있다. 만물은 그를 통하여 화해되었다(골 1:15 이하).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언제나 이미 온 창조의 교회이며, 자신을 넘어서 하늘과 땅을 충만케 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고 있다.(주35)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과도 정의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주36) 이점도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와 창조세계의 삶과 운명이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믿고 있다. 바울은 모든 창조세계가 하나님 자녀의 구원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다고 말한다(롬 8:19-23) 그것은 창조세계를 위한 인간의 책임성을 전제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교회는 전체 우주의 운명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이 우주의 주님도 되신다.(주37)

3. '성령의 피조물'의 코이노니아

고대 기독교의 한 축복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은 그리스도에게 은혜를 하나님에게 사랑을 귀속시키는 반면에 성령에게는 사귐의 은사를 귀속시키고 있다. 여기서 성령의 내적 본질은 분명히 사귐의 능력에 있음이 천명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공동체적 신성(Fr. Hölderin), 서로의 사이에서 오가는 하나님(J. V. Tayor), 나와 너의 신적 통일성(L. Feuerbach)이라고 말할 수 있다.(주38)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개방시키고 그와 사귐을 나누게 하는 자이다. 성령은 하나님을 지향하는 삶, 생명과 봉사, 기쁨과 책임을 선사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은 육, 즉 인간의 갈망과 자기 신뢰와 투쟁하는 영이다.(주39)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롬 8:14 이하; 갈 4:6-7), 특히 기도를 통해서 그와 사귐을 나누도록 역사한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살고자 하며 우리를 무척 사랑하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주40)

또한 성령은 공동체를 창조하는 영이다. 영광을 받은 주님에 의해 전달된 하나님의 영은 교회의 존립 기초요 생명원리이며 활동능력이다. 교회의 모든 원천, 존재, 존속은 영의 덕택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주41) 성령이 깨우치는 역사 속에서 교회는 소집되고, 성령의 생동하는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성장, 보존, 갱신되며, 성령의 조명하는 역사 속에서 교회는 세상으로 파송된다.(주42) 교회는 역사적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또한 종말적인 성령의 창조이기도 하다. 성령은 바로 이 사귐이다.(주43) 성령은 교회를 만들고 일치시키며(공동체 원리), 거룩하게 하며(성화 원리), 모든 시대를 통해서 진진시키며(보편성 원리), 사도적 교회로 보존한다(사도적 원리).(주44)

그리고 성령은 교회에 풍성한 은사를 선사한다. 그런데 성령의 은사가 수여되는 목적은 모든 사람의 유익, 교회의 건덕(고전 12:7), 즉 사귐에 있다. 그러므로 만약 성령이 사귐으로 인도하지 않고 공동체를 전체로 형성하지 않는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여 은사를 가진 자기 자신을 과시하며, 교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기의 영역을 만드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다. 이는 육의 사람이다(고전 3:1 이하).(주45) 산티아고의 토의문서에는 비록 성령의 내적 본질로서의 사귐의 능력이 아직도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 것같이 보이지만, 이런 측면이 간과되고 있지는 않다:

성령께서 이런 사귐(코이노니아)을 나타나게 하시는 곳은 교회이다.(주46)

고대교회는 성령에 의해 창조되는 이러한 사귐을 '코무니오 상토룸'(Communio Sanctor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소집되고 생동케 된 인간들의 활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귐이다. 이것은 성도들, 즉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된 인간들의 사귐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은 거룩한 것, 거룩한 관계, 거룩한 은사, 거룩한 임무, 거룩한 직분, 거룩한 역할 안의 사귐이기도 하다. 이것은 신앙의 인식과 고백, 감사와 찬양, 회개, 기쁨, 기도, 세상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난과 투쟁, 봉사, 희망, 예언, 예배 안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귐은 교회 건립의 사건으로서 죄인들이 그들의 행동과 본성 안에서 이러한 거룩한 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사건이다.(주47)

이런 사귐 안에서는 조건 없는 상호 인정과 연대성이 실현된다. '카리스마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귐은 구분 없는 획일성이나 계급적 억압을 배제한다. 은사의 다양성은 실로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포괄적 은총의 단일성의 표현이다. 구분 없는 평준화는 단일성보다는 오히려 황량한 공허를 가져다 준다.(주48)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일치와 마찬가지로 다양성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다양성은 일치를 전제로 해서 교회나 인종이나 그밖의 분열을 초래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마찬가지로 일치는 다양성을 풍성하게 하여서, 획일성으로 전락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교회는 우주적인 교회가 된다.(주49)

Ⅳ.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안에 있는 교회의 삶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특성을 삼위 하나님의 독자적 위격의 활동 안에서 삼중적인 측면에서 조명해 보았다. 이것을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역사(歷史) 안에 있는 교회의 코이노니아적 삶으로 규정지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사귐 안에 있는 공동체적 존재이다. 아버지와 아들 및 성령 사이의 신적인 사귐의 신비는 특히 예수를 통해 분명히 계시되었는데, 이 점을 산티아고의 토의문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삶과 사역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죽기까지 순종한 그 일을 통하여 자기 자신과 자기의 거처가 되어 주시는 아버지(요 15:10)와 자기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 사이의 밀접한 관계성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언제나 모든 것을 그분의 삶 속에 포함하고 감싸주는 그런 친교의 삶이다.(주5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삶은 삼위일체적 삶을 반영하고 있고(주51), 교회는 성서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획과 조화를 이루도록 부름받고 있다.(주52)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마땅히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의 관점에서도 조명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신론적 교회론과 그리스도론적 교회론 및 성령론적 교회론을 삼위일체론적 코이노니아 교회론 안에서 제한하고 동시에 보완해야 한다. 모든 일방적 혹은 배타적 교회론이 삼위 하나님의 신비하고 풍성한 사귐 안에서 극복되고 또한 상호 교통될 때에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도 삼위일체적 삶을 반영할 수 있으며, 또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서도 개방되고 풍성한 코이노니아적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주53)

그래서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코이노니아 안에 있는 교회의 삶을 설명하기 위하여, 앞장에서 언급한 각 교회론을 상호 관련시키려고 한다. 이 논문의 관심은 교회론에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의 코이노니아보다는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고 또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교회의 삶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

1.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의 몸'의 상관성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더불어 시간적(구속사적) 연속성을 갖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적 특징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공간적 일치성을 갖기 때문에 본래적인 의미에서 역사성을 갖지 못한다. 전자는 옛 계약과 새 계약 간의 관련성, 종말론적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데 유용한 반면, 후자는 그리스도와의 역사적 일치성을 수직적인 공간의 표상으로 전이시키기 때문에 교회의 일치성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다. 만약 '그리스도의 몸' 개념이 '하나님의 백성' 개념에 의해 보완되고 견제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쉽사리 교권적(성직계급적 법적) 표상이나 신비적 표상으로 떨어진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미래 개방적 성격은 희미해져 버리고, 그 결과 교회는 자신을 이상적인 '완전한 사회'로 간주하고 배타적 집단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의 가톨릭교회의 자아상에서 분명히 드러난다.(주54)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그리스도의 몸' 개념보다 교회 구성원의 자발성, 인격성, 책임성 등을 잘 드러낸다. 우리가 '몸'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인격성을 잃기 쉽고 지체들 간의 차이성도 간과하기 쉽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오직 유비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계급적 질서를 직접 도출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주55) 모든 신앙인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교회의 성직화는 불가능하다.(주56)

그렇지만 신약성서의 '하나님의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안에서 가능하게 된 공동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몸', 그와 더불어 하나의 운명과 생활의 공동체로 묶여진 '몸'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 운명과 결속되지 않은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의 특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 개념은 교회의 가장 심원한 내용적 충만을 표상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주57)

비록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너무 일방적으로 계급적, 신비적 혹은 유기적, 성례전적 관점에서 이해해 왔지만, 그리스도와 신자, 그리고 신자들 간의 심원한 일치를 표명하기 위하여 이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 반면에 개신교회는 이 개념이 갖는 성례전적, 교회일치적, 코이노니아적 성격을 너무 간과한 나머지 그리스도와 신자들, 나아가 피조물 간의 연대에 소홀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과 인류와 세계의 일치의 표징과 도구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지시하는 손가락, 그 전위대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오고 성취된 하나님의 나라를 표징적으로 드러내는 그 나라의 성례전이 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몸' 개념도 '하나님의 백성' 개념을 견제하고 보완한다.

2. '그리스도의 몸'과 '성령의 피조물'의 상관성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공간적 일치성을 표상하기에 적합한 반면에,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코무니오 상토룸'(Communio Sanctorum)은 역동적 사회성을 표상하기에 적합하다.(주58)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코무니오 상토룸이 단순히 종교적인 친교 단체로 떨어지는 것을 저지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와의 본질적 일치성을 명시화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코무니오 상토룸으로 창조하는 성령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영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현실을 규정하는 것은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이다. 교회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현실이다.(주59) 교회는 같은 종교적 체험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이 유유상종하는 종교단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주60) 만약 이 점이 흐려진다면, 코무니오 상토룸은 교회의 머리, 즉 주님을 약화시키고 대체하며 억압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를 교회로서 구성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 사람들의 영이 되는 셈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고 그 지체들을 그의 몸의 지체들로 만드는 것은 케리그마, 오순절의 성령, 성령의 은사의 충만, 신앙, 사랑, 희망이 아니며, 더욱이 세례나 성찬도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주61)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인 동시에 '성령의 피조물', 즉 코무니오 상토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 중심주의'는 '성령론적 열광주의'를 저지한다.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 가운데서만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도 존중된다. 그리스도론적, 형제적 통치는 '그리스도의 몸'의 성직 계급화를 저지하는 동시에 '성령(성도들)의 교제'의 신비화, 탈규범화, 즉 무질서를 방지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의(恣意)의 마지막, 모든 은총의 원천, 신앙의 심판자이기에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교회론의 영속적 척도이지 경건, 도덕, 제의, 조직, 깊은 명상이 그 척도가 될 수 없다.(주62)

그렇지만 코무니오 상토룸은 모임의 사건성, 나눔의 사회성을 특징으로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종교단체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그는 찢겨진 사귐을 회복한다.(주63) 코무니오 상토룸은 '그리스도의 몸'이 갖는 경직성, 폐쇄성, 기구성, 제도성, 교권주의화를 견제하고, 성도들 간의 자유로운 사귐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의 다양성과 사회성(일치성) 안에서 카리스마적 공동체를 창출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그리스도 일원론'을 견제하고 보완한다. 그것은 말씀(그리스도)의 광신을 견제하고 보완한다.(주64) 그것은 공간적 정체성을 역동적 사회성으로써 극복하고 포괄적인 성령의 활동을 나타낸다.

3. '성령의 피조물'과 '하나님의 백성'의 상관성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교회의 세상(세속)성을 지시하는 반면에,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코무니오 상토룸은 교회의 초월성(자유)을 보존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일차적으로 보이지 않는 교회(ecclesia invisivilis)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인식될 수 있고, 성령의 활동 가운데서 소집, 갱신, 보전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회는 '보이는 교회'(ecclesia visivilis)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행함 가운데서 드러나고, 성령의 활동은 구체적인 지상적 역사적 형태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주65)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 백성과는 동떨어져 있는 초지상적 단체가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 있는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도성을 찾아 방랑하며 유랑하는 백성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항상 잠정성, 종말론적, 미래적 개방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 안에서, 이 세상을 통과하면서 이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또한 항상 세상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의 조건, 제약에 매여 있고, 세상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주66)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는 항상 세상을 위한 교회이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의 의미, 방향, 목적이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지시함으로써, 자신을 위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을 포함하는 세상을 위한다.(주67) 교회가 교회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남을 위할 때이다.(주68) 교회가 세상에서 자신의 얼굴을 가지는 것도 어디까지나 남을 위해, 남들 때문에 그런 것이다. 교회는 '대조사회'(代照社會), '대안사회'(代岸社會)이긴 하지만,(주69) 하나의 사회이고 그래서 '대안사회'(代案社會)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 개념은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코무니오 상토룸이 성역과 게토 안으로 안주하는 것을 막는다. 그것은 교회의 이기주의, 초월주의, 내면주의, 신령화를 저지하고 억제한다. 그것은 교회의 세상적 책임과 소명을 분명히 지시한다.

그렇지만 성령의 공동체인 코무니오 상토룸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유, 초월성을 보존한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 파악 불가능성, 임의 처분 불가능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교회는 성령의 능력과 현존 가운데서도 성령의 자유, 초월성을 신앙한다. 성령은 자유와 기도, 희망의 영이다. 비록 성령은 하나님의 자유와 미래를 미리 맛보게 하지만, 더 큰 미래를 약속하고 그것을 열어보이는 영이다(갈 3:14). 성령은 미래에 완성될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서 언제나 새롭게 온다(갈 5:5). 성령 안에서 중재되는 모든 '사크라멘트'(sacrament)도 현재 안에서 용해되고 흡수되지 않는다. 사크라멘트는 원래 묵시적 개념으로서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계시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비밀(무스테리온)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사크라멘트는 항상 자신을 넘어서 다가올 미래의 희망을 지시한다.(주70) 그래서 성령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자들, 거룩한 것들의 교통은 '하나님의 백성'의 초월성, 미래 개방성, 탈자아성을 지시한다.

그런 면에서 '성령의 피조물'로서의 교회 개념은 '하나님의 백성' 개념의 세속화(세속주의적 오용)를 저지하고 억제한다. 즉 그것은 세속적 패권주의, 이데올로기 포로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그것은 교회의 잠정성, 허약성을 일깨우고 보완한다.


[주]

1. 그래서 제5차 '신앙과 직제' 세계대회의 토의문서 'Towards Koinonia in Faith, Life and Witness'(신앙과 생활과 증거에서 코이노니아를 지향하여)는 koinonia를 communion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필자는 박근원 역, 코이노니아와 교회일치운동(기독교사상, 1993, 8월호)을 참조한다(아래에서 Kin FLW로 줄임).
2. 바울에게 나타난 '코이노니아'의 개념, 특히 '코이노니아'로서의 교회 개념을 위해서는 J. Hainz, Koinonia, "Kirche" als Gemeinschaft bei Paulus(Regensburg : Pusset, 1982; Biblische Untersuchungen, Bd. 16)가 매우 유용하다.
3. Kin FLW, 88쪽.
4. 앞의 글, 84-92쪽 참조.
5. 앞의 글, 89쪽에 수록됨.

6. 앞의 글, 95쪽(번역에 조금 누락이 있기에 보완함).
7. 앞의 글, 96쪽.
8. 앞의 글, 99쪽.
9. 앞의 줄, 101쪽.
10. 앞의 글, 110쪽.
11. 이를 위해 H. Wegener-Feuter, Kirche und Ökumene, Das Kirchenbild des ORK(WCC) nach den Vollversammlungsdokumenten von 1948 bis 1968(Göttingen, 1979) 참조.
12. 이를 위해 R. Weibel-Spirig, Christus und die Kirche, Das ökumenische Gespräch über die Kirche, Zürich: Einsiedeln : Köln, 1972, 55쪽 참조.
13. 앞의 책, 55쪽 이하 참조.
14. J. Moltmann, 박봉랑 외 4人 역,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한국신학연구소, 1980), 49쪽 이하.

15. 앞의 책, 78쪽.
16. H. Küng은 개인주의적 혹은 집합주의적 교회관을 넘어서 공동체적 교회관을 이처럼 잘 표명하고 있다. H. Küng, 이홍근 역, 교회란 무엇인가(분도출판사, 1978), 117쪽 이하.
17. N. A. Dahl, Das Volk Gottes(Darmstadt, 1963), 6쪽 이하.
18. K. Barth, KD Ⅳ/1, 22쪽. K. Barth에 의하면 하나님의 모든 의지는 바로 계약의지이다. 그러므로 그는 창조조차도 하나님의 영원한 계약의 표명, 계시 및 실행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창조는 계약의 외적 근거로,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로 이해되었다. K. Barth, KD Ⅲ/1, 38, 106쪽 이하, 258쪽.
19. Kin FLW, 93쪽.
20. 앞의 글, 93쪽 이하.
21. N. A. Dahl, 같은 책, 6쪽 이하.
22. 앞의 책, 38쪽 이하, M. Keller, Volk Gottes als Kirchenbegriff(Zürich: Einsiedeln: Köln, 1970), 252쪽 이하.
23. Kin FLW, 26쪽.
24. G. Lohfink, Wie hat Jesus Gemeinde Gewollt(Herder, 1982), 17-41쪽 참조.
25. N. A. Dahl, 같은 책, 144쪽 이하, W. Huber, 이신건 역, 교회(한국신학연구소, 1990), 68쪽 이하 참조.
26. N. A. Dahl, 같은 책, 144쪽 이하, W. Huber, 같은 책, 68쪽 이하 참조.
27. K. Barth, 같은 책, 781쪽 이하.
28. J. Moltmann, 같은 책, 80쪽.
29. Kin FLW, 95쪽.
30. J. Moltmann, 같은 책, 38쪽 이하.
31. J. Moltmann, 같은 책, 38쪽 이하.
32. 앞의 글, 96쪽 이하.
33. J. Moltmann, 같은 책, 146쪽 이하.
34. Kin FLW, 99쪽.
35. J. Moltmann, 김균진, 김명용 역, 예수 그리스도의 길(대한기독교서회, 1996), 398쪽.
36. 앞의 책, 426쪽 이하.
37. Kin FLW, 100쪽(번역상 약간의 오역이 있기에 교정함).
38. J. Moltmann, 김균진 역, 생명의 영(대한기독교서회, 1993), 291쪽 이하 참조.
39. H. J. Kraus, Heiliger Geist(Kösel, 1986), 106쪽 이하.

40. E. Schweizer, 김균진 역, 성령(대한기독교서회, 1982), 145쪽.
41. H. Küng, 같은 책, 128쪽 이하 참조.
42. K. Barth, KD Ⅳ/1, 718쪽 이하 Ⅳ/2, 695쪽 이하, Ⅳ/3, 780쪽 이하.
43. J. Moltmann,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 47쪽.
44. Y. Congar, Der Heiliger Geist(Herder, 1982), 167쪽 이하.
45. E. Schweizer, 같은 책, 152쪽 이하.
46. Kin FLW, 97쪽.
47. K. Barth KD Ⅳ/2, 726쪽 참조.
48. W. Huber, 같은 책, 71쪽 참조.
49. Kin FLW, 98쪽.
50. 앞의 글, 95쪽.
51. 앞의 글, 98쪽.
52. 앞의 글, 99쪽.
53. 몰트만의 말대로 삼위일체의 구조는 그리스도 일원론과 열광주의적 성령론을 극복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주의나 성령 중심주의에 비해 하나님 중심주의를 보존한다.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107쪽. 그런데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사귐 안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구조와 무관한 하나님 중심주의는 군주론(君主論)이나 양태론(樣態論)에 떨어진다. 이 문제의 극복이 없는 하나님 중심주의(예를 들면 종교다원주의)는 교회의 전통과 교회의 일치를 훼손하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54. 이에 대해서는, 졸저, 칼 바르트의 교회론(성광문화사, 1989), 243-274쪽 참조.
55. 이에 대해서는, M. Schmaus, Das gegenwärtige Verhältnis von Leib Christi und Volk Gottes, in: Volk Gottes(Herder, 1967), 24쪽 이하 참조.
56. H. Küng, 같은 책, 115쪽 이하.

57. M. Schmaus, 같은 책, 26쪽 이하 참조.
58. 교회를 특히 사회학적으로 규명한 교의학적 저서로서는 D. Bonhoeffer, Sanctorum Communio(München, 1960)가 유명하다. 본인은 여기서 제한적으로 이 책과 대화한다.
59. 같은 책, 103쪽 이하.

60. 이와 같은 견해로써 바르트는 당대의 현대주의자들, 즉 자유주의자들의 교회관을 반박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인간에게 흘러들어왔다고 믿어지는 인상, 경험 및 자극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롭게 결성된 단체가 아니다. K. Barth, Verheiβung und Verantwortung der christlichen Gemeinde im heutigen Zeitgeschehen, in: ders., Eine Schweizer Stimme(Zürich, 1945), 167쪽.
61. K. Barth, KD Ⅳ/1, 738쪽 이하.

62. E. Käsemann, Amt und Gemeinde im Neuen Testament와 Einheit und Viefalt in der neutestamentlichen Lehre von der Kirche, in: ders., Exegetische Versuche und Besinnungen(Göttingen, 1964), 109쪽 이하, 266쪽 이하 참조.
63. D. Bonhoeffer, 같은 책, 104쪽.
64. 이에 대해서는, H. Küng, 같은 책, 138쪽 이하 참조.
65. K. Barth, KD Ⅳ/1, 728쪽 이하 참조.
66. K. Barth, KD Ⅳ/3(2 Hälfte), 840쪽 이하 참조.
67. 앞의 책, 872쪽 이하.
68. D. Bonhoeffer, Widerstand und Ergebung(München, 1970), 306쪽.
69. G. Lohfink, 같은 책, 160쪽 이하.
70. G. Bornkamm, μυστιον, ThW Ⅳ, 8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