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작은 것이 크다

(어린이 주일설교)

  

 

오늘은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그래서 어린이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복음에 비추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린이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바로 작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6절은 어린이를 소자(小子), 즉 작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작은 것은 작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무시당하고 버림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 큰 것만을 미친 듯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세계 제일의 것, 세계 최대의 것, 세계 최고의 것만을 숭배합니다.

현대인들은 일류, 일등을 열렬히 추구합니다. "일등만이 살 길이다", "일류만이 살아 남는다", "최고가 되라, 이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이러한 살벌한 구호들은 바로 현대인들이 얼마나 큰 것만을 좋아하고 작은 것을 싫어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론 이런 구호들은 오늘날의 국제적인 무한경쟁 사회에서 매력과 설득력을 풍기고 있습니다. "더 잘해 보자"는 격려와 같기도 합니다. "더 이상 남에게 설움을 당하지 말고 우리도 이제는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는 채찍의 소리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류주의, 물량주의, 팽창주의는 바로 현대인을 영원한 불행으로 몰아넣는 주범입니다. 만약 일등만이 살 자격이 있다고 한다면, 나머지는 다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까? 이런 구호 때문에 오늘날 얼마나 많은 어린 학생들이 입시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자살하기까지 합니까? 얼마나 많은 작은 기업들이 대기업의 횡포 아래서 무시를 당하고 도산을 당하고 있습니까? 만약 일류만이 제일이라고 한다면, 이류, 삼류는 열등하고 불행하다는 말입니까? 이런 구호 때문에 오늘날 모든 분야에서 일류가 된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이류, 삼류들이 자신 만이 갖는 고유한 가치를 팽기치고 남의 뒤를 쫓다가 좌절에 빠집니까?

만약 큰 것, 제일 큰 것만이 최고라고 한다면, 작은 것은 다 쓸모도 가치도 없다는 말입니까? 이런 구호 때문에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작은 것들이 버림받고 있습니까? 우리 나라만 해도 매년 약 5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부모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합니다. 유괴를 당하고 착취당하고 해외에 입양되는 어린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전쟁이 지난 지 어언 5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이 마당에 우리 나라는 아직도 세계 최대의 어린이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도 세계 최대의 것이라고 자랑해야 옳겠습니까? 큰 것, 제일 큰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이것은 사람을 잡아먹는 악독한 귀신이 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송두리째 잡아먹는 귀신입니다. 참으로 섬뜩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이렇게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크게 되라, 제일이 되라, 최고가 되라"고 하시면서 결코 무턱대고 무한경쟁을 부추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고, 꼴찌가 먼저 된다. 크게 되려는 자는 작게 되고, 작게 되려는 자는 크게 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작은 것의 소중함을 인정하시고, 작은 자들의 편에 서 주시며, 소외된 자들을 먼저 찾아가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에 따라서 작은 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작은 것이 큽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천국에서 누가 큰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면 서로 큰 자가 되겠다고 싸우다가,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어서 예수님께 나아와 해답을 요구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까이 있는 한 어린이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 자가 천국에서 큰 자다"(마 18: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논리로 말하면 큰 자는 어디까지나 큰 자이지만, 천국의 논리로 말하면 작은 자야말로 바로 큰 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자는 먼저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지 되지 아니하면... "(18:3).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5:17)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 돌이킴이란 바로 어린아이로의 돌이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으로의 돌이킴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은 세상의 수학으로 풀 것이 아니라 천국의 약속으로 믿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과 함께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라는 말씀이 제게는 오랫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천국이라는 말을 죽음 후의 천당이라는 말로 풀면, 조금 쉽게 풀립니다. 온유한 자는 죽어서 하나님의 땅, 천당에 간다는 말로 풀면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죽음 후에만 천국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천국은 지금 회개하고 믿는 자들에게 가까이 온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후에서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소유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온유한 자는 지금 여기서 이 세상에서 이미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을 결코 영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축복은 결코 정신적인 것만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힘없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서 땅을 크게 차지한 자는 대개가 힘센 자들, 부자들, 꽤가 많은 자들, 한 마디로 말해서 큰 자들입니다. 힘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 머리가 부족한 자들은 오늘 날 항상 변두리에 밀려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불가능한 이야기, 거짓말을 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장 현실적인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저는 이 말씀을 다 이해했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날 개미를 골똘히 쳐다보다가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개미는 지구상에서 비교적 아주 작은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개미들은 신기하게도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 날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문명 때문에 개미가 우리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는 듯하지만, 흙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콘크리트 벽 사이에도 개미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으로는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개미보다 더 많이 살아 있는 동물은 없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지구상에 출현한 가장 큰 동물이었던 공룡들은 지금 다 어디 갔습니까? 오직 화석만 남아 있고, 쥬라기 공원 등과 같은 영화를 통해서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온 지구를 누비고 다녔던 그 큰 몸집의 공룡들은 지구의 기후변화 때문에 졸지에 멸망하고 말았지만, 그 작고 순한 개미들은 지금도 땅 속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큰 공룡은 바로 그 큰 몸집 때문에 멸종했지만, 작은 개미는 바로 그 작은 몸집 때문에 땅 속 깊이 들어가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정말 더 큰 자입니까? 최후에 이기는 자가 승자요, 마지막에 웃는 자가 이기는 자인 것입니다.

정말 이 지구상에는 천하를 주름잡을 듯이 포악하게 뛰놀던 강대국들은 지금 다 사라지고 이름만 남기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그 큰 로마제국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러나 온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지구상에서 제일 큰 단체로 남아 있습니다. 바벨론과 이집트의 영광은 다 어디 있으며, 알렉산더, 징기스칸, 히틀러의 제국은 다 어디 갔습니까? 지금은 저 큰 러시아 연방도 해체 중에 있으며, 미국도 지금처럼 교만하게 군림한다면, 언젠가는 지도에서 사라지리라고 저는 감히 예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크다고 우쭐대는 자는 다 작아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작아지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세우실 것입니다.

이 교훈을 우리는 어린이 주일에 배워야 합니다. 교만은 멸망의 선봉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더하십니다. 소자, 어린이를 작다고 멸시하는 자는 천국에서 버림받을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은 곧 예수님에게 행한 것이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지 않은 것은 곧 예수님에게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마 25:1-46의 마지막 심판의 비유).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는 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소자를 실족케 하는 자와 그런 세상에게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18:6-7).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문화, 즉 교통문화, 교육문화, 생활문화는 얼마나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고 있습니까? 교통사고로 다치고 죽는 어린이들, 학교수업이 파하자마자 학원으로 내몰리는 어린 학생들, 어른들의 잘못 때문에 온갖 사고로 죽음을 당하는 어린이들을 보십시오! 심지어 오늘과 같이 음란한 세대에서 어린이들은 성추행과 성폭력의 대상으로 전락되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린아이들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지 않고, 얼마나 자주 꼬마 취급, 들러리 취급을 받습니까?

천국에서는 참으로 이런 어린아이들이 꼬마 천사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찬양의 노래와 경배를 올릴 것임을 우리는 얼마나 잊고 삽니까? 시편(13)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 하오며 ... 실로 내가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에 젖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무고하게 뱃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의 대가를 하나님이 어른들에게 찾으실 것이고, 그들의 피를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입니다. 뱃속의 말없는 태아를 망설이지 않고 죽이는 어른들이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 있는 자들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연약한 어린이들을 돌보지 않는 어른들이 어떻게 힘없는 자들, 병든 자들, 늙은 자들, 장애자들을 돌볼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작고 힘없는 어린이들이 천국에서는 큰 자들임을 확신하고, 그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멸시받고 버림받는 소자들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은 작은 것 안에서 시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에서 볼 때, 작은 것이 크다는 법칙만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것은 작은 것 안에서 시작한다는 법칙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믿을 수 있는 가장 큰 세계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크고 놀랍고 부요하고 기쁜 곳인지를 우리는 이루 다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에 걸려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가장 큰 소망이요, 가장 고귀한 보배요, 가장 영원한 기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이 세상 가운데 깊이 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별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귀한 보배가 땅 속에 묻혀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를 발견할 수 있는 자의 눈에 이미 이 세상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이전의 조상들이 보고자 하였으나 보지 못했던 것, 듣고자 했으나 듣지 못했던 것, 만지고자 하였으나 만지지 못했던 것, 그래서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던 것 바로 그것을 지금 여기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의 것이라는 위대한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위대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위대한 보배, 영원한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는 아주 작은 것, 너무나 미미한 것 안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겨자씨의 비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다 자란 후에는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입니다(마 13:31-32). 요즘 우리는 성지순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가져 온 겨자씨를 보고서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콧바람만 불어도 손바닥에서 날려갈 것만 같이 작은 씨앗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도 처음에는 이처럼 작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때가 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볼 수 있고 거기서 큰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커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큰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 작은 것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오직 믿음을 가진 자만이 이 나라의 작은 시작을 믿고 그 큰 완성을 바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작은 어린이, 소자는 바로 우리가 업신여겨도 좋을 하찮은 것이 결코 아니라 위대한 소망의 씨앗이기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가꾸고 키워야 할 위대한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아니 우리 어른들도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18:3).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를 가질 때에만, 모든 그리스도들은 구원을 향해 늘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벧전 2장 2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오직 작은 일에 충실할 때에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임무를 주시고, 우리도 그 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미래는 어린이에게 달려 있고, 어린이의 미래는 어린 시절 적의 조건에 달려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성격과 지능만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는 바로 어린아이에게 달려 있고,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바로 어린아이의 운명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어른들은 어린아이의 일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아이를 얼마나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까? 옛적에는 그래도 엄마가 가정을 지켜서 어린아이를 돌보았지만, 엄마들도 돈벌고 자기의 삶을 찾겠다고 집을 떠나가기 시작하는 오늘날에 어린아이들은 점차로 집안의 고아, 아니 이집 저집,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방황하는 유랑아가 되고 급기야는 부랑아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천대받는 자는 여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입니다. 돈이 가정의 따뜻함을 대신할 순 없으며, 학원이 가정교육을 도맡아 할 순 없는 법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더 많은 돈이나 장난감, 학원보다는 부모의 품, 부모와의 대화를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문명은 어린아이들을 가정에서 내몰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장래, 아니 인류의 장래, 아니 더욱이 하나님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세상의 법칙대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라"(롬 12:1)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재물이나 영광을 먼저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마 6:33).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고 있습니까? 참으로 지극히 작은 것, 소자, 어린이에게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전심을 다하여 이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마저 이 세상에서 영화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그의 나라를 맡기시겠습니까? 이방인들 마냥 이 세상의 것을 먼저 구하고 찾고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찾고 구하고 이를 위해 기도하시는 여러분, 마땅히 작은 것, 소자, 어린아이에게서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숨겨져 있다는 진리를 확신하고,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처럼 더욱 더 헌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