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팔복(2): 온유, 긍휼, 마음의 청결, 화평, 핍박받음

 

 

 

I. 온유함(마 5:5)

 

쉬트렉커에 따르면 마태는 21장 5절에서 구약의 스가랴 9장 9절을 인용하여 예수의 온유함을 표현한다(시온의 딸들에게 알려라. 네 임금이 너에게 오신다. 그는 겸손하시어 암나귀를 타시고 멍에 메는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또한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도 예수는 온유하고 겸손한 자로 묘사된다. 마태의 '온유'는 힘없는 자의 상태나 괴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운 뜻을 인정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새로운 율법을 성취하는 능동적 활동, 온유와 친절이라는 높은 목표에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것, 화나 잔인성 혹은 적대감이 아니라 자비에 의해 지배받는 행동을 촉구한다. 여기서 축복을 선언하는 예수는 역설적으로 일반적으로 세상적인 폭력이나 정치적·경제적 권력의 사용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 즉 땅의 상속을 약속한다. 그리고 여기서 마태는 약속된 땅, 이스라엘(창 15:7, 신 4: 38이나 미래의 시온의 나라에 관한 현실주의적 생각을 표현한 게 아니라 전승된 생각을 영성화했다. 즉 약속된 땅의 상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는, 볼 수 없고 처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의 참여를 표현한다.

슈바이쳐에 의하면 그리스 세계도 현자와 통치자의 온유(겸손)를 칭찬했으며, 플라톤(Platen)이 소크라테스(Socrates)에 관해 말했듯이, 온유는 진정한 신(신)과 가까움을 뜻한다. 필로(Philo), 요세프스(Josephus)등 그리스적인 교육을 받은 학자들도 이런 생각을 받아들였으며, 팔레스틴에도 랍비 힐렐(Hillel)의 겸손을 묘사하는 일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수에게서 이런 태도는 교만을 경계하는 철학자나 통치자의 지혜가 아니다. 예수의 언어에서 이 말은 '가난'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 말은 '작음', '비천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아마도 '힘없음'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다. 이 말은 연약함과 상관없다. 이 말은 마래(11:29, 21:5)와 베드로 전서(3:4)에 만나온다. 마태는 예수를 그러한 겸손의 모범자로 보았다. 그래서 마태의 심령의 가난함, 애통함,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항상 섬길 자세를 갖춘 힘없는 자가 모든 희망을 하나님 '에게 두는 것을 말한다.

슈바이쳐에 의하면 땅의 약속은 정치적 소원의 성취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갱신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피안적이기도 하는 세계를 말하거나(사 65:17, 66:22, 벧후 3:13), 천국으로 올려짐(에녹, 엘리야)을 말할 수도 있다. 이러한 두 생각은 서로 먼 게 아니라 나란히 있는 것이다. 또한 두 생각은 성서적 사고에서 중요한 내용을 포함한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미래는 자신의 창조를 부인하지 않고 의미있게 그 목표로 이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인간적 노력이나 역사적 과정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이다.

 

Ⅱ. 긍휼히 여김(마 5:7)

 

쉬트렉커는 자비를 베품, 긍휼히 여김은 신약성서에서 이곳 외에는 히브리서 2장 17절(하늘의 대제사장인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비함)에만 나온다고 지적하고, 이 축복선언은 유대인의 윤리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푼 자에게는 하늘의 하나님도 자비를 베푼다.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Schabb. 15 Ib).

자비의 요구는 초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확고한 윤리적 열정이었다. 세계의 심판자는 자비를 베푼 자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요구가 주어진다. 자비의 덕은 예수를 뒤따르는 자의 특징이다(마 25:31-46; 마지막 심판의 비유참조). 인간은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은 무한한 사랑의 요구를 실현시키는. 완전한 사랑의 특징이다(마 5:48). 그래서 마태는 자비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표현하고 있다.

자비의 요구는 누가복음 6장 36절 '평지 설교'와 마태복음 5장 48절(완전 요구)에도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야고보서 2장 13절(무자비한 사람은 무자비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에도 짧은 형태로 나온다. 이에 대해 슈바이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린다. 마태에게서 자비는 예수의 선포의 중심이고 율법의 성취이다(마 5:17-20). 자비는 바리새인들이 망각한 것이고(23:23), 자선 행위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누가복음 8장 36절은 모든 인간의 자비 행위는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나온다고 했는데, 이것은 바로 마태복음 18장 23절-34절의 악한 종의 비유에도 해당된다(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음! : 일백만 대 일의 비율).

 

Ⅲ. 마음이 청결함(마 5:8)

 

쉬트렉커에 의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 있다고 하는 것은 구약성서의 표현을 받아들인 것이다. 시편 24편 4절-5절: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거짓 맹세 아니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야훼께 복을 받고 하나님께 구원받은 사람이다.)과 시편 73장 1절(하나님은 참으로 이스라엘에게 어지시고,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축복하시거늘 ... )에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고 느끼는 경건한 자들이 언급된다. 마음은 히브리어에서 의지의 자리이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1장 5절에도 깨끗한 마음과 맑은 양심이 병행적으로 나타난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선한 양심을 가지고 악한 의도를 품지 않는 자이다.

그래서 쉬트렉커는 마음의 청결함을 마태의 언어로 옮겨본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의의 요구를 행하는 자이고, 이런 자는 하나님 앞' 에서 흠이 없고 죄가 없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깨끗함의 요구는 간접적으로 바리새인들의 의식적·외형적 태도에 맞서고 있다(마 23:25f - 잔과 접시의 겉만을 깨끗이 닦아 놓지만 속에는 악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음). 먼저 마음이 깨끗해야 겉도 깨끗할 수 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과는 반대로 예수의 요구는 내적인 태도와 외. 적인 태도간의 일치를 요구한다. 마태는 여기서 구약의 제의비판과 접목하고 있다(암 5:21-25). 마태는 한편으로는 구약의 유대적 표상을 수용하면서도 (제의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율법비판과 율법의 첨예화를 수정하면서 발전시킨다(마 9:13, 12:7-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이다. 마 15:20 - 마음에서 나오는 것(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히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다).

마태의 "하나님을 볼 것이다"의 약속은 구약에서는 제의적 표상이다(시 24:6 - 성전에 올라가는 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봄). 이러한 제의적 표상은 모세와 장로들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본 것을 보고하며, 특히 예언자들의 소명 환상에서 이를 보고하는 형태로 성서에 반영되어 있다. 그리스인들에게서 봄은 인식의 최상 형태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재한다. 이것이 마태의 의도 배후에도 있겠으나, 마태의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인식이나, 신비적, 탈아적 하나님의 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즉 종말에 일어나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인 하나님 만남)이라고 쉬트렉커는 해석하면서, 고린도전서 13장 12절의 말씀을 인용한다 :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 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슈바이쳐는 이 구절을 외형적 제의적 행위와는 반대로 마음의 깨끗함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할례'(삼상 15:22, 사 1:10-17, 렘 7:3-7)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단지 감정의 자리만이 아니라 가장 은밀한 것이고, 여기서부터 전 생활이 형성된다. 마태의 의도는 '순수한 마음'(롬 12:8)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에 있다. 이 마음은 여인과의 관계(마 5:28 - 간음하지 말라: 음란한 생각), 돈과의 관계(마 6:21f -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흑은 말과의 관계(마 5:37 -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만 하여라)에 적용되고, 외면적·제의적 정결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아이히홀츠는 '마음이 깨끗함'은 인간의 가장 은밀한 면까지, 전인간(존재와 의지)을 지배하는 깨끗함 (솔직, 정직함, 가면 '이중성·연극·속임수가 없음)을 말한다고 해석한다. 마태에게서는 약속(깨끗한 마음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적 행위임·)과 윤리적 명령(솔직, 정직, 분명, 단순함을 요구함)이 결합되어 있다.

 

Ⅳ. 화평케 함(마 5:9)

 

A) 화평/살롬

마태의 화평케 하라는 권고는 유대교 묵시록에도 비슷하게 나와있다. 슬라브의 에녹서는 화평케 하는 자, 혹은 평화를 지키는 자를 복된 자라고 축복한다 : "평화 가운데 행동하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을지어다. 평화를 파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지어다"(52:11f). 랍비 문헌은 평화에 기여하는 구약의 경건한 자들을 칭찬하고 있다(Sanhedr 6b: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사람들과 그 이웃들 간에 평화를 이룩하라). 샬롬(Shalom)은 구약의 인사에 속했고 앗수르와 시리아에서도 인사로 이용되었다. '평화'와 '화평케 함'의 생각은 구원 시대의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샬롬은 평화뿐만 아니라 구원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평화를 이룩하라는 계명은 원시교회의 권면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쉬트렉커는 생각하면서 마태복음 5장 23절-24절의 한 예를 제시한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재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화해, 화평케 함의 의무는 그리스도인의 중심적 계명이다. 그래서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 그리스도는 권고한다: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슈바이쳐는 샬롬은 구약에서 좋은 상태, 인간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상태를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단어라고 해석하면서, 신약에서 샬롬은 순수히 세상적으로 사용되거나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사되는 구원의 설명으로 사용된다고 설명한다.

라피데(P. Lapide)에 의해서 샬롬은 더욱 세분화되어 설명되어진다. 그에 의하면 샬롬은 세 차원의 전체성을 갖는다. 첫 번째로는 내면적인 것으로 마음의 일치(잠 3:17)를 말하며, 두 번째로 위를 향한 하나님과의 일치(사 6:4)이고, 마지막으로 모든 방향으로의 인간들의 일치(왕상 5:4)이다. 이러한 샬롬의 일치성은 히브리적 전체사고에 따라 몸과 영, 자연과 문화의 구분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종교적인 것의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래서 복지와 구원, 평안과 영혼의 안식, 행복과 사회적 조화는 서로 보충하는 요소들로서 하나의 동일한 샬롬의 측면들이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은 다 한 분인 창조주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는 하나의 유일한 세계질서들의 부분이기 때문에, 서로 나뉘어질 수 없다.

 

B) 하나님의 아들

쉬트렉커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의 표상은 다윗 왕조의 왕 이념과 관련되어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이스라엘의 왕은 야훼에 의해 아들로 입양된다(다시 말하면, 정당화된다). 유대교 지혜문서에서 의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칭해진다(지혜서 2:13, 18),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은 미래적·종말론적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렀고(막 14:36),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를 따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쳤으며, 이것은 기적이며 선물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은 마지막 심판 때에 인간에게 영생을 주는 선물이다(호 3:1 비교. 롬 9;26f의 인용). 마태복음 5장 9절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분명히 마지막 심판 때에 평화를 위해 일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기적을 의미한다(E. Schweizer).

 

V. 의, 인자를 인하여 핍박받음(마 5:10-11, 눅 5:22-23)

 

쉬트렉커는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초대 교회공동체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 마태 공동체는 '의' 때문에 이방 지역에서 이방 백성들에 의해 박해받는 상태에 처했기 때문에 마태는 법률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즉 10장 17절은 회당의 박해를 반영하고 있지만 - 회당에서 매질당함- 18절-19절은 예수 때문에 총독과 왕에게 끌려가 재판 받고, 이방인들 앞에서 조언해야하는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이유 때문에 (즉 나를 인하여) 일어난다. 여기서 마태는 인자라는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것을 배제하지 않으므로, 교회의 주인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예수의 인격은 '의'와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의'는 마태가 특별히 선호하는 단어임). 예수는 '의의 길'을 가르친다(마 21:32). 예수의 등장은 '의'의 특징을 갖고 있기에, 박해의 원인은 예수의 인격에 속해 있다는 것 뿐 아니라 의의 태도이기도 하다. '의를 인하여', '나를 인하여'는 동일한 뜻을 지향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에 의해 부름받은 교회는 바로 의의 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누가 공동체의 상황에 주목하면, 박해는 회당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회당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하고 멀리하며(회당 밖으로 쫓아냄), 욕하고 이방인처럼 버렸다(교회와 회당 간의 논쟁의 초기문서에 나타남).

구약의 예언자들의 생각에 의하면 종말의 구원의 때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다(요엘 2:21). 마태는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고 전한다(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탄생과 함께 동터온 메시야 시대의 기쁨). 누가는 초대 교회의 모임이 종말론적 기쁨에 가득 차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는 장면으로 보고한다.

마태에게서 보상은 하늘의, 저 세상의 보상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러한 보상 사상은 유대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이중 보상을 가르쳤다. 즉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 속의 보호를 선포한 것이다. 지혜 문학은 세계 내의 보상을 가르치고 있는데, 신약에서도 권면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유대묵시문학에서는 특히 하늘의 미래적 보상이 묘사되며, 마지막 심판 때 경건한 자들은 영생을 받는다. 랍비 신학에서는 토라(율법)준수는 업적에 상응한 보답을 받고, 내세의 보상은 지상생활 동안의 인간의 업적에 상응한다고 여겨졌다.

구약성서에는 엘리야(왕상 19), 예레미야(렘 37:11ff)에게 주어진 고난이 언급되어 있다. 구약 성서와 유대 전승은 신명기 신학에서 형성된 예언자들의 가혹한 운명의 표상에 접목하여 예언자들의 박해와 죽음에 관해 폭넓게 이야기를 전해준다. 마태복음 23장 29절 이하의 내용(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였지만 무덤을 단장하고, 자신들이라면 예언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학자들, 바리새인들을 예수가 공격하는 것)도 이 전승을 전제하고 있다.

교회의 구성원인 예수를 뒤따르는 모든 교인들도 이제 예언자들의 운명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예언자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고 있다면,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임무, 사명을 성취해야 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