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자연친화적이고 어린이다운 삶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진정하게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당연히 자연친화적이고 어린이답게 살아야 한다. 이것만이 신음하는 이 땅을 되살리는 길이고, 장차 이 땅에 태어날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삶의 공간과 시간을 주는 길이다. 아니 이것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더 잘 본받는 길이고, 그래서 이 땅에 그분이 가르치시고 사셨던 그 하나님의 나라를 더 잘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자연친화적이고 어린이다운 삶의 태도, 삶의 형태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

 

1) 존재를 지향하는 삶

일찍이 에릭 프롬(E. Fromm)이 강조하였듯이, 먼저 우리는 소유(Habe)를 지향하는 삶이 아니라 존재(Being)를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계 만물은 아무런 공적도 없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거저 지어졌다. 이 세계의 창조는 오로지 창조 만물과 사귐을 나누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발로일 뿐이지, 하나님 안에서도 그 어떤 내적인 강요가 없었다. 이 세계가 미리 하나님에게 그 무엇을 주었다가 되돌려 받지 않았다는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그것 때문에 유지되고 갱신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세계를 은혜 위에, 자비 위에, 감사 위에, 찬양 위에 세워야 한다. 은혜를 공적으로 조작하거나, 공적 위에 은혜를 세우는 일은 다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망치고 거역하는 일이다.

어린이만큼 자신의 존재와 타자가 순수한 선물임을 느끼는 존재는 없다. 어린이는 자신을 우리 어른에게 주어진 선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어른을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로 여긴다. 어린이이기를 그만두는 사람은 그때부터 자신이 짊어질 과제만을 본다. 이는 우리의 자기 의식, 남보다 더 우월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구, 더 많은 업적을 쌓으려는 우리의 명예욕과 일치한다.

오늘 우리의 어린이와 가정, 사회와 자연을 망가뜨리는 주범은 바로 은혜를 전혀 기억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어른들, 은혜보다 공적을 더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같은 어른들, 아니 자신의 우월함을 한껏 뽐내고 싶어하는 유치한 어른들의 지나친 경쟁주의, 소유주의, 업적주의, 성장주의, 팽창주의 때문이다. 이런 제국주의적 삶의 형태는 아주 잠시 동안만, 아주 큰 자들만 기쁘게 해주었지, 결국에는 자신과 남을 망치는 불행으로 끝났다. 이 땅을 온통 휩쓸고 다니며 이 땅의 것이 다 자기 것인 양 한없이 먹어 치우려던 큰 동물, 이 땅에서 가장 비대해졌던 공룡들은 잠시 동안만 이 땅을 지배하고는 희미한 종적만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고 커지려던 바벨탑 문명은 잠시 동안만 그 위엄을 자랑하고는, 곧 바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땅을 온통 다 장악하려던 영화롭던 옛 제국들, 바벨론과 로마, 히틀러의 제국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끝없이 성장, 팽창하려는 국가, 사회 혹은 개인은 결국 자신을 망치고 세계를 망친다. 이런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세계다. 이런 세계에는 모든 존재가 그 고유한 삶을 누리는 평화로운 세상도 없거니와, 더욱이 상대적으로 연약한 나라, 연약한 여성, 연약한 어린이, 연약한 자연을 위한 공간이 있을 수가 없다. 이런 세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어린이가 어린이일 가능성은 점점 더 적어지거니와, 어른이 어린이와 같아질 가능성도 점점 더 적어진다.

어린이와 같이 되려고 하고 자연을 형제, 자매로 느끼는 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비극, 아니 불행한 죄악은 존재의 가장 큰 기반인 은혜와 사랑을 망각하고, 이 세상을 거래 계산서와 흥정물로 가득 채우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귀한 것은 다 공짜로 주어졌다.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우리의 자녀도 그렇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염려조차 어머니처럼 자비로우신 하늘의 아버지, 아빠에게 맡기라고 분부하셨다.

이에 비해 우리가 성취한 것은 그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우리가 우리의 존재, 생명, 자녀를 만들 수 있었는가? 이 세계는 우리가 힘겹게 쟁취하거나 이룩한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은혜로 거저 얻은 것들이 아닌가? 실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즉 영생과 기쁨과 평화가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조차도 우리가 성취할 그 무엇은 아니다. 그것은 기도의 대상일 뿐이다. 그리고 기도조차도 우리가 성취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이다. 고로 우리는 이 선사됨을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것만이 자연과 어린이, 아니 온 인류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이다.

 

2) 검소한 삶

소유나 성장보다 존재와 은혜 위에 삶을 세우려는 자는 자연히 소박하고 검소한 삶, 단순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물질이 너무 적어도 그렇지만, 물질이 너무 많아도 우리는 지금의 삶이 은혜로 인한 삶, 선물로 주어진 삶, 고마운 삶임을 망각하기가 쉽다. 자신의 삶이 많은 사람들의 봉사와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인 줄로 착각하며 홀로 교만해지기 쉽다. 이런 삶은 참으로 부유한 중에서도 가난한 삶이다. 너무 많이 소유하려는 자는 너무 많이 소유하기도 어렵지만, 설령 그렇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그는 영원히 불행하기 쉽고, 또 부패하기도 쉽다. 그는 늘 자신을 착취하고, 자녀들을 착취하며, 이웃과 자연을 착취한다. 아니 그는 은혜를 착취하고 고갈시킨다. 소유와 업적이 사라질 때, 자신과 남의 존재 의의와 생명 가치도 사라진다.

고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그리고 예수님은 뒤따랐던 수많은 진실한 제자들처럼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 아끼고 나누고 바꾸고 다시 쓰는 지혜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자연친화적이고 재생이 가능한 물건, 에너지를 덜 소비하는 물건을 골라 써야 한다. 자연과 환경, 이웃 생명들을 아끼기 위해서라면, 다소간의 불편을 감수하여야 한다. 청빈(淸貧)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청부(淸富)도 그리 권장할 일이 못된다. 못 사는 이웃, 지구촌 사람들을 위해서 제한된 자원을 골고루 나눠 써야 한다. 그리 하자면, 이젠 모두가 가난한 삶을 살려고 결단함으로써, 모두가 부유해지는 길을 택해야 한다.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차 극히 소수의 부자와 대다수의 빈자(貧者)가 극도로 양극화되어 가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노라면, 이러다가는 부자도 빈자도 다 망할 세상이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우려가 앞선다. 이런 불의한 구조가 빈자에 의해 혁명적으로 뒤집어지지 않더라도, 아마도 자연이 먼저 뒤집어질 것이다. 아니 자연이 인간 세상을 뒤집고 말 것이다. 하나뿐인 지구 생명, 한번뿐인 인간 생명을 아끼며 사랑하는 방법은 이젠 절약하며 검소하게 사는 길 밖에 없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과 소금, 누룩이 되려면,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삶으로 만족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삶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지(標識)가 될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는 모두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이는 작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고, 또 감사할 줄도 안다. 어른들의 바쁜 삶, 염려로 가득 찬 삶 한가운데서 어린이는 꿈에 잠겨 자기의 작은 노래를 부르며, 한 가락의 멜로디를 흥얼거리고 삶을 찬미한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축적하지 않는다. 그는 그때그때 새로 받은 것을 먹고산다. 그는 미래의 양식을 위해 염려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