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지평 위에 있는 교회

이신건

 

1. 교회를 보는 시각

오늘날 교회는 우리 주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자명한 실체이다. 그러나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 질문에 내려지는 대답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 교회는 단순한 현상으로서 단순한 얼굴을 갖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로 다가가서 교회를 관찰하고 설명하도록 요구한다.

이 때에 우리는 제 나름대로의 시각(입각점)을 취하고 거기서 출발하여 교회를 이렇게 저렇게 정의한다. 우리는 교회를 현상학적으로 설명하여 사회적, 문화적 교회상을 기술할 수 있다. 혹은 우리는 종교사적으로 교회를 설명할 수 있고, 교회적, 교파적으로 교회의 생성과 발전을 추적할 수도 있다. 또 우리는 교회를 신학적으로 탐구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시각들은 따로따로 혹은 서로 혼재한 채 교회관을 결정짓고 그래서 교회의 형태도 결정짓는다. 그리고 이 모든 시각들도 또 다른 한편으로 관찰자의 관심과 이해관계, 특정한 세계관 혹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규정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시각들과 관심을 가장 포괄적으로 묶고 또 비판할 수 있는 가장 공통되고도 분명하며 진정한 시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의 시각은 바로 그분을 척도로 삼아 교회를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교회의 기초요 힘과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분만이 지배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바로 그곳에서, 교회는 진리 안에 거하게 되고 자유로와지며 세상에서 해방하는 힘을 갖게 된다(J. 몰트만). "교회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인가?"에 대한 결정적 해답은 오랜 전통과 역사, 업적, 성공, 외적인 확장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속에서 권능있게 들려지고 그분에 대해 질문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K. 바르트). 모든 교회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인 자유와 통치를 자기 것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고 그분의 뒤를 따르면서 남을 섬기는지 여부에 따라서,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결정될 것이다(E. 케제만).

그런데 그리스도의 통치(지배, 나라)는 바로 그분 안에서 가까이 온, 아니 그분의 인격으로 다가온 하나님의 통치의 새롭고 궁극적인 관철이요 그 표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통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살고 말하고 행동했다(J. 몰트만). 그리고 그분은 단지 그 나라를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격으로 구현했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이 또한 하나님 나라의 소식이기도 하다(J. 예레미아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나라의 인격이다(오리겐, K. 바르트).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만이 교회의 근원(유래), 근거(토대), 목표(희망)를 규정하고 제한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존립의 근거요, 교회비판의 척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메시아적으로 이해하여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인격으로 동터 온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관찰해야 한다.

그런데 '종말론적'이란 수식어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교회가 항상 종말 앞에 서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교회 자체가 바로 종말론적 현상이란 말인가? 아니면 두 가지 뜻을 다 포함하는 말인가? 사실상 '종말'이란 말만큼 다의적이고 복잡한 용어가 흔치 않고, 그래서 '종말론'만큼 혼란스럽고 때로는 애매모호한 논의도 많지 않은 듯하다.

종말론 혹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종말신앙은 모든 문화권에서 각양각색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지만 기독교에서만큼 그렇게 독특하게 나타나는 곳은 드물다. 유대-히브리적 전통에서 종말신앙이 형성된 신학적, 사회적 배경은 복합적이고, 또 장구한 세월 속에서 다양한 변천을 겪었지만, 우리는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비록 유대인들이 (비교적으로 후기에) 만물의 창조와 시초와 관련하여 그 새 창조, 종국에 관해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가슴에서 종말신앙이 피어난 것은 우주의 시작과 끝에 관한 이론적, 인관론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한 복판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의 미래,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의와 약속, 하나님의 뜻의 궁극적 성취를 바라보는 신앙 가운데서 잉태되고 성장하였다. 약속신앙과 더불어 잉태된 유대적 신앙의 역사는 처음부터 희망의 역사였다. 역사적 희망에 대한 신앙은 창조의 시초와 종말, 개인의 부활이나 불멸하는 영혼에 관해 말하기 훨씬 전부터 존재해 왔다.

비록 약속신앙이 종말의 전적인 새로움을 강조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피안(彼岸)의 세상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핵심으로 삼는 전 세계적인 구원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 구원은 내용적으로 '하나님의 의(義)'의 관철(神正論), 즉 야훼의 통치(야훼 왕권의 실증) 안에 집약되어 있다. 즉 야훼의 통치는 모든 종말론적 기대의 선두에 서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날은 '야훼의 날'이라고 불린다. 이처럼 종말신앙은 본질적으로 역사 속의 하나님의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신앙과 맞물려 있다.

그렇게 볼 때, 종말에 관한 우주론적, 인과론적 사고나 심리적인 기대가 하나님의 나라를 규정했다고 말할 순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통치)에 대한 궁극적인 (취소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새롭고 종국적인) 기대가 종말론적 사고와 심리를 규정, 인도했거나 강요했다고 말해야 한다. 비록 묵시적 종말론(默示的 終末論: Apocalyptic Eschatology)도 예언자적 종말론(預言者的 終末論: Prophetic Eschatology)과는 달리 종종 역사를 폐쇄주의적, 비관주의적, 결정론적으로 이해하고 있기는 하더라도, 그것은 암호(暗號)와 상징(象徵)을 통하여 역사의 희망을 철저히 표현하려고 하였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이런 희망은 일방적인 역사긍정이나 역사부정의 방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야훼 통치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통하여 우주를 역사화(歷史化)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묵시적 희망은 역사를 도피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현실 극복의 대안적(代案的)인 시도로써 우주적인 구원을 확인하고 있다. 이처럼 종말론은 역사(우주)의 파국, 종국에 관한 사고가 아니라 그 궁극적이고도 질적인 비약, 그 새로운 시작, 아니 그것을 가져 오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에 대한 임박한 기대 혹은 체험을 다양하게 표현하려는 신학적 기획(企劃)이다. 물론 이 기대는 종종 시대적 표상(表象)이나 표징(表徵)과 결합되어 선포되었으나, 그 내용과 시간과정(時點)은 항상 열려 있는 것이었고(묵시적 종말론은 '마지막 때'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역사를 도식적으로 설명하려는 희망의 장치이다), 또 역사에 의해 추월되고 능가되는 방식으로 경험되었다. 그러므로 종말론은 하나님 나라의 열려진 지평 이편에서 저편을 앞당겨 기술(記述)하려는 단편적(斷片的)이고도 선취적(先取的)인 기술(技術), 기획(企劃) 혹은 장치(裝置)이다. 이러한 관점 아래서 교회를 이해해 보고자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까이 왔으나 아직은 다 오지 않은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빛 아래서 교회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더욱이 그 전단계(前段階)도 아니다. 바르트의 말을 따르자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복사(輻射), 반영(反影)이고, 큉의 말을 따르자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조(前兆), 여명(黎明)이며,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의 말을 따르자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表徵), 선취(先取)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기에 그 전조로서 교회도 온 것이지, 교회가 왔기에 그 결과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권능 안에 있는 교회는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지만, 그 활동 안에서 그것을 선취하는 새로운 인류의 전위대(前衛隊) 혹은 돌격대(突擊隊)이다. 기독교의 메시야적 잠정성(暫定性), 즉 역사적인 실존(순례자, 나그네로서의 삶)은 스스로 사회적, 역사적 한계를 초월하도록 만든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역사적 궁극성(窮極性), 즉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로 하여금 그 어떠한 불확실한 역사 속에서도 확신과 기쁨을 갖도록 만든다. 잠정적이나마 궁극적인 확신 속에서, 그리고 궁극적인 것을 지향하는 잠정적 불안 속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시하고 반사하여 투영하고 선취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표징을 수립하는 '메시야적 공동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3.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의 교회

만약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 표징인 교회가 그 나라의 보편적인 성취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려고 한다면, 구체적으로 오늘날 교회가 이를 성취하는 행동의 모범적 사례로 내세울 만한 것들은 어떠한 것인가?

1) 교회는 형제들과 자매들의 '새로운 가족'으로서 서로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인정하고, 사랑 안에서 함께 결속되어야 한다.

2) 교회 안에는 모든 종류의 민족적, 계급적, 성적, 경제적, 사회적, 연령적 장애물이 철폐되어야 한다. 교회는 '범인류적, 형제애적 공동체'이다.

3) 교회의 각 지체들은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섬겨야 하며, 다양한 은사들을 활용하는 영역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머리되심)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주권도 희생과 섬김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4) 교회는 '화해의 영역'으로서 비록 '죄인들의 공동체'이지만 회개를 통해 '성도들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며, 갈등을 지니지만 이해와 용서로써 이를 극복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폭력 사용은 금지되어야 한다.

5) 교회는 특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 가난한 자들, 병자들, 소외받는 자들을 포용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의 촉진을 위해 애써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이러한 자들의 편을 들면서 사회적 정의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장차 심판주로 올 인자(人子) 예수는 가난한 자들 안에서 숨어 있는 방식으로 임재하기 때문에(마 25:32-46, 마지막 심판의 비유를 참조하라), 교회도 바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6)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또 이것을 앞당겨 온 예수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제자들의 무리'로서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함으로써 고난을 당하지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미움을 미움으로 극복하지 않기 때문에 대속적인 고난을 통하여 악을 폭로하고 극복하는 힘을 매개한다.

7)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로서 모든 백성들을 하나님 나라의 친교 안으로 불러 들이며, 이 나라의 도래(到來)를 위해 자신의 것(가족, 재산, 명예, 생명 등)을 희생하며 헌신한다.

8) 교회는 '은사들의 공동체'로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들을 존중하고 장려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미리 맛본다.

9) 교회는 '성만찬적 공동체'로서 서로 함께 나누고 함께 예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으며 항상 개혁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가 될 수도 있다.

4. 잘못된 교회상과 올바른 교회상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생활을 형성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덱거)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교회를 설명하는 언어적 표현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결정한다. 앞에서 말한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상을 잘못 규정하는 언어를 한 가지 지적하자면, 그것은 '방주'로서의 교회이다. 노아의 방주는 홍수에서 구원받은 무리의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 선택과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또한 방주로서의 교회상은 세상에 있되 세상에 빠지지 않은 구별된 백성,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유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하다. 그렇지만 이 교회상은 하나님 나라의 전조와 표징, 전위대로서의 교회상을 전혀 담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물 위의 기름처럼 세상에 떠 있는 초연한 영역을 의미할 순 있어도, 세상 안에서 세상을 향해 선포하고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상은 자칫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오도하기 쉽다.

교회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요, 산 위의 마을이다. 교회는 어디서나 보이고,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주어 세상을 변혁하는, 부름받고 파송받은 제자의 공동체이다. 교회는 사회 한복판에 있는 대조사회(對照社會), 대안 사회(對案社會)이다(G.로핑크).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전령, 그 나라의 파수꾼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전위대, 선발대, 돌격대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을 주시하고, 세상으로 공격해 나가서, 세상을 접수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에 의해 변화된 새 누룩으로서 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성례전이다. 성례전(싸크라멘트)이란 본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비밀(무스테리온)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교회는 탄식하는 피조물의 대변자일 뿐만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피조물의 상징이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종말의 구원을 미리 맛보는 시음소(試飮所)요, 이를 앞당겨 축하하는 축제마당이다. 교회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사하는 그 나라의 여명, 거울이요, 그 나라의 백성이다. 교회는 해방받은 해방자, 화해된 화해자이다.

5. 종말론적 지평 위에 있는 교회의 형태

앞에서 나는 '종말론'을 정의하여 하나님 나라의 열려진 지평 이편에서 저편을 앞당겨 경험한 것을 기술하는 단편적 기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지평 이편에 있는 교회는 항상 저편을 넘겨다 보는 일만을 계속하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중지해 있지 않고 돌입해 들어오고, 교회는 이를 잠잠히 기다리지 않고 서둘러 마중나가기 때문에, 지평 이편과 저편은 항상 겹쳐지고 함께 움직인다. 그런 의미에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회는 동터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지평 위에서 함께 움직여 나가는 동적인 실체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어떠한 형태로 있어야 하는가? 세 가지만을 개관적으로 설명해 보기로 하자.

1) 교회는 기다리는 교회요, 지나가는 교회요, 신뢰하는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을 목적으로 내세워서는 안된다. 교회는 자신이 일시적, 잠정적, 과도기적 존재임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의 목적, 희망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일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항상 이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을 신뢰해야 한다(H.큉).

2) 교회는 열려진 교회요, 항상 개혁되는 교회요, 자기 비판적인 교회이다. 우리는 비단 '문이 열린' 교회만이 아니라 '열린 교회'가 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K. 라너). 교회는 항상 새로이 실험하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교회는 항상 예언자적, 카리스마적 요소를 지녀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려고 한다면, 교회는 특정한 전통의 고착화나 우상화라는 위험한 시련에 빠지고, 그리하여 붕괴하기 쉽다.

3) 교회는 사귀는 교회요, 나누는 교회요, 일치하는 교회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이를 향해 자신을 여는 교회는 동시에 이웃을 향해 자신의 가슴을 여는 교회일 수 밖에 없다. 특히 교회는 고난당하는 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고통과 희망을 나누어야 하며, 인류의 희망인 하나님 나라의 목표를 위해 일치하고 협동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언제나 공의회적(公議會的)이요, 에큐메니칼적이다(W.후버). 이러한 교회의 형태는 메시야적인 삶의 양식을 낳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르는 삶은 개인적이고도 공동체적인 메시야적 삶의 양식을 추구한다. 왜냐하면 메시야적 복음은 억압당한 삶을 해방시키고, 삶에게 방향과 의미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은 바로 성령 안의 삶이다(J. 몰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