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사랑과 봉사

(1992.7.25, 신덕교회 청년회)

누가복음 7:36-50

 

 

농촌(교회) 봉사를 위해 출발하기 앞서 사랑과 봉사의 정신적 ·신앙적 기초, 그 상관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사람은 어떻게 진정한 사랑에 이르는가? 사람은 어떻게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는가? 진정한 사랑과 삶의 가치를 깨달은 자는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가? 왜 우리는 사랑하며 봉사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리기 위한 조그만 시도로서 본문의 내용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한 여인이 예수에게 와서 눈물로써 발을 씻기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맞춘 후에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바른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다 증거되어 있다. 그러나 네 복음서에서 내용은 조금씩 다르게 기록되어 있으며, 또 그 의미가 다르게 나타나 있다. 마태, 마가, 요한은 이 이야기를 예수의 고난의 이야기(수난사) 속에 넣어서 예수의 죽음과 장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부각하려고 한 반면, 누가는 이 이야기를 수난사와는 관계없이 죄용서의 맥락 안에 위치시켜서 예수의 사죄의 권한을 부각하려고 한다. 복음서 기자들은 이 이야기에 어떤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여 문학적인 틀(구성)을 갖추려고 했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이야기 그 자체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캐내는 것에 있다.

예수는 베다니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누가는 그가 바리새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예수가 그에 의해 살림을 받은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초청 받은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눅 11:I-2 참조). 아마도 시몬과 한 동네에 사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나사로와 함께 시몬의 집에 초청 받아서 일을 거들어 주고 있는지 모른다. 이 때는 아직 나사로가 죽기 전이다.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대단히 예외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누구보다 특히 바리새인들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선의 전형인 것으로 공격받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 바리새인이 왜 예수를 초청했을까? 물론 이 질문은 여기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예수를 훌륭한 '랍비'(선생)로 여겨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초청했거나(눅 7:40 참조), 백성들의 말대로 그가 과연 예언자(선지자)인지 떠보기 위해서 초청했는지 모른다(눅 7:39 참조). 아니면 한 때에 문둥이였던 그가 예수의 권능으로 치유되어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 그를 초청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문제는 죄인(몸을 파는 창녀)인 한 여자(막달라 마리아일까?)가 난데없이 남의 집안으로 뛰어든 것에 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공석에서 여인과 접촉하는 것을 삼가 했고, 더욱이 직업적 창녀를 초대했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보통 연회 중에 문을 열어 놓았기 때문에 이 여인이 들어오는 것이 어렵진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 여인이 왜 무례하고도 과감히 남의 잔치 집에 뛰어들어 보통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했는가에 있다. 여인은 매우 (거룩한?) 불합리한 낭비를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 잔치의 절정에 향유를 손님의 머리에 붓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요한은(누가도?)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말하지만, 마태와 마가는 머리에 향유를 발랐다고 말한다. 아마도 향유를 머리에 바르는 것이 상식에 맞는 일일 것이다. 아무튼 여인은 값진 향유만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까지 온통 다 쏟아 놓았다. 그리고 머리털로 발을 닦고 발에 입을 대었다. 이것은 겸손과 헌신의 표시만이 아니라 바로 사랑의 표시였다.

왜 이 여인이 이토록 예수에게 뜨거운 사랑을 표현했는가? 여인의 봉사는 사랑의 결과와 표현일진대, 왜 이토록 거룩한 사랑을 쏟아 놓았는가? 성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사랑은 무슨 '공적'도 아니고 '은혜'이다. 아니 사랑은 은혜만이 아니라 또한 '기적'이기도 하다. 이 여인에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왜? 예수의 거룩한 사랑에 마술이 걸려 이 여인은 자신의 가치, 인간의 독자성, 일회성의 신비를 경험한 것이다. 여인은 예수의 사랑에 의해 새로운 인격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여인은 예수를 통해 진정한 사랑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 여인을 있는 그 대로 사랑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남자들)은 이 여인의 신체를 빌려 성적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왔다. 이 때에 이 여인은 하나의 육체일 뿐이었다. 어떤 동정적인 사람들(남자들과 여자들)은 이 여인에게 다가와 감정적인 정서를 유발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거나 함께 세상을 탓하거나 하면서 정서적 일치감을 맛보기도 했다. 이때 이 여인은 하나의 위안부, 따뜻한 동료, 같은 멍에를 진 동료였다.

그러나 육체적(동물적) 사랑, 심리적(정서적) 사랑은 결코 한 인격의 핵심에 도달하진 못한다. 그것이 오직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진정한 사랑은 육체와 정서를 통해 (마치 의복처럼) 자신을 표현하지만, 비록 그것이 없더라도, 아니 설령 상대방이 죽음으로 무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존재한다.이는 마치 의복을 걸치지 않는 인간도 인간인 것과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사랑을 받는 인간의 정신적 인격을 직접 지향하기 때문이다. 정신적 인격을 지향하는 사랑은 그 자체를 넘어서 존속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V.  Frankl).

이 사랑이 여인에게 침투해서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고 사랑, 헌신, 봉사하는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예수는 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자들을 위한 프로그램, 구호 계획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위해 편애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들이 주체가 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그들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함께 먹고 마셨다. 이것이 이 여인을 온통 변화시켰다.

진정한 사랑은 기적을 낳고 그래서 진정한 사랑, 헌신, 봉사를 낳는다. 청년 여러분의 봉사도 바로 이런 예수의 사랑의 표현, 사랑의 기적의 표현, 은혜의 구체화여야 한다. 결코 여러분의 사랑이 공적이나 자선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데 이 여인의 행위가 무슨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주위의 사람들(제자들)처럼 매우 가난한 시절에 살던 자들은 방관자의 입장에 서서 옥합을 깨뜨린 행위가 너무나 비경제적 ·합리적인 행위, 아니 무가치한 행위임을 발견하고 나무랐다. 이것은 공리적(公利的) 가치관이다. 물론 우리는 이기적 가치보다는 공리적 가치를 더 중요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천민자본주의에 찌들은 우리 사회에서 이것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공리적 ·이해타산적 ·객관적 가치관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과 헌신, 봉사는 값으로 따질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행위는 공리적 가치관만으로 잴 수 없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의 주체가 창조하고 누리고 수용하는 데서부터 생겨난다. 여기서 우리가 논해야 하는 가치는 주위 사람들(제자들)의 일반적 가치가 아니라 예수에게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어 놓은 여인이 체험하는 가치이다.

생명의 의미를 논할 때, 보통 우리는 세 가지 가치의 범주를 구별한다. 첫째로 인간은 활동에서 창조 가치를 실현하고, 둘째로 인간은 체험에서 체험 가치를 실현하고, 셋째로 인간은 고뇌 속에서 태도 가치를 실현한다. 창조 가치는 창조적 활동(노동)을 통하여, 체험 가치는 세계(자연, 예술의 기쁨)의 수용을 통하여, 태도 가치는 고뇌(희생, 실패, 운명의 수용)를 통하여 실현된다(V.Frankl).

예수에게 온 여인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 가치를 실현했을 리는 만무하고, 더욱이 자연과 예술의 기쁨을 맛보았을 리도 없다. 그러나 이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괴로워하며 고뇌와 후회 속에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 인간의 존엄성을 발견했다.

인간은 고뇌 속에서 성숙하며 성장한다. 고뇌는 그 무엇을 위한 기회이다. 만약 인생이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위한 기회이라면(헤펠), 이 여인은 고뇌 속에서, 후회 속에서 자신의 것을 희생함으로써,  향유와 눈물, 아니 자기 자신까지 사랑의 본질인 예수 앞에 바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의미와 가치로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현대인은 점차 노동 가치를 잃어버리고 있다. 맑스(K. Marx)의 말대로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소외되고 있다. 현대인은 노동을 통해 창조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 자신이 만든 것은 하나의 부품이고 생산 가치일 뿐이다. 아니 현대인은 자기 자신도 화폐 가치, 교환 가치 아니 상품과 번호로 경험하고 있다. 현대인은 점차 자연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롤로 메이(R. May)의 말대로 인간은 고향을 상실하고 그래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여가 동안 자연과 예술, 스포츠를 열광적으로 추구한다. 그러나 이것은 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는 다시 기계적 ·관료적 삶의 톱니가 되어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 뿐만 아니라 현대인은 태도 가치마저도 올바르게 실현하지 못한다. 고뇌, 그 어떤 것을 위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술, 담배, 향락 등을 통해 이를 체념하거나 잊으려고만 한다.

그에 비하면 농촌 사람은 아직도 풍부한 창조 가치, 체험 가치, 태도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농촌 사람은 땅을 가꾸고 생명을 가꾼다. 그는 자연을 호흡하고 살며, 심지어 자신의 각박한 처지마저도 희생 정신(자식들, 도시인들을 위한 희생), 수용 정신(운명의 주체적 수용)을 통해 태도 가치로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청년 여러분의 농촌 봉사도 농촌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농촌의 풍부한 가치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더 건강한 삶, 가치 있는 삶, 사랑하고 누리고 주고받으며, 창조하는 삶에 참여하는 기회를 누리는 것이다.

인간은 진정한 사랑을 통하여 자신의 본질, 자신의 독자성과 일회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하며, 그리하여 자신을 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다. 사랑과 가치와 봉사, 이 세 가지는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청년 여러분의 농촌 봉사가 이것을 발견하고, 이것을 주고, 이것을 더 풍성히 터득하고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빈다!

 (기도) 룩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가장 값진 아들을 주시고, 우리를 가치 있게 만드시고, 구원을 위해 섬기셨듯이, 우리도 당신의 사랑으로 인해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또 남의 가치를 발견하며,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진정한 사랑과 가치 있는 삶과 섬기는 삶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