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남을 위한 존재

(1992.3.28, 신덕교회 청년회)

마태복음 20:20-23 

 

 

예수의 고난의 뜻을 묵상하고 이에 동참하기 위해 지켜져 내려오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우리는 "무엇이 예수를 골고다로 인도했는지, 왜 그는 고난을 당했는지, 그의 고난은 필연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연한 것인지, 그는 이 고난을 회피할 수도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고 고난을 스스로자초하고 감수했는지, 아니면 이 고난은 불가피했는지?" 이러한 질문을 먼저 던져 보기로 하자.

뭇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히 신학자들에게 가장 곤혹스럽고 난해한 문제의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옴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기적과 표징적 활동을 통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가져온 예수가 왜 무력하게 이 세상 나라의 무자비한 폭압의 희생물이 되었는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정도로 그렇게 아버지와의 가까움을 고백하고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 예수가 왜 그 아버지에 의해 버림받아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야 했는가? 결국 예수는 실패한 혁명가, 과대망상가 아니 정신착란자에 불과했는가? 아니면 후대의 교회가 그의 죽음을 미화하고 합리화해서 그를 종교적 순교자, 아니 종교적 구세주로 둔갑시켰는가? 그의 고난은 그의 삶의 좌절, 실패였고, 하나님의 나라 돌입의 암초였는가? 왜 그는 고난을 받아야 했는가?

우리는 여기서 성급하게 예수의 고난의 사회적 요인과 그 의미를 분석하지 말고, 하나님과 예수의 내적인 삶, 그분의 존재 양식 안에 어떻게 고난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은 일찌기 인간을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설명한 적이 있다: ① 함정을 만들어 놓고 남을 해쳐서 이득만을 누리는 거미형 인간, ② 열심히 일해 남의 것을 뺏지도 않고 남에게 주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것을 열심히 챙기며 사는 개미형 인간, ③ 열심히 일하여 자기가 필요한 것만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은 남에게 내어놓는 유익한 꿀벌형 인간.

그러나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이미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세 유형의 인간을 보여준 적이 있다: ① 으슥한 골목에 숨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해쳐서 그의 물건과 생명을 빼앗는 강도, ② 어려움을 당한 인간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전과 재물만을 염려하는 제사장, 레위인, ③ 자기 자신의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려움을 당한 인간을 보살피고 배려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 비유에서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칭찬하고 우리도 이와 같이 되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가 바리새인들과 같이 말로만 가르치고 행하지 않은 위선자가 아니었다면, 그가 언행일치를 몸소 보여준 자로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한 참된 스승이었다면, 바로 예수와 삶 자체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다. 예수는 참다운 친구로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다. 예수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이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는 예수를 일컬어 '남을 위한 존재'라고 일컬었다. 예수는 단지 십자가 위에서만 남을 위한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그러했고, 영원 전부터 그러했다. 예수는 단지 십자가 위에서만 인간을 섬겼던 존재가 아니라 그의 삶에서, 아니 그의 영원한 존재 안에서 남을 섬겼던 희생과 고난, 사랑의 하나님이었다. 이것을 세 측면에서 나누어 생각해 보기로 하자.

 

1, 창조 속에서 이미 태초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남을 위한 존재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행위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운명 때문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와 더불어 영원히 창조하시는 하나님이고, 창조도 영원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필연적으로나 운명적으로 천지를 창조할 수밖에 없기에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천지가 있기 전에 천지를 창조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적인 양태 안에서 부족하거나 뭔가를 필요로 했던 분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삼위일체적인 교제 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창조하기로 결심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그분이 잃어버린 것은 전혀 없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 밖에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창조하셨을 때, 바로 이 다른 존재를 위해 자신을 나누어 주셨고 자신을 제한하셨고, 자신 속으로 물러 나셨다. 무한한 하나님은 자신 밖에 있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하여 그 이전까지는 자신 속에 있던 공간을 유한한 존재에게 양보해야만 하셨다. 하나님은 자기 밖에 다른 존재를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현존과 능력을 거두어 들이셨다. 그는 자신을 제한하시고, 나누시고, 유한한 존재를 허용하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단념하셨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랑과 희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천지창조의 행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나누고 비우고 제한하고 거두어들임으로써, 남을 위한 존재로 결정하신 것이다. 태초에 일어난 바로 이 하나님의 자기 양보, 자기 희생, 자기고난은 바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희생, 고난의 시작이요 그 준비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이미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기로 각오하시고 결단하시고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창조와 그 미래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영원부터 남을 위한 존재이셨다.

 

 2. 영원히 남을 위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신비는 성육신 속에서 계시되었다.

 성탄절의 신비는 단지 숫처녀가 아기를 출생시켰다고 하는 생물학적·의학적 사실에만 있지 않고,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에 있다. 철학자의 하나님은 이념, 논리 속에 갇혀 있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스스로 역사 속으로, 인간 속으로, 육신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는가? 인간은 태어났기에 남을 섬겨야 하지만, 예수는 인간을 섬기기 위해 태어났다. 왜 예수는 고난을 받았는가? 인간으로 태어나다 보니 고난도 감수해야 하지만, 예수는 고난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 왜 예수는 죽어야 했는가? 인간은 살다가 죽지만, 예수는 죽기 위해 살았다.

예수의 삶은 온통 남을 위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분리주의자가 아니라 참여주의자였다. 예수는 바리새인들처럼 인간들에게 더 많은 율법의 멍에를 씌워 죄인으로 낙인을 찍는 재판관이 아니라, 인간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희생양이다. 예수는 병든 자를 사회 밖으로 분리시키는 분리주의자가 아니라, 병든 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받은 의사다. 예수는 죽어가는 자들을 묘지로 내던져 성급히 묻어버리고, 죽음을 생각 밖으로 내몰고 살아 있는 자들끼리 축배를 든 자가 아니라, 바로 이 죽음을 지고 성문 밖 해골산에서 죽음으로써 죽음을 죽인 자다. 이처럼 예수의 삶은 온통 남을 위한 삶으로 요약될 수 있다.

 

3.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남을 위해 산 예수의 삶은 한 마디로 섬김 안에 응축되어 있다.

십자가의 죽음이 많은 이를 대신하여 죽은 섬김의 죽음인 것처럼 예수의 생애는 온통 남을 위한 섬김으로 일관되었다.

1. 예수는 섬김이 '가장 위대한 삶의 표준' 이라고 말했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높은 자리에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을 때, 예수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마 20:26-38)고 말했다. 예수는 세상의 가치 척도를 뒤집었다. 예수의 혁명적인 교훈 중의 하나는 위대함이란 지배가 아닌 봉사를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 위대한 생애의 극치가 갈보리 산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였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바로 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2. 예수는 섬김이 '마지막 심판의 표준'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심판(마 25:31-46)에서 결정적인 것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을 보이는 믿음, 열매를 보아 아는 믿음이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자신을 바로 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와 동일시한다. 바로 이들에 대한 태도에서 "구원이냐 멸망이냐?"가 결정된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은 단지 동정이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이 이루어지는 심판대, 예수의 현존이 이루어지는 성소, 우리의 구원을 매개하는 싸크라멘트(성례전)이다. 그들을 섬기는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고, 그들을 버려 두는 것은 예수를 버려 두는 것이다.

3. 예수는 섬김이 '진정한 사랑의 표준'이라고 말했다. 사랑이 없는 섬김은 있을 수 있으나, 섬김이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다. 예수는 이 섬김 있는 사랑을 제자들의 발씻음을 통해 손수 실천했다.

섬김은 지배의 방편이 아니다. 섬김은 단지 형식만의 문제가 아니다. 섬김은 낮춤의 태도, 겸손이 아니다. 섬김은 바로 사랑의 본질이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다. 이 섬김의 사랑, 이 사랑의 섬김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 그리스도의 삶에서부터 흘러나와 온 인류를 살리는 구원의 샘이다. 이 구원의 샘이 십자가 위의 예수의 옆구리에서, 가시관을 쓴 예수의 머리에서, 아니 그의 온 몸에서 흘러나와 모든 메마른 심령을 적신다. 이 샘에서 사랑의 물을 길러 마신 제자들(성 프랜시스, 성 다미엔, 성 데레사 등)은 이 사랑의 샘물로써 모든 인류의 허기진 가슴을 채운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거둔다. 누구든지 자신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잃을 것이지만, 자신을잃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