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왜 사랑하지 못하는가?

(1992.2.1, 신덕교회 청년회)

누가복음 10:25-37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로 알려진 이 본문은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용감한 사랑의 행위에 촛점이 모아져 설명되어 왔다. 이것이 비유인지 아닌지에 관한 논의는 별도로 치더라도, 예수의 선포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의 빛 아래서 볼 때, 하나님 나라의 가까움은 바로 고통 당하는 이웃과의 가까움 속에서 드러나고 또 그것을 요구하는 것임을 이 본문은 분명히 역설해 주고 있다. 또 다른 해석에 따르면, 이 본문은 유대인이 그토록 경멸하는 사마리아인을 통해서 경건한 유대인을 비판하게 함으로써, 예수가 인종 갈등(지역 갈등)을 부각하고 인종 차별을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마리아인의 선행은 어두운 골짜기와 비겁한 사람들의 배경 위에서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이 어떤 동기에서 남다른 선행을 했는지는 그다지 설명되어 있지 않다. 이 본문은 오히려 사랑하지 않은(못한!) 등장 인물들이 어떤 동기에서 그랬는지를 살펴보도록 우리를 이끌어간다. 왜 그들은 사랑하지 못했는가?

 

1. 종교 때문에 사랑하지 못했다.

 종교 때문이라니? 종교가 어떻게 사랑을 방해할 수 있는가? 대개의 고등종교는 한결같이 사랑, 자비, 박애를 강조하며, 특히 유대교는 일찍부터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과 같이 하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레 15:18)?

성서는 한결같이 하나님 사랑을 강조한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떤 우상, 즉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야 할 피조물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심을 다하여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성서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아니 이웃 사랑과 분리된 하나님 신앙은 오히려 하나님 자신에게도 가증스럽고 역겨운 것임을 성서는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금식(사 58:6-7), 하나님의 성전(렘 7:3-7), 하나님을 아는 것(렘 22:16), 하나님의 기쁨(암 5:21-24)은 이웃, 특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공의의 실천에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시대에 유대교는 너무나 율법화, 제도화, 경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배와 삶,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흉칙스럽게 갈라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 특히 경건한 생활을 위해 애쓴 바리새인들, 율법사들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자비보다는 제사를 더 중시했고, 사랑과 공의보다는 종교 의식에 더 몰두했다. 본문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왜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강도를 만난 이웃을 외면하고 뺑소니를 치듯 도망을 갔는가? 시체로 인해 부정해지면, 7일 동안 정결 예식을 치루어야만 한다(민 19장). 아무 유가족 없이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봉사를 할 수 있다는 예외적인 규정이 있었지만, 사두개파인들은 이것조차 거부했다. 본문의 제사장은 사두개파인으로서 강도에게 맞아 죽어가는 사람이 다 죽은 줄로 여겨서 그를 돌보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레위인도 성전 직무를 수행하던 하위 성직자였기 때문에 자신이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냥 지나쳤다고 이해할 수 있다.

 종교는 인간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때때로 하나님 사랑을 핑계삼아 인간 사랑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살상을 부추기고 종교적으로 비호해 준 일도 허다하다. 지나친 종교적 열성, 문자적 율법 신앙, 현실 도피적 신앙, 이기주의적 종교 심성 등은 오늘날도 정말 그리스도인의 많은 시간, 재물, 관심을 이웃으로부터 돌려버린다.

 

2. 학문 때문에 사랑하지 못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는 무대에서 시선을 돌려서 이 무대를 준비한 조역에게 눈을 돌려보자. 이 무대는 한 율법사의 질문 때문에 마련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대를 비추는 조명은 또 다른 한 유형의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빛을 던진다. 그는 율법사, 즉 학자였다. 율법을 깊이 연구하는 자가 정말 자신이 사랑해야 할 이웃을 몰랐다는 말인가? 율법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있지 아니하며, 이웃이란 특히 우리 주위에 있는 나그네, 과부, 병든 자, 갇힌 자, 가난한 자가 아니고 누구인가? 그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오직 남은 것은 실행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했다: "무엇이든지 저희(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가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한다"(마 23:I-3).

학문은 궁극적으로 인간 봉사에 그 목적을 둔다. 그러나 종교를 위한 종교처럼 학문을 위한 학문은 인간 사랑에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공리공론에 빠지며, 전문적 연구에 몰두하면서 현실적 책임감을 상실하며, 때로는 입신출세를 위해 곡학아세(학문을 왜곡하여 세상 권세에 아부)하는 그런 학자들을 우리는 자주 볼 수 있다. 율법사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을 남에게 떠보고 시험하려고 예수에게로 왔다. 그는 자기의 입장을 옳게 보이려고, 과시하려고 예수에게로 왔다. 이것이 학문을 위한 학문의 허세가 아닌가?

더욱이 학문은 그 대상을 범주화하고 규정하고 단정하고, 그래서 그 대상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려고 한다. 율법사는 자기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지 규정(정의)하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범주(괄호) 안에 들어오는 자만을 그는 사랑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인간은 규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바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을 형상화할 수 멀다면,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한정할 수도 없다. 백인과 흑인,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 남자와 여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등으로 한 인간을 하나의 괄호 안으로 집어넣을 순 없다.오직 고통을 받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는 바로 긴급한 도움과 배려의 대상이다. 예수는 사랑을 받아야 할 이웃을 한정하지 않았다. 즉 그는 강도를 만난 자가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격이 있는 자라고 규정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오로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서 보게 하고 접근하게 함으로써, 그런 것을 방해할 뿐인 율법사의 학문적 입장을 간접적으로 나무랐다. "가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3.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시 무대 위로 올라가 보자. 제사장, 레위인이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한 자를 외면하고 지나쳤을 때, 단순히 그이유가 종교적인 규정에만 있었다면, 그들은 나중에 그 장면이 눈에 떠올라도 종교적으로 합리화할 수 있었을 것이고, 예수가 그들을 비난해도 방어할 논리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종교적인 이유 때문일 뿐일까? 위험한 곳에서 그들이 급하게 그런 이유를 둘러대고 자신을 변명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7일 간의 정결례의 손해(번거로움)가 한 인간의 생명마저도 외면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과연 강변할 수 있었겠는가 ?

물론 그들은 그런 손해를 감수하길 꺼렸는지 모른다. 그들도 강도와 마주칠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들을 무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제사장과 같이 정치적으로 로마 세력과 결탁하고 경제적으로 호사스럽게 살았던 사람들은 이들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려는 열혈당의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희생 정신의 부족, 용기의 부족이 결국 사랑의 부족을 초래했다고 한다면, 그들은 종교가 무엇인지는 두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이 무엇인를 전혀 몰랐던 자들이다.

사랑은 희생이 필요한가? 사랑은 용기가 필요한가?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볼 때, 사랑은 많은 희생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사랑은 희생을 강요하고 용기를 강요하는가? 사람은 전정한 의미에서 사랑을 통해 자신을 잃는가? 아니다! 사랑은 잃을수록 얻고 줄수록 풍요해진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왜냐하면 이런 행위는 사랑이 없어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꾸로 사랑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불사르게 내어 주더라도, 잃는 것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과 용기를 강요하고 자기를 잃게 한다는 오해 때문에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행하지 못한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종교를 완성하고, 학문의 목적을 달성하고, 자신을 얻는다. 사람은 사랑을 통해 결국 의미를 얻고 영생을 얻는다(눅 10:28). 이런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용기를 내지 못하고 희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종교적·학문적으로 합리화한다.

 가장 종교적인 그리스도인들, 가장 지성적인 청년들, 가장 사랑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비그리스도교적인, 가장 위선적인, 가장 거짓된 삶을 살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 사랑이 없음을 한탄하고, 사랑할 수 있는 용기, 아니 먼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