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성만찬적 공동체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이 땅에 가까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는 경건한 개개인을 부르고 변화시키려고 하는 데 일차적인 목적을 갖지 않는다. 그것이 지향하는 것은 이 나라를 받아들이고 섬기고 확장시킬 공동체적인 백성을 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고독한 유아독존(唯我獨尊)의 하나님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존재 양식에서나 이 땅을 향한 그 분의 뜻에서나 언제나 먼저 공동체를 지향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동체 하나님"(K. Barth)이시다. 하나님의 나라(통치)는 이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집단적인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찾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차적인 목적도 새로운 백성의 소집에 있었지, 뿔뿔이 흩어져 사는 경건하고 고독한 종교인의 양성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로 가시지 않았다. 예수님도 먼저 공동체를 원하셨다. 병들고 흩어진 옛 공동체를 대신할 대안적(代案的) 공동체, 세상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공동체, 세상과 마주보는 공동체, 즉 대안적(對岸的) 공동체(G. Lohfink)를 원하셨다.

바로 이런 목적 안에서 비로소 예수님은 이 나라를 대변할 개별적인 제자들도 부르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참다운 영성은 어디까지나 우선적으로 공동체적인 영성이고, 바로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개인적인 영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먼저 생각할 것은 공동체의 문제다. 공동체가 참다운 영적 공동체로 거듭나고, 참다운 공동체로 존속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성패(成敗)가 달려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에서 요구되는 참다운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가?

무릇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성장을 원한다. 하나님의 나라도 이 땅에서 겨자씨처럼 심겨져서 큰 나무처럼 성장하길 원한다. 그러므로 성장 그 자체를 무턱대고 죄악시하거나 혐오할 순 없다. 허무주의자가 아니 다음에야 그 누가 퇴영과 몰락을 찬양하겠는가? 자연적 생명체처럼 모든 공동체는 항상 성장을 추구해 왔고,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성장이며, 어느 한계까지의 성장인가? 성장을 위한 성장, 무한한 성장은 도대체 가능한 것이며, 또 의미가 있는 것인가? 제 아무리 크게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내실(內實)과 열매가 없는 성장, 빈 강정과 빈 껍데기와 같은 성장이라면, 이것이 과연 무슨 성장이겠는가? 예수님은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보다 차라리 한 송이 열매라도 맺는 포도나무를 더 기뻐하시지 않겠는가? 많은 물을 섞은 싱거운 한 통의 포도주보다는 차라리 한 방울의 진한 포도주를 더 원하시지 않겠는가?

더욱이 지구 생명체를 위태롭게 하는 성장, 아니 지구 생명체의 완전한 파멸을 초래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무한 성장 이데올로기 앞에서 이제 우리는 성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지속가능한 성장, 환경친화적인 성장, 정신과 문화가 더욱 풍요해지는 성장,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든 세대를 행복하게 하는 성장, 아니 먼 후세대까지 고려하는 성장으로의 질적인 변화를 겪어야 한다. 아니 비록 외형적, 양적인 성장이 더디더라도, 아니 이런 성장을 포기해서라도, 이제 우리는 인간다운 성장, 모든 존재가 더불어 사는 기쁨, 정신의 향상과 행복을 충만하게 맛보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너무나 많은 물질의 소유는 오히려 물질의 고마움, 삶의 소중함과 신비감을 잃어버리게 할뿐만 아니라, 물질을 우상화함으로써 물질과 자신, 이웃과 그리고 신앙의 소중함을 갉아먹고, 끝내는 이를 실종시켜 버린다. 그 끝은 억만장자(億萬長者)의 자살일 것이다. 정신적 충일감을 배제한 성장은 결국 허구적인 비실재로 남고 만다. 영적 충일감을 배제한 발전은 결국 모래 위에 세운 누각(樓閣)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을 생각하고 추구하기 전에 늘 이 성장이 질적인 것을 보장하는가를 먼저 가려야 한다. 그리고 성장이 공동체의 사귐 - 물론 개별 공동체 자체만의 배타적인 사귐이 아니라 타자를 향해 늘 열려 있는 사귐 - 을 늘 지향하고 보장하는가를 먼저 판단하여야 한다. 질적인 성장 위에서는 양적인 성장도 가능하고, 또 이런 성장은 늘 추구할 만하다. 하지만 질적인 성장을 담보하지 못하는 황폐한 양적인 성장을 바라느니, 차라리 정신적인 성장을 위해 양적인 성장을 포기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인간은 이제 물질적인 단계를 넘어선 정신적, 영적인 존재다. 물질만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은 동물 이하로 퇴행하는 타락 현상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동물을 업신여기거나 착취하자는 말은 분명히 아니다. 어느 면에서는 인간도 동물이다. 단지 인간이 단순한 동물적, 물질적인 단계를 벗어나 하나님과 교제하고 이 땅을 대리하는 뛰어난 정신적, 영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하는 이 고마운 은혜와 무거운 책무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몰트만도 지적하였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모든 피조물의 사귐을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성장만을 위한 성장, 자신의 안일과 자신의 성장만을 생각하는 성장, 다른 존재의 생존과 그 존재와의 사귐을 배제하는 이기적인 성장, 더욱이 창조주 하나님과의 사귐을 부정하는 물질주의적인 성장은 결국 인간 본질의 타락과 인간 문명의 황폐화, 인류 생존의 파멸과 영원한 심판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우선, 늘, 기필코 성장보다는 사귐을 중시해야 한다. 성장 위에 사귐을 건설할 것이 아니라, 사귐 위에, 이 사귐을 가능케 하는 성장을 건설해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참다운 영성은 이처럼 만물의 사귐을 지향하는, 충일하고 옴살스런(통전적인) 공동체적 영성이어야 한다. 성장(제일)주의에서 친밀한 사귐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처럼 친밀한 사귐으로 거듭난 공동체를 우리는 "성만찬적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성만찬은 작은 물질, 아니 생명의 질료인 빵과 포도주로써 하나님께 즐거이 감사하는 행위요, 작은 것도 독점하지 않고, 마치 작은 콩을 나누듯이 이웃과 함께 즐거이 나누는 행위요, 온 인류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작은 몸을 찢어 생명의 빵을 주시고 생명의 피를 흘려 생명의 음료로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기억하고 현실화하는 행위요, 온 피조물과의 사귐을 충만히 누릴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즐거워하는 희망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성만찬적 공동체를 창조하고 보존하고 갱신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서도,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풍성한 영성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