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온전한 기쁨

(1992.3.14, 신덕교회 청년회)

누가복음 15:3-22  

 

 

예수가 이 땅에 온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고, 이 나라에 들어갈 자로 하여금 자격을 갖도록 준비하게 함에 있었다. 예수의 사명, 운명, 인격은 온통 '하나님의 나라'의 가까와 옴이라는 신비 속에 용해되어 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는 선포와 함께 예수는 12제자를 불러모았다. 12제자는 이스라엘의 12부족을 대표하는 자로서 장차 회복될 이스라엘의 상징적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는 만인의 구주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온 세계에 임하는 것이지만, 그와 그의 나라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왔다. 예수는 먼저 이스라엘로 보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갖고 그의 제자들을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의 고을로 보내었다. 제자들도 예수처럼 기적을 일으키고 용서를 선포하면서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켜 새로운 신앙과 삶의 공동체를 회복하려고 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의 내용은 그의 비유들 속에 가장 이해하기 쉽게 그려져 있는데, '잃은 양의 비유', '드라크마의 비유',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오기 시작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를 위한 교훈을 얻도록 하자.

 

1.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컴컴한 밑바닥에서부터 오기 시작한다. 산상설교에서 선포된 것처럼 이 땅 위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 굶주리고 목마른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고난받는 자 속에서 임하기 시작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잃은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대상이다.

그래서 예수도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 보냄을 받았다는 소명 속에서 우선적으로는 세상에서 버림을 받은 죄인들, 세리들, 창녀들에게로 향했다. 그의 관심의 대상은 무차별적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아니라 그 중에서도 병들고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의 의에 만족하는 자, 자만한 자, 배부른 자를 비껴 가서 잃어버린 자에게로 향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비천하고 미련한 자들에게로 임하여 이들을 통해서 부자들,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또 그들을 구원한다.

오늘의 비유도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목자는 99명의 양보다 1마리 잃은 양에게 더 큰 관심을 둔다. 여인은 9개의 드라크마보다 1개의 잃은 것에 더 집착한다. 아버지도 충직한 큰아들보다 집나간 작은 아들을 더 염려한다.

예수는 의원처럼 병든 자에 더 관심을 가진다. 예수는 거룩하다는 자들, 자기 의(自己義)에 만족한 자들, 이웃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자들의 위선, 이기심을 혹독히 나무란 반면,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무조건적인, 편애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바리새인들처럼 죄인들과 떨어져 있지 않고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신령한 집단을 따로 만들어 광야로 나가지 않고 삶의 길목, 시장터 한복판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하나님의 나라'는 집단에서 소외된 자들, 잃어버린 자들 속으로 들어가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려면, 우리만의 친교, 집단 이기주의, 무관심을 깨고 잃어버린 자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먼저 우리 자신의 위선, 교만을 깨뜨리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의 손을 잡아 주어야 한다. 그들을 찾아가야 한다!

 

2. 비유로 들어가서, 왜 잃어버렸는지, 잃어버린 자의 처지가 어떠하며, 찾는 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잃어버린 양'은 그를 인도하는 목자의 말을 듣지 않고, 동료와 더불어 지내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오직 눈앞의 푸르고 많은 풀에 정신이 빠져 대열에서 이탈해 버렸다. 오늘날에도 목사의 설교보다는, 회원에 대한 관심보다는 눈앞의 이기적 욕심에 더 현혹되어서 교회를 점차 멀리 떠나는 자들이 많다. 설교에 감동이 없다고 아예 설교에 귀 기울기조차 싫어하는 자들, 그다지 보고 싶지 않는 회원들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아예 정신없이 자신의 일에만 빠지는 자들이 많다.

'드라크마의 이야기'는 사정이 다르다. 동전인 드라크마는 제 스스로 빠져나갈 능력도 이유도 없다. 이 동전은 순전히 여인의 무관심이나 실수 때문에 잃어버려졌다. 오늘날에도 목사와 회원이 교만(태만)해서 같이 있는 자들에게 조그만 사랑은커녕 관심조차 보내지 않으므로, 집단에 대한 귀속감, 따뜻한 분위기가 없어져 대열에서 이탈한 자들도 많이 있다.

'탕자'는 아예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떠날 테니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졸라서 이를 챙긴 후에 세상향락의 길로 달려나갔다. 오늘날에도 이처럼 교회생활에 전혀 의미와 기쁨을 얻지 못하고 아예 세상 재미를 보겠다고 달려간 자들도 많다. 물론 교회가 뭔가 준 것이 없고 뭔가 신나는 일을 제공해 주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이들은 아예 세상이 주는 기쁨이 더 달콤하고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에 더 큰 문제가 있다.

2. '잃은 양'은 어디로 가는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전혀 모른다. 혹 구덩이나 가시덤불에 빠져서 울부짖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는 스스로 되돌아올 수 없다. 스스로 헤쳐 나을 수도 없다. 방향 감각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을 완전히 잃어 버렸다. 이런 경우에 주인은 어떻게 잃은 양을 찾겠는가? 들판이나 계곡을 다 뒤지며 갈만한 곳으로 헤매다가 혹시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잃은 양'처럼 자기의 이익을 쫓다가 망신을 당하고 실패하고 헤매는 자들이 많지만,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인생의 의미, 목표를 잃고 방황하고 있다. 목자처럼 우리가 구석구석 찾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소리를 지르든 안 지르든, 그들은 바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 자들이 아닌가?

'드라크마'는 여주인이 언제, 왜 잃어버렸는지 모르니, 어디에 있는지도 전혀 모른다. 창문이 없는 집 속에서 캄캄해서 찾을 수도 없고, 어디에 떨어졌는지 어디로 굴러갔는지도 모른다. '잃은 양'처럼 갈만한 곳도 모르고, 가까이 가도 소리내어 울지도 않는다. 오직 답답할 뿐이다. 이런 경우에 여주인은 어떻게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겠는가? 불을 켜고 빗자루로 집 전체를 쓸면서 구석구석 뒤져 볼 도리 밖에 없다.

 오늘날에도 '드라크마'처럼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아니 혹시 우리의 교만이나 실수 때문에, 형제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서도 모르고 지내는 사이에 슬그머니 빠져나간 이들이 많지만, 우리는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르니 정말 막막하다. 또 그들은 '드라크마'처럼 돌아올 생각도 의욕도 능력도 없다. 아니 설령 그들이 그런 의욕과 능력을 갖고 있다 손치더라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여인처럼 마음과 눈의 불을 켜고 우리 주위를 샅샅이 뒤져서 데려와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우리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들이다.

'탕자'는 제 발로 나갔으니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 아버지처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알고 후회할 줄도 안다. 그렇다고 그의 자유와 자존심을 꺾고 아버지가 사랑과 권위의 명분 아래 목을 끌고 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기다릴 도리 밖에 없다. 아들은 돌아올 능력이 있고 돌아올 방향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깨우칠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잠잠히 속태우며 기다리진 않는다. 아버지는 문 밖에서 발을 동동 굴리다가 아들이 오면 달려나가려고 자주 먼 거리 쪽으로 뚫어지게 살펴본다. 아버지는 기도하고 기다리며 준비한다. 우리도 밖에 나가 지치고 외롭고 실패한 친구들을 억지로 데려올 순 없다 하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날을 위해 애써 기도하고 기다리고 잔치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오는 것을 먼 거리에서 보고 달려나갈 준비를 항상 해야 하지 않겠는가?

 

3. 세 비유의 내용은 다르지만, 한결같은 초점은 잃은 것을 도로 찾았을 때에 일어난 큰 기쁨이다.

 목자는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친구와 이웃을 불러 잔치를 베풀었다.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기뻐 친구와 향연을 베풀었다.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는 성대한 축제를 베풀었다. 잃은 것을 찾기까지 기쁨은 온전한 것이 아니다! 잃은 것을 찾기까지 나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산술적 계산의 문제가 아니다!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99마리를 들에 그냥 방치해 두었다. 그는 99마리를 우리 안으로 몰아 넣을 여념도 갖지 않았다. 여인은 정혼한 약혼자가 만들어 준 머리 수건의 장식용 드라크마에서 떨어져 나간 한 개를 찾으려고 9개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버지는 작은 아들을 기다리느라 큰 아들이 얼마나 성실히 집안 일을 돌보는지 눈여겨보지 않았다. 하나! 단 하나만 없어도 전체는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 단 하나만 없어도 기쁨은 온전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목자처럼, 정혼한 여인처럼, 아버지처럼 단 하나의 영혼을 온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며, 더욱이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나머지 집에 있는 양보다 더 기뻐하신다.

 이처럼 우리도 우리 중에서 잃은 하나가 올 때까지 우리끼리 만의 축제를 열지 말고, 그를 찾고 기다리고 구해야 한다! 우리의 축제가, 우리의 기쁨이 온전한 것이 될 때까지는 우리의 축제, 우리의 기쁨은 잃은 바 되었으며, 우리도 잃은 바 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잃은 자를 찾는 것은 우리의 잃은 기쁨, 축제, 아니 우리의 잃은 자신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여기에서 보이지 않게, 그러나 너무나 큰 완성을 향해 임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와 내가 어울려 하나가 되는 그 곳에 있다! "나라가 임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우리는 "잃은 곳, 어두운 곳으로 가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