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창가에 앉아 있는 청년

(1991.I2.7, 신덕교회 청년회)

 사도행전 20:7-12

 

 

오늘날 청년이 교회 안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느냐? 아니 청년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비중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고 있느냐? 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설교를 시작하고자 한다.

청년의 시기는 과도기적 이행의 시기이다. 심리적·사회적으로 청년은 불안정한 변화 속에서 점차 자신의 위치를 굳히려는 단계를 밟는다. 청년은 이제 어린이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은 어른의 대접을 못 받고 있기 때문에 주체적으로는 방황하기 쉽고, 객관적으로는 뭔가 설익은 인상을 받는다. 그래서 청년의 위상은 대체로 변화, 실험, 변모, 불안정 등의 용어로 설명된다. 즉 청년은 가능태에 있기 때문에 기대와 우려가 엇갈린 대접을 받는다. 그는 아직 확고한 현실태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특히 교회 안에서 청년은 일꾼(교사, 성가대원 등)으로서는 마치 성숙한 어른처럼 인정받는 듯하지만, 주체적 활동인으로서는 뭔가 어설픈 입장에 처해 있다. 그는 책임적인 존재와 의존적인 존재, 두 모습을 동시에 갖는 역설적 존재이다. 만약 이런 모습이 긍정적인 긴장 속에서 건전한 방향으로 인도되면, 청년은 촉망받는 미래의 주역으로서 씩씩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이중적 모습이 부정적으로 반영되면, 청년의 모습은 교회 안에서 매우 우려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경우엔 청년의 잠재성은 미래의 비전으로 개화되지 않고, 쇠퇴하고 나락에 떨어지는 결과로 빠진다. 그의 모습은 마치 「드로아」에 있는 교회의 한 청년「유두고」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 유두고의 모습에 비춰 본 기독청년의 실상은 어떠한가?

 

1. 첫째, 오늘날 기독청년은 유두고처럼 교회의 창에 위치해 있다.

창은 교회 건물의 앞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다. 창은 항상 건물 외벽에 있다. 이처럼 청년은 교회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다. 왜 청년은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창에 앉아 있는가? 그는 교만한가? 바울과 같은 명설교가가 생생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그는 애써 귀기울여 듣지 않고 평가(아니 과소평가)하는 자세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그의 설교는 너무 보수적이고 고루하다고, 그의 설교는 너무 지루하고 따분하다고, 아니 그의 설교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고 청년이 스스로 교만스러이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가? 아니면 청년은 너무 무시당하고 있는가? 성인들 틈에서 감히 앞으로, 중간으로 끼어 들지 못하고 한갓 풋내기 정도로 소외당하고 있는가? 그래서 겨우 창틀 정도라도 앉아 있을 자격을 얻었는가? 아니면 청년은 너무 게으른가? 아니면 너무 바쁜가? 왜 그는 주변적 위치에 앉아 있는가? 왜 청년인 당신은 교회의 중심부로 이동하지 못하고 있는가? 당신 자신이 가장 정확한 답변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2. 둘째, 오늘날 기독청년은 유두고처럼 걸터앉아 있다.

그는 한 발을 교회 안에, 다른 한 발을 교회 밖에 걸쳐놓거나, 반 정도 몸을 교회에 내밀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그는 몸을 바깥쪽을 더 향해 있게 하고 머리만 돌려 강단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교회와 세상 양쪽에 다 위치하고 있다. 즉 그는 중간적 위치에 있다.

왜 그는 걸터앉아 있는가? 세상에도 적응해야 하고 교회를 떠날 수 없어서? 세상과 교회를 다 함께 사랑하니까? 교회를 사랑할 수도 미워할 수도 없어서? 그는 너무 영리한가? 아니면 우유부단한가? 아니면 너무 무기력한가? 그리스도인은 분명히 두 나라의 시민이다. 그는 두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그분께 예배 드려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즉 권력과 영광, 맘몬(재물의 신)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예배하는 것은 아닌가? 이 대답도 청년 당신이 가장 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3. 셋째, 오늘날 기독청년은 유두고처럼 졸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의 중심에서 밀려나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또 그래서 발을 교회와 세상 양쪽에 다 걸쳐 놓은 청년은 교회에 와도 졸기 마련이다. 즉 그는 수면하는 실상에 처해 있다. 오늘날 청년은 교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힘차게 뛰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이젠 교회 인습의 두꺼운 벽에 좌절해서 현상유지만 하자는 건가? 자신의 때가 올 때까지 몸  조심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를 깨워줄 훌륭한 지도자도 없고, 그를 북돋아줄 신선한 프로그램이 없어서? 아니면 스스로 할 일을 찾지 못해서? 이 이유도 청년인 당신이 스스로 캐낼 수 있다.

오늘날 기독청년은 유두고처럼 결국엔 졸다가 떨어져 버린 상태에 있고 거의 죽었다고 보여진다. 주변적, 중간적, 수면적 실상에 처한 청년은 결국엔 추락하고 말며, 살았다 하나 죽었다는 진단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아직 다 죽지 않았다. 유두고처럼 그는 밤새 사경을 헤매다가 소생할 기운을 차리고 있다. 아직도 그는 생명의 기운이 넘치기 때문일까? 아직도 하나님이 그에게 기대를 거시기 때문일까? 여하튼 청년은 깨어나고 있고, 또 깨어나야 한다. 자신의 내부에서 속삭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역사의 현장에서 부르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