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누가 예수를 못박았는가?

 (1992.4.11, 신덕교회 청년회)

마가복음 15:21-39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M. Heidegger)다. 아무리 고귀한 삶이라도 죽음을 맞이해야 하고, 아무리 비천한 삶이라도 죽음 너머까지 계속 연장될 순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공정한 심판자다. 죽음은 모든 삶을 순식간에 평준화하는 의로운 재판관이다.

그렇지만 의롭고 가치있는 삶이 있듯이, 더럽고 무가치한 삶도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은 더욱 더 숭고하고 엄숙할 수 있다. 만약 영원히 죽지 않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들고, 삶을 의미있게 살지 못하게 만들지 모른다. 물론 죽음 때문에 삶을 허무하게 보는 인생관도 있다("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그러나 죽음 앞에 냉철히 설 수 있는 인간만이 그의 삶을 의미 있게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도 바로 자신의 제한성을 의식하면서 책임 있게 사는 '종말론적 삶'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롭고 가치 있는 죽음이 있듯이, 더럽고 무가치한 죽음도 있다. 현대인은 점차 의미있는 삶은 커녕 의미있는 죽음조차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대개의 죽음은 삶에서 지친 죽음, 삶에서 탈락한 죽음, 아니 삶에서 쫓겨난 죽음이 되고 있다. 그리고 우연한 죽음, 돌발적인 죽음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미리 예견된 죽음조차도 죽음을 가치있게 맞이하지 못하게 한다. 병들어 죽어 가는 인간은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정리, 반성하고 죽음을 의미있게 받아들이려 하기보다는 삶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해 보려고 온갖 의술에 매달려 발버둥친다.

그리고 죽은 인간은 서둘러 매장(화장)되고 성급히 망각되어 버린다. 그의 삶과 죽음은 성급히 현세에서 추방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뭔가 기분 나쁘고 재수 없는 행위로 치부된다. 삶은 살아나갈 수 있는 행운아, 성공한 자의 특권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죽음은 항상 불길하고 재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화제거리가 되거나 사고의 자료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억압된다. 특히 의미있는 삶과 연결되지 않는 죽음일수록 무가치한 죽음으로 낙인된다.

그러나 역사상에서 결코 쉽게 망각될 수 없는 죽음들도 많다. 특히 의롭고 장렬한 죽음, 훌륭한 삶의 결과로 주어진 훌륭한 죽음일수록 그의 삶과 더불어 길이 기념, 추념, 경배된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의 죽음이다. 그의 십자가의 죽음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고, 기독교의 최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삶이 남을 위한 삶이었듯이, 그의 죽음도 남을 위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 병, 불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삶의 결과, 아니 그가 일으킨 갈등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왜 그는 죽었는가? 아니 누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는가? 아니 누가 그를 골고다까지 끌고 갔는가? 아니 그는 누구를 위해 죽었는가? 아니 그는 누구 편에서 죽었는가?

 

1. 예수는 분명히 정치범으로 죽었다.

십자가는 로마법에 의하면 정치적 질서를 교란한 자들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십자가 형벌은 도망친 노예들, 로마제국에 반항한 자들에게 내려지는 참혹한 공포의 처벌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죄명은 십자가 위의 죄패(유대인의 왕)에서 드러난 대로 로마제국을 위태롭게 한 선동자라는 죄명이었다. 그래서 그는 두 강도들, 아마도 단순한 강도, 살인, 방화범이 아니라 폭동을 일으킨 정치범들 사이에 매달렸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폭력과 반란 진압 위에 세워진 로마 제국과 충돌했다. 그의 평화의 나라는 폭력 위에 세워진 '로마의 평화'(Pax Romana)와 충돌했다. 만약 예수가 폭력으로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자로 생각되었다면, 분명히 그의 죽음은 오해에서 빚어진 억울한 죽음이다. 그는 폭력단(열혈당)에 가담하지 않았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경고했다.

물론 예수가 "칼이 없는 자는 칼을 사라"고 했을 때,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내몰았을 때, 사람들은 혹시 그가 폭력혁명가로 오지 않았을까 의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설령 예수가 불의한 현실을 피로써 심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이 어찌 그를 흉내낼 수 있으며, 인간에 의한 인간의 폭력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그가 하나님의 전권을 받은 심판자 인자(人子)였다면, 그가 우리와 달리 죄악의 공범자가 아니라 무죄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어찌 불심판으로써 더러운 세상을 불사르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만약 그가 그렇게 했더라면, 인간의 마음은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폭력 혁명가였지만, 칼과 창에 의한 폭력이 아닌 사랑과 희생에 의한 폭력을 일으킨 혁명가였다. 그러나 바로 이 사랑의 힘은 폭력을 쓰는 자들에게 위험을 가져다 주었다. 이 사랑은 세상 나라의 힘을 무력화하는 힘을 가졌고, 드디어는 로마를 폭력으로가 아니라 사랑으로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메시지는 기존하는 불의한 체제와 법, 그 우상(황배 숭배)을 무력화했기에 바로 강한 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는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폭력의 잔인성을 여실히 폭로했다. 그의 죽음은 간디, 킹, 로메로, 본회퍼 등 이름 없이 폭력에 짓밟히고 항거한 자들의 죽음과 같이 세상 나라의 폭력을 고발하고, 그래서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 폭력을 극복하는 위대한 힘을 주어왔다. 예수는 바로 십자가에서 이들의 편이 되어 주었다. 그리하여 잔인한 폭력의 사슬, 아니 억압자의 비인간성까지도 깨뜨리는 위대한 '평화의 왕'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억압, 수탈, 살해당하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만이 아니라 억압자들까지도 해방하는 진정한 '평화의 왕'으로 죽었다.

 

 2. 예수는 또한 종교범으로 죽었다.

그는 안식일 규정, 정결 규정을 어겼고, 모세의 권위 이상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는 하나님만의 특권인 죄용서의 권한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교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옳은 것과 옳지 않는 것, 경건한 것과 경건하지 않는 것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을 철폐해 버리고, 율법 없는 자들, 율법 아래 있는 자들, 죄 많은 자들을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했다. 반면에 그는 율법에 충실한 자들의 위선, 자기 교만, 자기 칭의를 비난했고, 성전을 정화하고 심지어는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겠다"는 충격적인 성전 모독, 아니 하나님 모독의 발언을 함으로써, 종교체제의 종교적·율법적·경제적 기반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았다.

물론 예수가 경건, 종교, 예배 자체를 완전히 철폐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진정한 경건, 종교, 예배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 새 종교는 낡은 종교를 위태롭게 파괴했다. 이 새 종교는 인간의 의, 인간의 율법, 기존체제 안의 종교 제도를 철저히 문제삼았다. 이 새 종교는 의로운 자들, 경건한 자들을 위한 종교 대신에 버림받고 힘없는 자들, 죄 많고 죄의 굴레에 매인 자들을 용서하고 해방하는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예수의 죽음은 이런 자들만이 아니라 자칭 의로운 자들마저도 철저히 변화시키고 용서하여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의로 인도하는 구원의 힘을 열어놓았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율법 전통을 깨고 율법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그는 율법 없는 자들, 율법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의 편에 섰다. 그리하여 그는 철저히 모든 이를 위해 자비로우신 은혜의 하나님을 계시했다. 그의 삶과 그 결과인 죽음은 인간의 모든 자기 절대화, 자기 우상화, 고정된 체계와 법을 깨고,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의를 가져다 주었다.

 

3.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죽었다.

 예수의 죽음의 깊이와 신비는 단지 정치 사회적·종교적 갈등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그는 단지 힘없는 자들, 죄 많은 자들만을 위해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죽었다. 예수는 영웅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최후와는 달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비명을 지르며 처절히 죽어갔다. 그가 죽어갈 때, 온 땅에 어둠이 깔렸다고 한다. 찬란한 태양이 얼굴을 가린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움은 단지 자연의 어두움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두움'(M. Buber)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버리시고 얼굴을 가리시며 외면하신 것이다.

이 순간에 성소 안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한다. 즉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는 곳,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않는 자,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는 시간의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하나님 안에서 일어난 갈등이었다. 즉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버리신 것이다. 이로써 이 지상에서도 존재하는 모든 갈등의 장벽이 무너져 버렸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이름으로도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없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화해, 용서, 일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하나님 없는 자들의 편에 섰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에게 하나님과 이웃을 가져다 주었다. 예수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안의 죽음'(J. Moltmann)에 있다. 그보다 더 비참하고 처절하게, 더 용감하고 장렬하게 죽은 자들은 수없이 널려 있다. 그의 죽음이 위대한 것은 바로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 인간들 간의 영원한 일치, 즉 보편적 화해를 가져온 데 있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 본 백부장은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고 고백했다. 즉 그의 죽음은 신적인 자의 죽음, 아니 하나님의 죽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 순간에 땅이 어두워졌을 뿐만 아니라 땅이 흔들리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거룩한 도시로 들어갔다고 한다. 예수는 죽음 속에서도 끝까지 진정한 이웃이 되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남을 위했다.

 예수의 죽음은 정치적·종교적 의미만이 아니라 화해적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죽음은 힘없는 자들, 종교 없는 죄 많은 자들, 하나님 없고 그래서 이웃도 없이 사는 자들의 편에 선 죽음이었고, 이로써 평화와 용서와 일치를 선사한 죽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우리가 흉내낼 수도 반복할 수도 없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자를 쳐다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무에 높이 달린 자를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의 생은 변화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평화를 받게 되고, 그 순간 남에게도 평화를 주기 시작한다. 우리는 용서를 받게 되고, 그 순간 남도 용서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친교, 이웃과의 친교를 회복하여 영생과 기쁨을 전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죽음, 우리를 위한 죽음, 그러므로 남을 위한 이 죽음을 결코 망각, 억압하지 말자! 그의 죽음을 영원히 추모, 예배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실천 속에서 영원히 계승하자. 그리하면 그의 혁명적 삶은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서 계속 일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