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는 어떻게 거듭났는가?

     (자서전적인 고백)

  

나는 3대째 골수(骨髓) 성결교인이다. 그러므로 나의 신앙의 뿌리를 캐기 위해서는 조상 적의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가문에서 신앙의 물길은 두 할머님으로부터 발원하여 부모님을 거쳐 나에게 합류한다. 친할머님은 우리 집보다 생활이 조금 나은 차남의 집에 주로 기거하셨지만, 종종 장남이신 나의 부친의 집에도 기거하실 때가 많았다. 어떤 경로로, 언제, 왜 그분이 기독교인이 되셨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지만, 우리 가문에서 최초로 전도를 받아 교회당에 다니기 시작하셨던 분이다. 그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성경을 즐겨 읽으셨는데, 나이가 드실수록 신기하게도 오히려 눈이 더 밝아져서 작은 글씨체의 성경책을 수많이 통독하셨다. 그 덕분에 그분은 교회에서 연중 실시하는 성경다독대회(聖經多讀大會)에서 늘 우승하셨다.

그분은 성경 읽기만이 아니라 기도에도 참으로 열심이셨다. 그분은 모든 친척의 이름을 순서대로 암기하시며 복을 비는 기도를 반복하셨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친척의 이름을 외울 수 있게 되었고, 그 이름 속에 내가 속해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였다. 빠짐없이 자식, 손자, 손녀의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며, 80세가 가까워도 쇠잔해지지 않는 그분의 기억력은 신기하였다.

외할머님도 가히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셨다. 외할아버님의 냉대와 오랜 별거 생활 속에서도 그분은 시골 마을에 친히 작은 교회를 세우시고 돌보실 정도로 신앙의 열정이 남달리 뜨거우셨던 분이다. 노후에 자식을 따라 도시로 나오신 후로도 그분은 골방에서 하루 종일 성경 읽기와 기도에 열중하셨고, 내가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집까지 친히 찾아 오셔서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무척 좋아 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다. 그분은 때묻은 동전을 모두 털어 주시며 성경책을 사보라고 부탁하셨는데, 이 돈으로 구입한 신구약 성경은 지금도 내 책상 앞에 마치 할머님처럼 조용히 앉아 있다.

두 할머님의 신앙이 이랬던 고로, 자연히 나의 부모님은 이런 독실한 신앙을 물려 받으셨다. 나의 아버님은 남자인 탓에 어머님처럼 기도를 그리 열심히 올리시진 않았지만, 교회 출석은 꼬박꼬박 하신다. 하지만 90세가 가까우신 지금은 새벽마다 교회당을 찾거나 잠자리에서 일어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성격이 워낙 덤덤하셨던 탓에 남달리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시지는 않지만, 가족이 모일 때마다 종종 가정 예배를 인도하시는 그분은 지금도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을 즐겨 부르신다. 그래서 나도 어렵거나 힘들 때마다 이 찬송을 즐겨 부르며 크게 위로를 받는다. 나의 어머님은 외할머님의 신앙 성격을 본받은 탓에 자식을 위해 기도를 즐겨 하시며, 교회 출석에도 열심이시다.

이처럼 2대를 이어가며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은 나는 자연히 교회 생활에 친숙하였고, 또 교회의 프로그램이 즐겁기까지 하였다. 나는 아버님의 성격을 물려받은 남아로서 기도에는 그리 열심인 편이 되지 못하였으나 찬양은 무척 좋아하였으며, 교회 출석과 행사를 빼먹은 적도 거의 없다. 성격도 온순하고 착하다는 평가를 듣던 나는 남이 비난을 살 만한 행동을 한 적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회개 설교를 듣고도 심각한 죄의식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순간적인 회심의 체험이나 감격도 없다. 목사고시 때에 나를 면접하셨던 어느 목사님이 "중생한 날짜를 정확히 아느냐?"고 물으시기에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린 아기가 분명히 태어나는 시간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그 시간을 알려 주지 않으면 아기로서는 전혀 알 도리가 없듯이, 모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나도 분명히 중생의 순간은 있었겠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는 한, 그 날짜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은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나는 죄로부터 회심함으로써 급격하게 기독교인이 되진 않았다. 나는 신앙적 확신으로 가득 찬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 자라났으며, 자랄수록 신앙적 확신이 점점 더 깊어지는 그리스도인이었다.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인 틸리히(P. Tillich)는 신앙의 실존적 차원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하나는 죄책감으로부터의 구원, 즉 죄용서의 체험이고, 또 하나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즉 영생의 확신이며, 또 다른 하나는 무의미로부터의 구원, 즉 의미있는 삶이다. 어린이 시절 동안 이 세 가지 중에서 특히 내게 의미를 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의미있는 삶이었을 것이다. 교회는 그 어떤 곳보다 의미있고 즐거운 곳이었다. 다시 말하면, 자아 정체감의 확인과 유익한 교회 프로그램, 좋은 친구들과의 사귐 등은 나를 교회에 든든히 동여맨 밧줄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린 시절에 나의 신앙은 남다를 것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학생회의 지도적인 임원으로서 학교 선생님의 뺨을 맞아가면서도 학교 생활이나 공부보다는 교회 활동에 더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던 것 외에는, 그리고 문학 소년으로서 시와 소설, 일기를 즐겨 쓰고 신앙적인 책을 즐겨 읽었다는 사실 외에는 그리 남다를 것은 없으리라.

다소 습관적이고 피상적이었던 나의 신앙 생활에 첫 위기가 온 것은 대학입학을 위해 일년 동안 재수하던 기간이었다. 교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아리따운 여학생이 대학입시를 며칠 앞두고 연탄가스를 마시고 돌연히 세상을 떠난 사건이 일어났다. 채 피어나기도 전에 꽃다운 나이로 떨어진 그녀의 죽음은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라나던 나의 존재를 크게 흔들어 놓은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그녀의 주검을 묻고 난 후, 나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나의 가능성 때문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었다. 내게도 언젠가는 반드시 닥쳐올 돌연한 죽음에 대한 냉철한 의식은 대학입시와 출세의 희망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었다. 무의 위협, 죽음으로 내던져진 존재, 삶의 종점으로서의 죽음과 같은 엄숙한 주제는 나를 무서운 불안과 공포로 몰아갔고, 하루하루의 삶이 마치 기적처럼 생각되었다. 만약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런 고민 때문에 나는 학원이나 공부방보다는 어언 덧 부흥회를 즐겨 찾았다. 그러던 중에 나는 어느 날의 새벽 부흥 집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초인적인 순교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설교하던 신현균 목사님의 목소리에 완전히 압도되고 말았다. 죽음을 죽음으로 이겨낸 한 거인의 삶이 나의 죽음 의식을 압도하였던 것이다. 그의 신앙에, 아니 기독교 신앙에 죽음을 이기는 진정한 희망이 숨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당시로서 이 희망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완전히 파악할 도리가 없었지만, 부산의 용두산(龍頭山) 공원의 벤치에 앉아 바다 위로 떠오르던 눈부신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명상에 잠기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을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하여 그 날은 입신양명(立身揚名)과 가계(家計)를 위해 일류 대학을 가려던 나의 꿈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고 결심한 날이 되었다.

이리하여 나는 그 당시에는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에 자리잡고 있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서울신학대학의 문을 두드렸다. 온갖 신앙 형태와 다양한 출신 배경의 급우들 틈에서 나는 낯선 신학을 열심히 배웠으며, 예배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특히 음악을 좋아한 나는 뜨거운 찬양을 즐겨 불렀으며, 부활절 음악제마다 찬양대원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예배에 비해 강의는 나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미흡하였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주된 이유는 교수진의 부족과 지나친 주입식 강의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강의는 불타는 호기심과 왕성한 지식욕에 가득한 나를 충분히 만족시켜 주진 못하였던 것 같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나는 나름대로 독서에 몰두하였다. 그 당시에 내가 즐겨 읽었던 책은 주로 철학과 심리학, 문학 등에 관한 책이었지만, 빌리 그래함, 백스터, 워치만 니 등이 쓴 신앙서적에 관한 책들을 통해서 영적인 욕구도 채울 수 있었다. 신학적인 책으로는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파울 틸리히의 책이 많은 자극과 도움을 주었다. 특히 이성적인 회의에 흔들릴 때마다 의심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필수적인 동지라는 그의 주장은 '존재를 위한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틈틈이 영어와 독일어, 라틴어도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조종남 교수(학장)님의 강의를 통해 소개받은 존 웨슬리(J. Wesley)의 신학은 지금까지도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비록 매우 짧은 기간에 마치 스쳐가듯 배웠지만,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과 창조적 종합의 정신, 성서와 전통과 경험과 이성을 잘 조화시키려는 신학 방법론(사변형)은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방향으로 신학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그리고 조직신학 강의를 해주셨던 정진경 교수(현 신촌교회 원로목사)님의 신학은 전통적인 특색과 보편적인 특색을 폭넓게 수용하고 조화롭게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 신학의 형성을 위한 바람직한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사고의 패러다임을 뒤흔든 도전은 또 다시 바깥에서부터 왔다. 1970년대는 철권 군사 독재자 박정희의 정권연장의 야욕이 한껏 부풀려 나오면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민들과 큰 충돌을 빚던 시기였다. 긴급조치(緊扱措置), 위수령(衛戍令), 계엄령(戒嚴令)이 연이어 발표되었고, 유신헌법(維新憲法)의 발효에 이어 명동성당의 구국민주선언(救國民主宣言),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이 여기저기서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런 와중에서 인혁당(人革黨)의 간첩 조작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조속하게 처형되고, 민청련(民靑聯)에 가담한 학생 주동자들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에게 이런 사건들은 결코 강 너머의 불일 수가 없었다. 단지 서울신대학교의 옛 캠퍼스가 서울 도심의 한복판에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민청련의 주도적인 인물 중에 하나였다가 사형 언도를 받은 세 사람 중에서 김병곤(金炳坤)은 부산고등학교의 동기 동창생인데다가, 사형 언도를 받자 말자 "영광입니다"라는 말을 내뱉은 자로서 유명해진 인물이다. 그는 다행히 사형은 면하였지만, 결국에는 고난의 상처가 암으로 발전하여 아깝게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당시에 나는 그를 비롯하여 나머지 주동자들이 곧바로 처형될 줄로 생각했다. 그만큼 시국은 급박했고, 독재자는 조급했던 것이다. 같은 젊은이로서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던 나의 분노와 애통은 극에 달했고, 고민도 날로 커져만 갔다. 이제는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남의 죽음, 특히 불의에 항거한 의로운 자의 죽음의 문제가 투명하게 의식되었다.

사실 예수님의 죽음도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은가? 역사의 변화는 어떻게 오는 것이며, 역사의 희망은 기독교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불의에 저항하고 희망을 앞당기려다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간 자들의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구원만을 위해서 돌아가셨는가? 왜 오늘의 한국교회는 그의 죽음의 열매만을 따먹기를 좋아하고, 죽음에 이른 그의 삶을 따르려고 진지하게 노력하지는 않는가? 이것은 신학의 문제인가, 아니면 한국 교회의 문제인가? 오늘 우리의 구원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교회와 대학은 여전히 잠잠하였다. 아니 그럴수록 나의 시선을 더욱 더 내면적인 경건으로만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 누구를 원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나의 고민에 대한 시원한 해답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역사와 관련된 서적들을 골라 읽었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의 '역사 안의 구원'(Salvation in History)과 함석헌(咸錫憲)의 '뜻으로 본 한국 역사'도 그 중에 하나였다. 그러나 이 시절에 답답한 나의 생각의 지평을 크게 확장시켜 주고 절실했던 고민들을 풀어 준 것은 몰트만(J. Moltmann)의 '희망의 신학'이었다. 이 책은 역사의 본질과 목표, 역사 변혁의 힘과 교회의 역사적 사명을 가장 탁월하게 밝혀준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이 책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기 위해 올해 다시 번역하였다. 연세연합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에는 읽었던 그의 책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류의 고난의 본질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고난과 인간의 고난을 연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몰트만을 스승으로 삼아 박사학위를 얻기 위해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 중단했던 독일어 공부를 다시 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실존'과 더불어 '역사'는 나의 사고의 중요한 패러다임이 되었다. 독일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후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라는 제목을 붙여 저술한 세 종류의 나의 책들(하나님 나라와 이데올로기, 하나님 나라의 윤리, 하나님 나라의 지평 안에 있는 신학과 교회)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관심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도 구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 활동은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 아니 역사로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이리하여 나는 사회참여도 별로 해 보지 못한 부끄러운 몸으로서 사회변혁과 역사참여의 전도사가 된 것이다. 역사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자는 역사로부터 혹독한 대가를 치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서도 제외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와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도덕적인 비성숙과 심리적인 자폐증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구원은 결코 인간의 공로로부터, 혹은 세상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적인 삶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구원은 의미가 없으며, 역사적인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초역사적인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개인의 실존을 희생한 역사적 실존은 없지만, 역사적 실존이 없는 개인의 실존도 없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하지만 현대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현대인의 삶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자연'과 '환경'에 대한 관심도 서서히 일어났다. 점점 더 심각해지는 지구의 온난화 현상과 엘니뇨 현상, 점점 더 커지는 오존 구멍과 점점 더 녹아 내리는 빙하, 체르노빌 핵발전소의 폭발과 그에 따른 엄청난 재앙, 낙동강의 페놀 유출사건을 비롯한 심각한 환경 파괴는 자연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서서히 깨우기 시작했다.

이제 나의 사고를 뒤흔들기 시작한 것은 개인의 실존이나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환경' 혹은 '자연'의 문제다. 지구는 아직도 희망을 지니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너무 늦지 않았는가? 신학과 교회는 여전히 내세나 세계의 묵시적인 심판만을 선포해야 하는가? 이 지구 공동체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지구의 생명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런 고민이 나를 서서히 사로잡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과 샤르댕(T. de Chardin)의 '진화론적 신학'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특히 나의 스승인 몰트만의  '창조(세계) 안에 계신 하나님'(생태학적 창조론)은 나의 사고에 많은 자극과 동기를 주고 있다. 이리하여 나의 신학적 지평은 이제 자연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자연'에 대한 나의 분명한 신학적 입장은 '어린이 신학'의 저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어린이야말로 얼마나 자연과 가까운 존재이며, 낙원의 희망은 얼마나 자연과의 평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신학'은 단순히 어린이의 해방과 인간의 해방만을 바라보는 기획이 아니었다. 비록 미리 기획한 것도 아니었고 예상한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 어린이 신학은 자연의 해방, 아니 자연과의 화해로 이어지는 다리까지 놓은 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 신학'은 주로 어린이의 해방과 인간의 해방을 위한 신학적 패러다임의 변화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자연의 해방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였다. 애초에 나는 '어린이 신학'의 속편으로 죄론과 회심론, 유아세례, 교회론 등을 다룰까 생각하였지만, 이 일은 차후로 미루기로 하였다. 이제 나는 '자연'을 신학의 주제로 더 깊이 받아들여 나의 신학적 패러다임을 보완하려고 한다. 즉 실존에서 역사로, 그리고 역사에서 자연으로 나아감으로써, 나의 사고의 피라미드를 완성하고 싶은 것이다. 비록 진정한 의미에서 이것도 작은 출발에 불과하지만, 이제 나는 개인적 실존과 역사적 실존, 자연적 실존을 아우르는 온전한 신학을 추구하고 싶다.

이제부터 나는 온 피조물의 구원을 바라본다. 나는 구원받기를 바라는 온 피조물 속에서 구원받기를 바라는 또 하나의 작은 피조물이요, 온 피조물과 더불어 완전한 안식과 평화를 갈구하는 동료 피조물이다. 실로 하나님도 온 피조물 안에서 안식하실 곳을 찾고 계시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로 늦기 전에 이 집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또 어설픈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은 남의 소리만을 앵무새처럼 되받아 지껄일까 봐, 두렵고도 무겁다. 한번 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면서, 초라한 행색(行色)으로나마 서둘러 이 길을 떠나려고 한다. 긴 방랑 끝에 힘겹게 정착한 집에 머물지 않고 또 다시 길을 떠나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과 목표가 되시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식은 감히 정류소이길 자처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그네를 싣고 가는 마차에 불과하다. 지식은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거친 길을 떠난다. 완전히 안식할 소망의 땅을 찾기까지. 주의 나라가 속히 임하옵소서! 아멘,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