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온전하게 되려면..."(마 19:16-26)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깨달음과 수행보다는 믿음과 행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와 달리 개신교회는 수련과 예전보다는 부흥과 성장을 선호한다. 그런 탓인지는 몰라도, 대개의 개신교인들은 온전한 구원을 향한 열망이 부족한 편이며, 비록 그러한 열망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를 잘 알지 못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초기의 단순한 부흥 운동을 넘어서 성경 공부와 제자 교육, 찬양과 기도, 선교와 봉사 등의 분야로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요즈음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영성, 영성"하고 외친다. 이로 인해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훨씬 더 성숙해졌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영성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설명 때문에 오히려 영성의 본질은 매우 흐려진 느낌도 없지 않으며, 더욱이 온전한 영성을 실현하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단계를 소개하는 이론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지금 신앙의 목표를 잃고 우왕좌왕하거나 유행을 따라서 살아가는 천박한 신자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물론 교회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위대한 영성의 지도자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영적인 순례의 길을 소개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다. 예컨대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von Avila)의 '영혼의 산'과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의 '일곱 층의 산'은 하나님의 신비를 발견해 가는 일곱 단계를 말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론들은 지나치게 내면적인 영성과 영혼의 영성을 강조하며, 보편적으로 실천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체험과 이론보다는 성서 본문을 통해 온전한 구원의 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비록 성서는 체계적인 이론서는 아니지만, 온전한 구원을 향한 유익한 지침을 제공한다. 특히 마태복음 19장 16-26절은 이를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나는 온전한 신앙에 이르는 세 가지 단계를 본다. 하지만 각 단계도 자신 속에 두 가지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신앙의 단계는 모두 여섯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1) 주술적 신앙  

첫째 단계는 '주술적 신앙의 단계'이다. 이 단계를 우리는 본문에서 직접 발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종교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신앙의 모습들을 광범위하게 발견할 수 있다. 주술적 신앙은 일반적으로 이기적이다. 즉 이런 신앙은 신앙의 대상에 대한 진지한 헌신보다는 재앙을 면하고 복을 받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주술적 신앙은 무조건적이다. 즉 자기의 자질과 자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신앙의 대상으로부터 무조건 복을 달라고 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건전한 윤리성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없다. 남이야 망하든 말든, 이웃의 어떤 형편이 어떠하든, 이런 신앙은 대개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번영에만 관심을 갖는다.

(1) 주술적 신앙의 첫째 단계에서는 헌신의 대상에 대한 믿음이 없거나 박약하다. 즉 그 신앙의 대상은 마치 복권과 같아서 동시에 여러 장을 사거나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대상이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직 거기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대상 자체는 아무런 비중도 갖지 못한다. 복을 얻고 나면, 그것으로 족하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요행을 바라는 '도박꾼'에 가깝다.

(2) 주술적 신앙의 둘째 단계는 종종 유일신을 섬기며, 그 앞에서 경건한 예배를 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비중은 여전히 자신의 번영과 성공에 있으며, 신의 뜻이나 요구에 있지 않다. 여기서 신은 여전히 소원성취의 수단이 될 따름이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종교인'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국의 모든 종교는 오직 이런 주술적 신앙과 강하게 결합함으로써 성장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결국에는 질적 성장의 발목이 잡히게 된 꼴이 되었으며, 많은 신자들은 여전히 저급한 원시적 형태의 종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성서의 하나님도 인간의 번영과 축복을 기원하시며,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지만 윤리성과 공동체성, 역사성을 지니지 못한 이런 신앙의 형태는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서서히 밀려났으며, 우상숭배의 형태로 변질되는 과정 속에서 예언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2) 윤리적 신앙

둘째 단계는 '윤리적 신앙의 단계'이다. 본문에 나오는 청년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무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주술적 신앙의 단계와는 달리 이 단계는 신의 율법 혹은 계명을 실천하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윤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 관계에서 상호적이고 보상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단계도 다시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가장 낮은 수준의 윤리적 신앙은 보상을 받는 데 일차적인 관심을 갖는다. 즉 그것은 "받기 위해 준다"(Do ut Des). 그것은 상호교환적 가치(Give and Take)를 중시한다. 내가 재앙을 면하기 위해 신에게 그 무엇을 바친다. 자신의 자격과 처지를 무시하고 무조건 복을 비는 주술적 신앙과 달리 이런 신앙은 복을 받게 위해 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일차적인 관심은 보상을 하는 신에게 있기보다는 보상 그 자체에 있다. 이웃 관계에서도 윤리는 계산적이다. 즉 내가 해를 입지 않기 위해 상대방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언 등). 혹은 내가 이득을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이익을 준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번영과 장수의 복을 누리기 위해 부모를 공경한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은 '윤리적 종교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즉 그는 아직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으며, 신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하고 있지 않다. 그는 계산에 따라서 윤리적인 행위를 결정한다.

(2) 진정한 윤리적 신앙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고, 보상에 대한 기대가 아니라 은혜를 기초로 삼는다. 즉 여기서 윤리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열매 혹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진지한 감사의 표현이다. 비록 외형적이고 계산적인 신앙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한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생명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이 없는 모조품과 같다. 이와 달리 진정한 윤리적 신앙은 생명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비록 더디더라도 생명의 알찬 열매를 맺는다. 그의 윤리적 행위는 보상에 대한 기대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은혜로부터 넘쳐나는 자연스러운 결과 혹은 은혜에 보답하려는 인간의 진지한 노력의 소산이다. 이 단계에 속한 사람을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온전한 신앙

셋째 단계는 '온전한 신앙의 단계'이다.  본문에 나오는 청년은 윤리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다. 물론 선한 행위에 대한 그의 진지한 관심은 영생에 대한 기대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19:16). 그리고 예수님도 계명 준수를 영생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9:17).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람은 율법의 행위로 인해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예수님의 희생의 죽음 전에는 사람들은 행위로 인해 구원을 얻었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본질과는 어긋난다. "구약성서는 율법을 가르치고 신약성서는 은혜를 가르친다"는 생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실로 구약성서도 은혜를 말하고 있으며, 신약성서도 계명을 가르친다. 물론 마태복음은 남달리 행위를 특별히 강조한다. 그리고 본문도 영생을 선행의 보상처럼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도 말한다(7:15-20). 그러므로 여기서 행위는 신앙에 기초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신앙은 좋은 선한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 마태복음은 '오직 신앙만으로'(Sola Fide)를 외치며 행위를 가볍게 여기는 교인들을 향해 윤리의 열매를 맺기를 강하게 촉구할 따름이지, 율법주의자들처럼 윤리적 행위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생은 구원의 출발점이지 그 종착점은 아니다. 선한 열매를 맺는 신앙을 통해 영생을 얻는 자도 아직 부족하다(19:20). 그가 온전하게 되려면(19:21), 윤리적 신앙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해야 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단계를 성화(聖化)의 단계라고 부른다. 여기서도 우리는 두 단계를 본다.

(1) 먼저 예수님은 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19:21)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우선 경제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삭개오처럼 "불의를 통해 축적한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는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웨슬리(J. Wesley)의 말대로 호주머니의 회개가 없는 마음만의 회개는 없다. 사회적 성결이 아닌 성결은 없다.

하지만 재물은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재물이 있는 곳에는 마음도 있다(마 6:21). 고로 재물에 마음에 걸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마음을 걸 수 없다. 재물을 땅에 쌓아두는 사람의 영혼은 온통 어둡다(6:22-23). 고로 그의 마음은 탐욕과 불신앙으로 가득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6:24). 고로 섬김을 받는 재물은 바로 우상이다.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을 강하게 지배하는 우상을 물리치기를 원하셨다. 즉 온전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의 우상을 비워야 한다는 말이다. 비단 재물만이 아니라 명예, 권력, 국가, 가족, 사랑, 사상 등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이런 것들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마귀의 달콤함 유혹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을 열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한다. 무조건 자신의 복을 비는 주술적 신앙과 보상의 조건을 따지는 윤리적 신앙과는 달리 이러한 신앙은 다시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조건 자신을 비운다. 이기적 욕망을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는다. 모든 염려를 무조건 주님에게 맡긴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구하고, 오직 이를 위해서만 염려한다. 어떤 결과가 따르더라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추구한다.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영성의 거인(巨人)'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모든 신자들도 자신을 비워야 한다.

(2) 재물의 비움을 역설하신 예수님은 이제 "나를 따르라"고 명하신다. 불교만큼 비움을 강조하는 종교도 없을 것이다. 채움, 즉 집착과 욕망은 고통의 원인이다. 아니 이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 공(空)과 무(無)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모든 것을 비워야만 해탈할 수 있다. 심지어 비우려는 욕망마저도 비워야 하며, 부처를 만나면 부처도 죽여야 한다. 그래서 불교는 '텅빈 충만'을 가르친다.

하지만 '텅빈 충만'은 역설이다. 공(空)은 공(空)일 따름이고, 무(無)는 무(無)일 따름이다.  물론 채움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기독교와 달리 무한한 비움을 강조하는 불교로부터 우리는 겸허하게 배워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비워진 자리를 그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저 무한히 비워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성령 충만을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지배할 것을 요구한다. 오직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만이 살아 계실 것을 요구한다.

"나를 따르라"는 것은 곧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삶을 의미한다. 자신을 비운 사람은 이제 그분의 소명으로 채워야 한다. 온전한 삶은 예수님의 삶을 따르는 것에 있고, 온전한 성화는 예수님을 본받는 것에 있다. 이것은 곧 십자가의 길이다. 이 길에는 성공과 번영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아니 이 세상 속에서 제자의 길은 대개 핍박과 고난으로 점철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자기 몸에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을 지닌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명(Berufung)을 직업(Beruf)으로 삼는 길인데, 이것은 일평생 소명에 헌신하는 사람(교역자)이 걷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직업을 소명으로 삼는 길인데, 이것은 세상의 직업을 통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실천하는 사람(평신도)의 길이다. 이 두 길 사이에는 아무런 질적인 차이도 없다. 모든 길이 하나님의 소명을 실천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온전하게 되려면, 자신을 비우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신앙의 목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