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하나님의 나라 운동

이신건

 

1. 들어가는 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그는 과연 누구인가? '크리스토프'란 '그리스도를 지고 가는 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블룸하르트'란 그의 부친의 이름에서 직접 따온 것이다. '블룸하르트'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이 두 사람의 생애와 신학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가? 특히 아들 블룸하르트는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이것이 이 논문이 다루고자 하는 주제이고 목적이다.

칼 바르트의 말대로 신학사에서 이 사람을 다루는 것은, 신학의 개념에서 볼 때, 문제가 있는 시도이다. 그는 이론적인 작업에 참여하려는 의도를 전혀 갖지 않았다. 그는 실천의 사람으로서도 설교가라기보다는 목회자였다. 그리고 그는 목회자로서도 신학의 엄밀성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트는 그의 책, '19세기의 개신교 신학'(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undert, 1947)에서 블룸하르트를 당대의 영향력있는 신학자들 중의 하나로 당당히 취급하고 있다.

그는 후기에 그의 방대한 저서 '교회 교의학'(Kirchliche Dogmatik) 1/1에서 신학의 본질과 과제에 관해 원칙적인 언급을 하는 맥락에서 '비정규적 교의학'(Irreguläre Dogmatik)의 개념을 만들어 내고, 그 대표자들 중에서 블룸하르트도 거론한 적이 있었다. '비정규적'이라는 말로 바르트가 의미한 것이 '비체계적'이라는 뜻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블룸하르트의 사상에는 분명히 일관된 체계가 있다. 단지 그는 책상 앞에 앉아서 체계적으로 골똘히 생각하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경험에서부터 출발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경험을 철저히 체계적으로 숙고했고, 그 결과로 체계적인 신학자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블룸하르트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여전히 의미를 줄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의 의미를 간단히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쉽지 않지만, 바르트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받볼(Badboll)에서 다시금 솟아오른 새롭고도 신약성서인 것을 우리는 '희망'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에 관한 단순한, 너무나 종종 하나님 모독적인 발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통치가 보일 수 있고 만질 수 있도록 세상에 출현할 것을 바라는 희망이고, (불변하는 상황들 앞에서는 언제나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 그런 위로와 진정시킴과는 정반대로) 세상의 옛 상황으로부터의 철저한 '도움'과 구원을 바라는 희망이며, (자신의 영혼구원에 대한 이기적 염려, 종교적 초인들과 귀족정치를 길들이려는 모든 시도와는 정반대로) 모든 사람들, '인류'를 위한 희망이며, (이른 바 '종교적-윤리적' 생활의 순전히 영적인 이상과는 정반대로) 생활의 '육적인(leiblich) 측면'에 대한 희망이면서 동시에 죄와 슬픔만이 아니라 가난, 질병과 죽음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적이기도 한 희망이다.

희망은 언제나 미래로부터 온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현재의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언제나 우리에게 살아 있는 현실로 다가 온다. 그러므로 희망 속에서 과거의 블룸하르트는 항상 우리 곁에 다가 오고 우리 안에 살아 있다.

그래서 바르트도 말한다:

몰이해한 그의 적들과 감사에 가득찬 그의 숭배자들은 시간에 따라 침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서 무엇이 중심이었던가를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 사이서 그 자신은 계속 살아 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미래의 승리를 위해.

이런 의미에서 20세기에서 '희망의 신학'의 본류는 바로 블룸하르트에게서 유래한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는 현대신학에서 '희망의 신학'의 아버지이다. 그렇다면 희망과 미래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미래의 승리는 무슨 과거에 대한 승리이며, 무슨 미래의 승리인가? 블룸하르트는 무슨 절망에 반기를 들고 희망의 외침을 부르짖었는가?

여기서 우리는 잠시 시선을 돌려 '신앙의 어머니'(칼빈)인 교회가 2천 여년 동안 걸어 온 길을 회상해 보자. 교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무엇이 중심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동터오는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 어두운 과거를 물리치고 육박해 들어 오는 하나님의 통치의 희망이 아니었던가? 이 나라가 들어 오자 사탄의 나라가 흔들리고, 그의 세력 안에 있던 모든 지상 나라, 율법과 죄, 질병과 억압이 그 보좌에서 내팽겨쳐지고, 온 인류를 위한 새 임금의 등극이 선포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로 '하나님의 의'로 대체되고,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의'로 대체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로 가고 말았는가? 그것은 교회 안으로 들어 갔다가, 결국엔 경건한 신자의 내면성의 나라 안으로 들어가 이 속에서 유폐당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활개치게 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다시금 세상의 나라, 권력과 맘몬의 나라가 아니었는가? 그것은 새로운 율법과 죄, 질병과 억압의 세력이 아니었는가?

블룸하르트가 오늘 한 세기 이상이나 동떨어진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그가 다시금 경건한 신자의 내면성 안으로 감금된 하나님의 나라의 과거에 대해, 하늘과 내세만을 위로로 삼고 현실에 절망하던 과거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를, 그 미래의 승리를, 모든 인류를 위한 승리를 크게 외치고 싸웠던 용사였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가 그의 부친에게서 새롭게 발견되고 경험되었던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더 진전시킨 생생한 발자취였기 때문이다.

2) 몸 말

(1) 부친 요한 크리스토프의 생애와 사상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친 요한 블룸하르트(Johann Christoph Blumhardt, 1805-1880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왜냐하면 이 둘은 단지 혈통적으로만이 아니라 사상과 활동 면에서도 긴밀한 연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은 부친의 길을 똑같이 반복하지 않고 그 나름대로 독특한 길을 걸었다. 그렇지만 아들의 길을 예비한 아버지의 역할은 아들 못지 않게 강조되고 존중받아야 한다.

요한 블룸하르트는 독일 남부 뷔템베르크(Wüttemberg)를 정점으로 한 경건주의(Pietismus)의 전성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연히 경건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자랐다. 경건주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지금까지의 교리적, 논쟁적 설교는 성서적, 도덕적이 되고, 교직의 종교적, 윤리적 자각도 깊어졌다.

그리고 북부 독일의 경건주의가 주로 귀족계급 사이에서 널리 퍼졌던 반면에, 남부 독일의 경건주의는 시민이나 농민 사이에서 정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귀족 계급에 대항하는 하나의 힘을 지닐 수 있었다. 그래서 평신도의 자발성이 강조되고, 평신도의 교회참여가 권장되었다. 그리고 경건주의의 노력으로 성서가 모든 사람의 책이 되었고, 그리하여 성서주석이 교리나 철학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경건주의는 이 시대의 기독교 시민이 발견한 적극적 측면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경건주의의 영향 아래 자라난 요한 블룸하르트는 어릴 적부터 성서를 친숙히 대하고, 이미 12 세 때에 성서를 두 번 통독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어린 시절에 성서 안에 하나님의 불가사의한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는 생각을 지니고, 그것이 대한 동경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경건한 나'가 전면에 나타나는 것을 당시의 교회의 근본악의 하나로 보게 되었고, 신앙의 사적 성격을 비롯하여 모든 종교적 이기주의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경건주의가 죽은 정통주의의 경직성에 비하여 교리보다 인간의 삶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고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모든 것을 인간에게 동화할 수 있는 것, 인간화할 수 있는 것으로 취급하려는 근대적 인간의 의도가 깔려 있다. 그리고 경건주의는 감정적, 신비적 태도와 세상과의 분리를 특징으로 갖고 있었으며, 바르트도 적절히 지적했듯이, 개인주의, 기계주의(Mechanismus, 필자 주: 하나님과 인간, 세상의 관계를 유기적인 관계로 보지 않고 개인적, 고립적 자세로써 구원을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당시의 경건주의가 갖는 한계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당시의 경건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요한 크리스토프는 1820년에 쇤타알(Schöntal)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의 기초수업을 받았고, 4년 후에는 튀빙엔(Tübingen) 신학교에 진급하여 5년 간 더 신학훈련을 쌓았다. 1829년의 졸업 후에 그는 여러 지역(듀르멘츠, 바젤, 입팅엔)에서 목회했다. 이 시기의 그의 목회자적 자세는 매우 경건주의적이어서 '하나님과 회개하지 않은 영혼'의 문제가 목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뫼틀링엔(Möttlingen)에서 예기치 못했던 대투쟁을 겪은 후부터 그는 경건주의의 좁은 한계를 깨트릴 수 있었다. '대투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일어났다. 그는 1838년에 33세의 나이로 주민 500 여명이 사는 작은 촌락도시 뫼틀링엔에 부임하게 되었는데, 부임 1년 반이 지나서 그는 여러 질병을 앓는 고트리빈 디투스(Gottliebin Dittus)라는 자매를 접하게 되었다. 블룸하르트가 취임설교를 할 때, 그녀는 그의 눈알을 빼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1년 반 후에 그녀의 집안에는 이상한 소리와 움직임이 나타났다고 한다. 집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에 무엇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하여 들려 왔고, 블룸하르트와 같이 간 사람들이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면, 소리는 더욱 소란스러워졌다고 한다. 때로는 의자가 날라 올라간다든가 창문이 흔들리며 천정에서 모래가 쏟아졌다고 한다. 고트리빈 디투스는 자주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며 쓰러졌는데, 블룸하르트는 어떤 악령의 힘이 역사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럴 때에 그는 주 예수의 도움을 구할 수 밖에 없었고, 또 그녀의 귀에 "손을 모으고 '주 예수여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하시오"라고 외치자, 경련이 멎기도 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곤 했다. 때로 그녀의 입에서는 악령의 말이 나오기도 하고, 험상궂게 그에게 덤벼들기도 했다.

1834년이 되자 그녀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모래, 유리파편, 피를 토하고 완전히 죽음 직전에 이르도록 정신착란에 빠졌다. 블룸하르트는 그녀의 비참함 앞에서 어둠의 세력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고, 그가 어릴 적부터 성서에서 읽었던 것과 같이, 이러한 인간의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하나님의 힘의 개입이 일어나지 않는지 분노하고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는 암흑의 세력과 목숨을 거는 육박전을 감행했다. 그는 이 싸움에서 싸움의 주체가 그 자신이 아니라 주 예수임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주 예수를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점차로 뒤로 물러가기 시작했다. 주님이신 그분에 대한 신뢰감이 깊어질수록 그의 마음에서는 " 전진하라, 예수가 뱀의 머리를 밟아 부수었다고 하는 것이 거짓이 아니라면, 가장 깊은 못에 빠져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좋은 목표로 인도될 것이다"라는 음성이 들렸다. 그는 오직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싸우려고 했다. 이제 디투스의 질병은 그녀의 두 자매에까지 확산되어 도를 더해 갔다. 그런데 1843년 12월 27일 한밤 중에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 후에 싸움은 끝나고 말았다. 그날의 일을 그는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녀(카타리나)의 목에서 몇 번인가 아마도 15분 정도 계속되었을까, 절망의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집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은 무서운 괴성이었다. 나는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드디어 감동적인 순간이 왔다... 새벽 2시에 소녀는 의자에 앉아 머리 상반신을 뒤로 젖히고 앉아 있었으며, '사탄이 된 천사'로 불리워지는 자가 인간의 목에서 나오리라고 생각할 수 없는 음성으로 '예수는 승리자다, 예수는 승리자다'(Jesus ist Sieger!)라고 부르짖었다...

이윽고 악령의 위력과 힘은 순간순간마다 빼앗겨가는 듯이 보였다. 악령은 점차 조용하고 얌전해졌고, 차차 그 운동이 둔해져서 드디어는 전혀 판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멸되고 말았다. 마치 빈사상태의 사람의 빛이 사그라져 가는 것과 같았다.그러나 그것은 겨우 아침 8시 쯤의 일이었다.

이것은 2년 동안의 싸움의 결과로 크리스마스 기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순간에 고트리빈도 함께 나았다. 이 날 이후로 고트리빈 일가는 긴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정상생활로 되돌아 왔고, 고트리빈은 일평생 블룸하르트 부인의 충실한 조수가 되었으며, 블룸하르트의 사역의 동반자가 되었다. 이런 놀라운 체험은 그 이후의 블룸하르트의 사역에서 놀라운 각성과 참회 그리고 신유의 사건으로 계속 이어졌다. 완고한 농부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대성통곡했고, 꽉 메어진 시골교회의 열린 창문들 앞에서 병자들은 치유를 경험했다. 그리고 목사관에서 사람들은 성령이 다시 강림하기를 빌었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이 그 당시에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이었으며,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가? 한국교회에서 허다하게 일어난다는 신유현상, 전파매체와 영화 등을 통해서 그런 유사한 현상들을 자주 접하는 우리에게 그것이 새삼 새로운 의미를 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 당시에 그 체험이 가진 의미는 순전히 유럽의 합리적, 교리적 전통에서 그 것이 매우 진기하고 의심스럽게 여겨진 데만 있지 않다. 그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성, 실재성이 생생하게 체험된 사실에 있다. 그 때에 경험된 하나님은 삶에서 지친 사람들이 추구하는 피안의 종교의 하나님과는 달리 살아 있는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그의 나라도 개개인의 영혼이나 먼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삶 속에서, 바로 이 땅 위의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 속에서 찾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블룸하르트에게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현실성, 삶의 전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체험은 블룸하르트 부자(父子)로 하여금 그 시대의 경건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체험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경건한 인간을 넘어서서 이 세상 안에서 어둠의 세력과 싸우는 하나님의 용사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바로 이러한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하고 있다:

투쟁의 승리는 이러한 상황의 완전한 청산을 의미한다: 예수는 승리자다. 이 돌파는 경건주의의 한 복판에 있던 블룸하르트에게서 완전히 비경건주의적인 발견과 깨달음이었다. 예수와 인간의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예수와 인간이 처해 있는 어둠의 실재세력이야말로 이 투쟁에서 그가 경험했던 대립이었다.

자우터도 이 점을 적절히 평가하고 있다:

'예수는 승리자다!'라는 문장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블룸하르트는 그의 경건주의적 주변세계와 분명히 구분된다. 비록 블룸하르트는 죄지은 개개인의 회심이라는 사상도 확고히 붙들긴 했지만, 이것은 더 이상 일차적이며 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보편적 현실성에 종속되었으며, 양자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서방의 그리스도교의 궤도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구조적으로 '하나님과 영혼'의 문제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 블룸하르트는 또한 이로부터도 벗어났다.블룸하르트는 일차적으로 우주적인 파멸의 세력을 주목하는 '동방교회'의 관점에 관해 적절히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블룸하르트의 활동이 단지 좁은 테두리 내의 축귀운동, 회개운동으로 그치지 않았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에게서와 같이 그의 사고와 활동, 선포와 목회의 중심이었고, 이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을 새롭게 하는 보편적이고도 포괄적인 희망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다시금 힘있는 역사적 과정, 운동으로 나타났고, 만물의 갱신으로 끝나고야 말 승리로운 투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블룸하르트는 루터처럼 "내가 어떻게 하여야 은혜스러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고, "어떻게 하여야 신음하는 피조물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종국적인 구원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에게서 다른 모든 질문은 이 질문에 종속되어 있거나 포함되어 있을지언정,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하고 더 크고 더 긴박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항상 그의 설교와 존재의 중심이 되었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종교나 교의, 영혼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였다. 뫼틀링엔의 체험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큰 빛의 한 줄기일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나라이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기원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서 낮은 가치와 작은 중요성 밖에 갖지 않는다.

블룸하르트는 1880년 2월 25일에 아들에게 "나는 너에게 승리를 축복한다"고 말한 후에 조용히 영면했다. 그의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장례식에 참여한 조객 앞에서 "예수는 승리자다"라는 내용의 말을 전하고, "예수는 모든 원수를 무찔러 승리하는 승리의 임금"이라는, 부친이 승리의 싸움 가운데 지은 찬송가를 부르게 했다. 이로써 아들도 아버지가 승리롭게 싸운 싸움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셈이 되었다.

(2)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의 생애와 사상

아버지의 하나님의 나라의 운동은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조수 혹은 동역자로 그리고 결국엔 아버지의 목회사역을 물려받은 아들 블룸하르트는 고트리빈 일가의 치유사건의 와중에서 태어났다(1842년 6월 1일).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찬양하며 암흑의 세력과 싸우는 현장의 한복판에서 자라났고, 13살부터는 부친의 설교를 항상 필기하기까지 부친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우라하, 튀빙엔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받은 후, 슈페크, 게른스바하, 듀르나우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다가, 69년에 부친이 사역하던 받볼로 되돌아왔다. 그때부터 죽기까지 그의 활동은 신학적 모토(구호)에 따라 대체로 4시기로 구분되어 설명될 수 있다: 1기; 예수는 승리자다(아버지의 계승자), 2기; 죽어라, 그리해야 예수가 산다(기독교적 육과의 싸움), 3기; 너희 인간들은 하나님의 것이다(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사회참여), 4기;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온다(말기).

1. 예수는 승리자다(1869-1685년)

블룸하르트는 사람들로부터 아버지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오히려 자기가 그러한 사람이 될 수 있었음을 기뻐했다. 이러한 큰 기쁨 속에서 그는 10년 동안 부친 밑에서 장사진을 이루는 사람들을 상담하며 치유사역을 행하였다. 그에게서도 여러 차례 병치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치유가 하나님의 나라의 표징에 불과하며 인간에게 궁극적 구원을 알려 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신만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기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오해 때문에 그는 괴로워했다. 1기는 대체로 아버지의 충실한 계승자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의 샘에서 복음의 생수를 퍼내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선교사로 자임했다. 그도 역시 아버지처럼 살아 활동하는 하나님, 승리의 예수에 대한 확신을 견고히 붙들고 나아갔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도 하나님의 나라를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의 도래 이래로 지상의 나라를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뒤흔들면서 궁극적인 승리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요, 인간은 이것에 대해 다만 방관자로 있지 않고, 싸움에 소집되고 징발당한다. 다만 그의 경우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나라의 긴장이 아버지의 경우에서보다 한층 더 증폭되고 첨예화되었으며, 인간의 소집과 징발도 더 절박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그는 기존교회의 현실을 냉혹히 비판했다. 그의 부친은 교회와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고, 교회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그 반면에 그는 비록 일평생 목사로 불리긴 했지만,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섰다. 그는 강한 내면적 투쟁을 거친 후에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 필연적으로 진보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의 강요 아래서 교회의 모든 외형적 형식을 돌파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흘러가고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진리의 운동 대신에 경직된 것을 대체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항상 인간의 제도, 이론, 체계, 상징을 내세우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능력이요 현실이다. 그는 예수의 메시지가 교회사를 경과하면서 지나치게 적응되고 자명한 것이 되었으며 협소화되고 축소되었다고 느꼈다. 그리스도교는 점점 인간사회의 고통과 대결할 힘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그는 복음의 원초적 음성을 추구했으며, 온갖 그물로 얽혀 있는 교회와 세계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직접성을 간구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상징체계와 제도화의 너머에서 그리고 그 위에서 '직접적인'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블룸하르트의 강한 교회비판은 처음부터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진보를 위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자로서의 교회를 향한 비판이고 교회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외침이지, 교회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기 위한 비판은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로 하여금 참된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그의 눈 앞에서 그 당시의 교회는 하나님의 동맹자가 아니라 개인적 축복이나 위로를 추구하는 경건주의적 교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블룸하르트는 하나님의 나라의 진전을 방해하는 기독교적인 육(肉)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지상의 반신적 세력과의 싸움이 그의 부친에게서는 본질적으로 수직적인 차원에 더 강조점을 두었던 반면에, 아들에게서는 수직적 차원에 뿌리를 두면서도 점차로 더 강하게 수평적인 차원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2. 죽어라, 그리해야 예수가 산다(1886-1895년)

치유자, 하나님의 나라의 설교자 그리고 목회자로서 널리 명성을 얻게된 블룸하르트는 점차로 교회의 죄, 기독교적 이기심, 기독교적인 육(肉)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가 참으로 우리들 가운데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한층 더 나쁜 하나님의 나라의 적을 발견하고 이와 싸우기 시작했다:

모든 기독교적인 육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 기독교적인 육은 늦기 전에 죽이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을 죽여 버린다... 지금 나는 주님이 우리들 곁에서 육으로 발생한 것을 죽이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이고 계신 것을 기뻐하면서-그렇다, 기쁨을 가지고 보고 있다. 그것은 그 자신이 좀 더 영적으로 나타나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밑바탕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것이 죽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개입하시기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 먼저 드릴 것은 드리고, 육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그리스도의 피 속에 바치자.특히 육적인 기반 위에 영적인 것으로서 생긴 일체를.

뫼틀링엔에서 일어난 승리는 주 예수의 승리이지 인간의 승리가 아니며, 오히려 거기서 알게 된 사실은 인간의 무력함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싸움으로부터 인간적인 영웅주의 같은 것이 생겨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때때로 그것이 아버지 블룸하르트에게 주어진 특별한 종교적인 힘에 의한 것으로 오해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종교적 재능이 주목받고 존경받음으로써, 거기에 기독교적인 육이 발생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육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진전을 방해하는 요인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악령적인 것보다 인간 그 자체가 적이다. 특히 인간적인 이기주의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크게 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위대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맺는 나의 관계'(경건주의)가 아니라 '나와 맺는 하나님의 관계'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곤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곤궁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고난이 아니라 현존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계획, 인간의 야망,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예수의 대의(大義)이다. 중요한 것은 구세주가 우리의 종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종노릇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취하는 이기적 성향을 버리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기적 욕망과 만족을 위해 기적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봉사해야 한다. 그래서 블룸하르트의 초기의 목회구호 "예수는 승리자다"는 이제부터 "너희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로 바뀌었다. '영광의 신학'의 유혹을 뿌리치고 '십자가의 신학'을 강조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블룸하르트가 "죽어야 한다"고 강조했을 때, 무엇보다도 염두에 둔 것은 다름 아닌 교회였다. 죽어야 하고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먼저 교회였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육, 인간적인 이기주의가 하나님의 은혜의 그릇으로 지상에 놓여진 교회 안에서 그 위력과 무서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블룸하르트는 인간의 육을 제도화하려는 시도를 '종교'라고 부른다. 교회는 그러한 종교의 최고형태요, 따라서 그것은 항상 문제투성의 것이었다. 따라서 경건하면서도 악마적인 것으로서의 종교와 그러한 종교로서의 교회가 그의 신랄한 비판의 과녁이 되었다. 그가 문제삼은 것은 불경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경건하다고 자처하는 자였다. 경건한 인간은 회개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는 자기칭의(自己稱義)를 통해 이 세상의 교만 위에 또 하나의 종교적인 교만을 덧붙인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기반을 빼앗아 버린다. 그리고 종교화된 교회는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을 위한 유용한 백성이 되고 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 경건한 인간의 특별한 영역이 되고, 자기가 소유한 것을 자랑한다. 그러한 경우에 교회는 세속화되고 때로는 자신과 반대로 보이는 세속권력과 결탁한다. 그래서 블룸하르트는 교회를 향해서도 "죽어라, 그리해야 예수가 산다"라는 말을 던졌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본위의 교회체제를 배격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블룸하르트는 그러한 종교로서의 교회와는 다른 어떤 것을 진지하게 희구했다. 그의 부친과 마찬가지로 그가 구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 그의 나라와 그의 의였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는 단순히 하나하나의 인간의 영혼 속이나 먼 하늘에서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리고 일차적으로 인간의 삶 가운데서, 바로 이 지상의 인간의 실제생활 속에서 구하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만약 내가 늘 다만 천상적인 것만을 염두에 두고 지상적인 것에는 바른 자세를 가지고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나는 천상적인 것마저 잃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하라. 네 사명은 더욱 지상에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너무나 초지상적으로 생각하며, 인간의 상황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같이 생각한다. 그들은 장차 무언가가 하늘로부터 갑자기 일격과 같이 모든 것이 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때까지 종교적 의식만 계속하고, 생활은 지금까지 하던 대로 해 가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 여기가 우리들의 장소이다. 여기서 행복이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 것은 피안에서도 무(無)이다.

3. 너희 인간들은 하나님의 것이다(1896-1905년)

블룸하르트는 1896년 10월부터 다시 새로운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들어 오기 위한 열쇠요, 세상에서 진리를 구하는 우리들에게 도달하기 위한 열쇠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자는 세상에서도 생명을 본다. 그리고 생명은 인간의 빛이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이때부터 1905년 경까지 이르는 소위 3기 전체를 대표하는 그의 주요 사상기조이다. 그는 이제부터 특히 '육으로 오신 하나님'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이 되었다. 하나님은 육과 싸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 속에 있는 암흑과 싸우고 죄와 싸우고 그것에 대해 승리한다. 따라서 육을 입고 온 그리스도는 육 안에 있는 악마에 대한 최대의 적이요, 우리들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의의 대항이요, 죄에 대한 싸움이다. 그리고 예수는 인간의 가장 깊은 비참에까지 내려 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가 미치지 못하는 데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에게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그의 높음과 낮음의 결합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지면에 깔려 있는 곳, 사람들이 그들을 죄인과 비천한 자로 부르는 곳, 사람들이 그들을 밟고 넘어 가는 곳,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를 만날 수 있다. 예수의 수육(受肉)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창조물에 미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물을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은 진정 하나님의 것이다.

이 기간 동안에도 블룸하르트는 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2기의 비판이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종교, 종교가 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3기의 비판은 세속의 바다 한가운데서 종교적인 성스러운 작은 섬이 되려고 하는 교회의 존재양상에 대한 비판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들의 경건한 위선을 그만 두어라. 주 예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들은 다시 세상 가운데 산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외치고 계신 주님의 음성을 듣지 않는 것이다... 천지를 하늘로 바꾸려는 자는 도둑이요 살인자다. 땅이 우리들의 나라요, 여기에 우리들의 하나님은 계시고, 여기에 우리의 그리스도는 계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사셨다.

블룸하르트는 예수가 세상 한가운데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회의 벗이요, 전혀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사회를, 특히 가장 비참한 사람들을 꽉 붙들고 있다는 것도 강조했다. 이로써 그는 현실사회, 특히 인간의 거의 모든 삶의 차원을 지배하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관심도 간접적으로 표명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사회문제에 투신하기 직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그의 입장은 필연적으로 세상을 위해 투신하는 삶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사회문제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가 된 것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금지하는 '감옥법안'에 항의하는 집회에 아무런 고려도 없이,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이 참석한 일이었다. 그의 목회지 받볼 인근의 산업도시 괴핑엔(Göppingen)은 제2의 산업혁명의 단계에 들어간 자본주의 사회의 조류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사회의 제반 모순이 드러나고 노동자 계급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자 1999년에 황제 빌헬름 2세와 정부는 노동자의 단결과 사회주의를 진압하는 악법을 공포했고, 노동자들은 괴핑엔에서 항의집회를 열게 되었다. 그 자리에 참석한 블룸하르트는 이 법안이 정의에 대한 범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며칠 후에 사회민주당이 주최하는 모임에 초대받아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는 기회를 얻었는데, 그의 연설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연설을 했다:

대체 그리스도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낮은 곳에서이다. 그는 세리와 죄인의 한 패거리라고 불리웠다... 그것은 그가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 사이에 아무런 차별이 없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똑같이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러한 그리스도의 정신에 의한 생활이 나를 사회주의로 향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적 세계질서는 그리스도의 세계질서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생명을 빼앗지 않고 생명을 준다. 그는 혁명으로 피를 흘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질서를 요구한다.

이로 인하여 블룸하르트는 대중의 환호를 받았지만, 군주제의 독일에서 국가와 결합되어 있던 국가교회의 종무국의 권고에 의하여 목사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도적인 사회민주당원이 되었다. 그리고 1900년에 그는 뷔템베르크 지방의회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적 활동을 본격적으로 개시하게 되었다.

블룸하르트는 사회주의 운동 속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구원활동을 감지했다. 그는 이 운동 속에서 예수가 새롭게 출현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도 역시 정의와 진리, 사랑과 생명이 담겨져 있는 인간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은 심판을 알리는, 하늘로부터 번쩍이는 정의의 불과 같은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각도에서 블룸하르트는 기존교회를 비판했다. 교회는 예수가 가르쳤던 것과 정반대로 가르친다. 거짓된 종교적 사고, 경건을 가장한 바리새적 세력이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박았듯이, 현존하는 기독교는 복음과 대립,모순된다. 자기 자신의 영혼을 이기적으로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위대한 일과 대립된다. 자기의 평화만을 추구하고 기존적인 것에 매달리는 태도는 본래적인 복음의 세계변혁적 역동성과 대립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독교를 지배자들의 종교로 오도해 가는 것에 대항하여 싸우며 승리한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산업자본(맘몬주의)과 결탁하여 세계를 제패하고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6년 동안의 의회할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큰 길을 닦는 작업에 투신했다. 그는 무신론자들이 그들의 이념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곳에서도 그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심장 속에서 입으로만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 속에서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영과 진리가 있음을 때때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사회민주주의에 가담하여 그 도덕적이고 성실한 무신론에게까지도 큰 가치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주의적 희망을 연결시키려고 애썼다. 그는 협동조합과 같은 단체를 구성하여 농부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힘썼고, 왕에 대한 원내교섭단체의 충성서약, 화학비료에 의한 인공적 농업 등에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사회민주당의 한계도 발견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의 자리에 야만적 폭력의 정신, 고립된 다툼과 투쟁, 교조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체제, 만성적 혁명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회민주주의 안에 끊임없는 계급투쟁, 새로운 이기주의가 자리잡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그리고 그는 사회민주당의 밑바탕에 이 세상의 임금이 지배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당의 명예를 탐욕적으로 원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회민주당이 정치적 비인간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고, 받볼의 사역도 계속해야 했기에, 재선의 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을 탈당하고,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4. 하나님의 나라는 다가온다(1906-1919년)

4기는 1906년의 팔레스틴 여행 도중에 얻은 말라리아 병의 재발, 1910년의 이집트 여행 도중에 얻은 기후병의 악화, 1911년 여름의 심장발작 등 때문에 점차로 은둔 속으로 물러간 조용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생활과 발언의 과격함은 점차로 물러가고, 조용한 기다림의 자세가 전면에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향해 서두르던 그가 이제 이를 조용하게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 그것을 너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것은 항상 인간 의해서 접촉되지 못한 채 있다... 그것은 다만 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손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과거의 하나님의 나라 이해를 변경시킨 것은 아니다. 그는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곳에 있기 때문에, 인류의 땅 밑에서 거품이 일어난다. 그리고 모든 오물이 표면에까지 넘쳐나와 화산처럼 폭발하여, 지진이 마을과 주민 전체를 몇 분 사이에 파괴해 버린 2년 전의 멧시나와 같이, 여기저기서 가공할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한가운데 있다. 이 세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세상이여, 들어라. 너의 내부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심판을 통하여, 그러나 또한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목표했던 곳으로 인도하신다.

그리고 이 시기의 블룸하르트도 하나님의 나라의 진보(진전)를 위한 인간의 참여를 배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다고 인식하는 가운데서야말로 인간은 기쁨으로 그 진전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우리들 인간을 통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 능동적 인간이 되어야 하고, 더 의롭고 좋은 일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 전쟁도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자로서 나타나기 위한 기회에 불과하다. 전장에서는 대포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예수야말로 승리자다. 승리자 예수는 지극히고요하고 조용하게 세상을 통과한다. 인간의 역사에는 항상 하나님이 없는 것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의지와 지배는 일체를 꿰뚫고 진행하여, 최후에는 하나님의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고야 만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질 것이다.

1917년 10월에 그는 산책 도중에 갑자기 뇌졸증 발작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1918년 9월 설교 후의 저녁모임에서 이사야 49장 7-13절의 본문을 근거로 한 그의 설명은 그의 최후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우리들이 이 약속의 빛 가운데 걸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약속되어 있고, 항상 지상의 빛이 된다. 우리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잊어 버리시고 만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분은 여전히 우리들 곁에 계신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참되어서 우리들이 언제나 확신을 갖고 살도록 하신다. 모든 것은 그분의 지배에 복종한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2년 후 1919년 8월 2일에 찾아왔다. 그의 비석에는 그의 부친이 지은 찬송가 한 귀절이 새겨져 있다. "예수의 승리는 영원토록 변함이 없네. 온 세상은 모두 그분의 것일세." 이렇게 하여 아들 블룸하르트는 그의 부친 옆에 누워서 지금도 말없이, 그러나 우렁차게 하나님의 나라를 외치고 있다.


3. 맺는 말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 그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와 그의 부친의 생애와 사상을 대충 훑어 보았듯이, 그들에게는 오늘날 새롭다고 말하는 온갖 종류의 신학운동, 교회운동 및 사회운동이 거의 다 용해되어 있다. 경건주의 신학, 신유(치유,축귀)의 신학, 성령의 신학, 희망의 신학, 세속화 신학, 정치신학, 해방신학, 종교사회주의, 민중신학, 종말론적-묵시주의적 신학 등 현대신학의 모든 경향들이 그들의 신학과 활동 안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다. 해 아래서 새롭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새로운가?

그러나 그들이 의미있는 것은 단지 그들 속에 온갖 사상들이 용해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진 않다. 많은 말을 하고도 힘있는 말을 하나도 하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참으로 하나의 단순한 진리를 용기있게 말하지 못하여 횡설수설 많은 말을 늘어 놓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말들을 늘어 놓으면서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지만 진정 알아야 할 한 가지 진리를 놓치고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수없는 미사여구와 체계적인 사상을 펴 놓는다 하더라도, 한 가지도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모든 것들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참으로 블룸하르트 부자(父子), 특히 아들 블룸하르트는 많은 기적을 일으키고, 많은 인기를 누리고, 많은 활동을 했지만, 거기에 전혀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사적인 그 무엇, 특수하고 카리스마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 이를 통해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목회성공, 대교회, 출세, 섹트, 교파, 인기, 물질 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의 위대성과 영원한 의미는 바로 다름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무능, 달변과 침묵, 서두름(Eilen)과 기다림(Warten), 성공과 실패, 인기와 비난 이 모든 것들을 오직 하나,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철저히 가르치고 실천했던 것, '하나님의 나라의 희망'에 집중시키고, 이를 집요하게 파악하고 철저히 실행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경건한 인간의 내면성, 견고한 제도적 교회 안으로 감금당하고 때로는 저 먼 피안으로 추방당한 하나님의 현실성, 그의 나라의 역동성과 변혁성을 다시 되살려 주었다. 바로 이 점에 그의 독특성과 중요성이 있다.

오늘 날 우리는 그의 시대로 되돌아 갈 수 없고, 그의 활동을 그대로 반복할 수도 없다. 단지 우리가 그로부터 배울 것이 있다면, 우리의 모든 은사들과 자원들을 오직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시켜서 그의 사명,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러한 전망을 상실한 자는, 그가 아무리 교회적으로나 세속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블룸하르트의 길, 아니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벗어나서 자신의 나라를 건설하는 자가 될 것이다. 그것도 결국엔 하나님의 나라에 맞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