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월을 아끼라

 (1991.12.28, 신덕교회 청년회)

 에베소서 5:15-21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지나온 날을 돌이켜 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반성하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때만큼 시간을 각별히 생각하는 때가 없을 것이다. 되돌아보니 이루어 놓은 일은 별로 없고, 그저 다람쥐 쳇바퀴돌듯 제 자리에서 발버둥친 것 같고, 흐뭇했던 일보다는 서운하고 아쉬웠던 일이 더 아련히 가슴에 저미어 오고, 언제 이렇게 한 해를 훌쩍 다 넘기게 되었나 생각하니 못내 지나온 날이 후회되고...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이럴 때일수록 세월을 소중히 아껴야 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내년 말에도 똑 같은 생각을 갖게 될지 모르겠고, 또 그 후에도 계속 그렇겠지만, 여하튼 이 시점이 주는 삶의 의미를 붙잡고 나가야 하겠다. 헨리 롱펠로우(H. W. Longfellow)가 읊은 대로 "저마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도록 행동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이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세월을 아껴야 하겠다. 특히 청년이 세월을 아껴야 할 이유를 세 가지로 말해 보려고 한다.

 

1. 세월은 너무나 빠르기 때문이다.  

롱펠로우는 「인생찬가」에서 다시금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의 주제곡도 인생의 빠름을 노래하고 있다.

 시편 저자는 아침 잎사귀 위에 잠깐 앉았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이슬, 아침 안개, 지나가는 그림자, 잠깐 동안의 수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베이는 풀에 빗대어 세월의 빠름을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년수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간."(시 90:S-10, 103; 15, 144:4). 그러므로 전도서 저자는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12:I-2)고 권면한다. 공동 번역은 "세월을 아끼라"는 개역 본문을 "여러분에게 주어진 기회를 잘 살리십시오"라고 번역한다. 세상사가 모두 불공평해도, 세월 앞에서 모든 인간은 공평하다. 그 누구도 시간을 임의로 늘리고 줄일 순 없다.

하루 24시간은 그 누구에게나 공평히 선사된다. 성서에서 시간의 뜻을 갖는 카이로스(Kairos)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희랍의 전설적인 동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동물은 하루에 새끼를 한 마리씩 낳아 이 새끼를 잡아먹고 산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하루하루 똑같은 세월을 받아 소비한다. 그렇지만 똑같은 시간이라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시간은 탕진될 수도 있고 최대한도로 선용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어진 기회를 잘 살려야 한다. 만사가 때가 있고, 하나님은 때를 정하신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롱펠로우가 말한 대로 "일어나 부지런히 일해 나가자. 어떠한 운명일지라도 저항할 의지를 지니고, 끊임없이 성취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일하고 기다리기를 힘써 배우자."

 

2.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 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 그리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측 없이 오고, 출생순서와는 다르게 불현듯 닥쳐온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고 항상 우리 주위를 배회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다. 스페인의 한 지주의 하인이 정원 일을 보다가 죽음의 신을 만나 깜짝 놀라서 리스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한다. 이를 궁금히 여기던 주인이 죽음의 신을 만나 "왜 나의 하인이 그처럼 놀라서 도망갔느냐?"고 물었더니, 죽음의 신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깜짝 놀란 것은 바로 나다. 오늘 내가 하인을 데려가기로 예정한 곳은 바로 리스본이었는데, 여기(마드리드)에 있는 걸 보고 내가 놀랐다." 이 이야기는 죽음의 숙명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20세기의 위대한 실존철학자 하이덱거(M. Heidegger)는 죽음에 대해 특히 예리하게 분석하였다. 그는 죽음의 근본성격을 다섯 가지로 설명했다. ① 사람은 다만 혼자서 죽는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 대신 죽어줄 수 없다. ② 죽음은 남에 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③ 우리는 죽음을 넘겨잡을 수 없다. 즉 죽음보다 앞설 수 없다. ④ 죽음은 가장 확실한 것이다. ⑤ 죽음은 언제 찾아올는지 모른다. 하이덱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죽음에 대한 각오로 바꿈으로써,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길 수 있고 죽음에서 자유 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죽음은 영생(부활)에 대한 신앙 속에서 극복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 해답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통하여 우리가 살았던 삶을 결실로서 마감 짓고,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향해 죽음 저 너머로 넘어간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확실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도, 가장 확실한 것은 죽음은 우리의 삶의 총결산이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분기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죽음에 이르는 존재」(하이덱거)의 문제는 죽음이 아니라 삶, 즉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실하고 영원한 삶은 바로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은 종말론적 신앙을 가져야 한다. 즉 죽음을 항상 냉철히 꿰뚫어 보고 살아야 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억압하거나 죽음을 의식 밖으로 내몬다고 해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오직 죽음 앞에서 고독하게 결단하며 사는 삶이야말로 하루하루를 소중히 아끼고, 영원을 위해 심으며, 영생을 준비하는 삶일 것이다.

 

3. 때(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시간은 몇시인가? 게오르그(Georg)가 말한 대로 지금은 24시가 다 차고 25시가 되었다. 25시는 새로 1시가 아니라 이미 24시가 다 끝난 이후의 절망과 어둠의 시간이다. 지금의 시대는 헬라 시대의 정의와 미도 몰락하고, 그리스도교의 사랑도 메말라 버린 시대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악한 시대에서 어리석은 자처럼 음란, 방탕하지 말고, 성령충만 가운데서 시와 찬미와 영가로 화답하며,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하면서 서로 섬기라고 권면한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보면서, 어떤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찬양하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외치지만, 이제 분명한 사실은 이제 지구 전반에서 더 많은 인간 착취, 자연 착취가 가속될 것이고, 자유의 이름 하에 엄청난 부정과 불의, 불평등과 구조만이 횡행할 것이며, 물질을 쫓는 인간성은 더욱더 황폐해지고 파괴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인간들은 황금 때문에 무슨 일이든 하고 있다. 참으로 악한 시대가 아닐 수 없다.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세월(시대)을 구원하라"(Redeem the time!)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다. 옛 시대에 옛 인간이 저질러 놓은 악을 물리치고 악한 시대를 구원할 자는 새 인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로운 시대의 청년은 이 악한 시대를 구원하라는 부름을 듣고 있다.

그러므로 청년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죽음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리라"(엡 5:14). 여러분은 새 시대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사는 빛의 자녀들이다. 빛의 자녀는 악과 불의와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 모든 선과 정의와 진실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빛의 자녀는 어둠의 행위를 폭로하고(잠수함 속의 토끼), 빛의 일을 행함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산다.

세월을 아끼라. 세월은 너무나 빠르다. 마지막 날은 아무도 모른다. 시대가 너무 악하다. 연말을 맞이하는 청년 여러분! "활동하라! 살아 있는 '현재'에 활동하라! 마음에는 심장이 있고, 머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위인들의 모든 생애가 말해 주고 있듯이, 우리도 장엄한 삶을 이룰 수 있고, 떠날 때에는 시간의 모래 위에 우리들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다"(롱펠로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