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온전한 영성에 이르는 길

 

 어떻게 하여야 우리가 온전한 영성에 이를 수 있는가? 케리 토마스(K. Thomas)에 의하면 인간의 영적인 기질에 따라 다음과 같은 9가지 방식으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1. 예배에 참석하거나 안식일을 준수하고 성례에 참여하는 전통적 방식, 2. 사명감과 갖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과 친밀감을 느끼는 방식, 3.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방식, 4. 지성으로 하나님을 찾는 방식, 5. 봉사를 통해 하나님과 친근함을 느끼는 방식, 6.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방식, 7. 불의에 저항하거나 사회참여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는 방식, 8.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방식, 9. 뜨거운 예배를 통해 영성을 강화하는 방식.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J. B. Smith), 린다 그레이빌(R. Graybill)에 의하면 영성은 다음과 같은 6가지 삶을 통해 실현된다. 1. 묵상 혹은 기도로 충만한 삶, 2. 성결 혹은 덕스러운 삶, 3. 카리스마 혹은 성령의 능력이 주어지는 삶, 4. 사회정의 혹은 동정심의 삶, 5. 복음 혹은 말씀 중심의 삶, 6. 성육신 혹은 성례전적인 삶.

영성에 대한 이와 같이 포괄적인 입장은 한편으로는 수평적(육적, 세상적, 현실적)인 삶을 경시하는 헬라주의적 이원론을 배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과 감성 혹은 내면성에만 치우치는 편협한 시야도 교정한다. 온전한 영성은 삶의 모든 영역과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며, 삶의 모든 차원을 포괄한다. 즉 내적인 삶만이 아니라 사회적, 우주적인 삶을 긍정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이웃 인간과의 관계, 더 나아가 자연과의 관계까지 포괄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는 이 모든 분야를 나열하기보다는 성서 본문을 중심으로 어린이 신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 4가지 방식(성서 읽기, 기도, 찬양, 섬김)만을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디트리히 본회퍼(D. Bonhoeffer)가 나치 시절에 독일 고백교회가 세운 핑켈발데 신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신도의 공동생활'(Gemeinsames Leben)이 추천하는 영적인 훈련의 방법(성서 읽기, 찬양, 기도, 섬김, 죄의 고백과 성만찬 등)과 대체로 일치한다.

  

1) 성서 읽기

갓난 아이들과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

요한처럼 베드로도 역시 출생의 은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태어남'(벧전 1:23)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요한과 달리 베드로는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고,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젖의 은유'를 사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갓난 아기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향해 꾸준히 성장하기를 촉구한다. 구원은 마지막 순간의 구출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 가운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는, 그들이 이미 맛본 과정의 완성이다.

그리스도인이 계속 성장하는 필요한 것으로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성서를 대신할 만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길러도 메마르지 않는 성서의 풍성한 샘으로부터 영적인 허기를 채울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생명의 양식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 갓난 아기만큼 엄마의 젖을 간절히 사모하는 존재는 없다. 그리고 계속 자라야 할 아기에게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될 만족할 만한 상태는 없다. 돌아서면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기에게 엄마는 언제나 자신의 넉넉한 가슴을 열어준다. 이처럼 성서는 날마다 새롭고 넉넉하게 자신을 열어준다.

생활에 바쁜 사람은 성서가 너무 지루하고 길다고 생각하여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게으른 사람은 주일에만 성서의 두껑을 열어본다. 위선적인 사람은 피상적인 성서 지식을 가지고 성서를 다 알았다고 착각한다. 교만한 사람은 더 이상 성서를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그 대신에 세상이 속삭이는 거짓되고 일시적인 약속에 더 심취해 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면, 언제나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갓난 아기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엄마의 젖을 먹은 어린이는 금방 잠들지만,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잠에 빠진 아기에게 젖을 줄 때가 된 엄마가 아기를 흔들어 깨우면, 아기는 금방 깨어나 엄마 젖을 열심히 빨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저 "기도하라"고만 하시지 않고, "깨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권면은 "졸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만이 아니라, "깨어 있는 영혼으로 살아라"는 뜻도 지닌다고 생각된다. 깨어 있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상태와 주변 세상을 깊이 살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말씀은 우리의 잠든 영혼을 깨우고 흔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히 4: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거짓된 자아와 세계상은 산산이 깨어지고, 진리의 빛으로 투명해진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어나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영성에 대한 열성은 비뚤어진 영성으로 빠지기 쉽다.

     

2) 기도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11-13)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어린이를 기도하는 자의 진정한 모델로 삼으셨다. 어린이는 항상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린이는 항상 곤궁하고 위급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아니 어린이는 겸손하기 때문에 가장 자주, 가장 열렬히 부모님을 졸라대고,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아빠(엄마와 같은 아빠)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아니 하나님은 우리의 좋은 친구이시기 때문에 그분에 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만이 아니라 특권이기도 하다. 아니 슈바이처(E. Schweizer)가 말한 대로 기도마저도 우리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의 꾸중을 듣다가 뜻밖에 다시 엄마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린이의 자세로, 아니 어린이로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마더 데레사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합니까? 주님께 어린이처럼 가까이 가야 합니다. 어린이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많은 말들을 극히 단순한 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버릇없이 되거나 거짓말을 배우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다 제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는 '어린이와 같아짐'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너무  완벽하게 기도하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실패할 것입니다. 우리는 금방 낙담하고 기도를 포기해 버릴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에게 실패를 허락하시지만, 우리가 자포자기하는 것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어린이 같아지기를, 겸손해지기를, 기도 안에서 감사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의도만을 포함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의 뜻을 바꾸는 의도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꾸는" 것은 강청 기도의 본질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강청하는 과부'의 비유를 통해 간절하고 지속적인 기도의 필요성을 가르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돌린다는 것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한다거나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부린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은 이교도적인 것이다. 우리가 강청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기꺼이 감수하신 자유의 제한에 있다. 즉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행동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의 기도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바꾸실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선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뜻을 바꾸거나 돌릴 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응석받이처럼 보채는 우리의 욕심을 어쩔 수 없이 다 채워주신다는 뜻은 아니다. 정욕으로 기도한 것은 응답을 받지 못한다(약 4:3). 아니 하나님은 무응답으로 응답하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통로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어린이처럼 '아빠'라고 부르며 기도했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특권을 허락하신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자식을 위해 강청하는 불쌍한 과부 못지 않게 어린이도 부모에게 강하게 졸라대는 인간의 모범이다. 하지만 어린이는 부모의 뜻을 신뢰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줄도 아는 존재이다. 그는 집요하게 떼를 쓸 줄도 알지만, 순순히 물러설 줄도 안다. 그러므로 그는 기도의 모범이면서도 순종의 모범이다. 기도는 순종의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구한 것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    

    

3) 찬양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

예루살렘 성전을 청결케 하신 후에 예수님은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에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호산나"라고 외친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당신은 아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듣고 있소"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요"라고 고백하는 시편(8:2)을 인용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린이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다"(마 21:16)고 말씀하셨다.

인간 중에서 어린이만큼 즐거이 노래를 부르는 존재가 없다. 늘 새롭게 성장하는 어린이는 어른처럼 해묵은 노래만을 부르지 않고, 항상 새 노래로 찬양하기를 기뻐한다(시 98:1). 찬양은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그리고 단지 입으로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고백이다. 그리고 같은 말로 공동으로 부르는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본회퍼의 말대로 어른들은 종종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종종 자신을 찬양하거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혹은 음악에 영광을 돌리려는 유혹 속에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어린이는 마음에 우러나지 않는 노래는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과 몸, 생각과 행위가 분열되어 있지 않고 전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자신을 과시하거나 음악에 영광을 돌리려고 노래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리고 어린이는 부자연스러운 노래를 억지로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음색과 음정이 어떻든 개의하지 않고 목청을 높여, 진심으로, 그리고 동무들과 함께 즐거이 노래한다. 그는 감정과 생각을 가리거나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찬양할 때에도 우리는 가급적, 아니 절대적으로 순수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나님 앞에서 어른처럼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숨기고 가리고 체면을 부릴 까닭이 없다.

그리고 유럽의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찬송가를 단음으로 부른다. 왜냐하면 본회퍼에 말대로 단음으로 부르는 찬양은 음악을 즐긴다는 불순한 동기에 물들지 않고, 음악에 가사와 동등한 중요성을 주고 싶은 불순한 욕망에 물들지 않아서 순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르는 노래의 소박함은 어른보다는 어린이의 모습에 훨씬 더 가깝다.  

그리고 하나님은 웅장하고 아름다운 음악보다는 어린이처럼 순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순수한 찬양을 더 즐겨 받으신다. 하나님은 교회당의 지정된 시간(예배시간)과 지정된 공간(성가대석, 청중석)에서 드리는 찬양보다는 그 어디서나 항상 찬양하는 것을 더 기뻐 받으신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 앞에서, 거리에서, 아니 삶의 한 복판에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크게 노래한 어린이들의 찬양을 온전케 여기셨고, 기쁘게 받으셨다.    

 

4) 섬김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4).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마 9:35)

성서 읽기와 기도, 찬양은 물론 혼자로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가급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공동체와 더불어 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시 는 분(삼위일체 하나님)이시고, 그리스도는 바로 공동체(그리스도의 몸)로 존재하시며, 성령은 바로 공동체의 영(교회를 창설, 유지, 갱신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이다.  

섬김만은 결코 고독한 개인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성서 읽기와 기도, 찬양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이지만, 섬김은 이웃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라고만 생각하고 소홀히 여기기 쉽다. 심지어 이웃을 위한 봉사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부차적인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진정한 섬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성취되며, 하나님에게 드려진다. 그러므로 섬김은 이웃을 통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간접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웃을 위한 섬김은 하나님을 위한 섬김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으며, 마치 나무의 뿌리와 열매와 같다. 하나님은 이웃을 섬기는 행위 안에서도 임재하시며, 이를 통해서도 큰 영광을 받으신다. 아니 하나님은 이웃을 섬기는 일을 외면한 자들을 단호히 심판하신다. 그렇다면 강도를 만난 이웃을 도운 사마리아 사람은 제사를 핑계로 도움을 외면한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더 거룩한 산 제사를 하나님에게 드렸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 영적인 예배를 몸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롬 11:1).        

어린이는 대체로 어른에 의해 섬김을 받아야 할 연약한 존재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른이 아니라 바로 어린이를 섬김의 모델로 삼으신 것은 참으로 특이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도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어른처럼 너희도 어른을 섬겨라"고 가르쳤어야 한다. 하지만 유대인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전혀 하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어른들을 향해 "너희가 어린이와 같은 자가 되어라", "첫째가 되고자 하면 꼴찌가 되고,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고 가르치신 것은 참으로 파격적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섬김은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내려보면서 - 은근히 깔보면서 - 시혜를 베푸는 그런 값싼 행위가 아니라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이야말로 스스로 낮출 필요가 없을 만큼 가장 낮은 존재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어린이를 겸손과 겸비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으신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토마스 아 켐피스(T. a Campis)도 "그대가 모든 사람보다 작아지는 데까지 깊이 내려가지 않고서는 거룩하게 되는 일에서 일보의 전진이라도 했다고 믿지 말라."고 말했다.

우리는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섬길 가치가 있는 자만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섬길 가치가 없는 사람을 진정으로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가치가 사랑을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가치를 낳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중에서 가장 연약한 사람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은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이다. 더욱이 이제는 우리의 동료 피조물, 아니 우리의 형제와 자매(성 프랜시스)인 모든 생명체들을 돌보고 섬겨야 한다. 지금까지 말없이 우리를 섬겨온 자연을 이제 우리가 섬겨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 왜냐하면 피조물도 고통 중에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자녀의 출현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롬 8:22). 피조물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피조물은 인간이 출현하기 오래 전부터, 아니 설령 인간이 완전히 멸종된다고 하더라고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