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더러운 군대 귀신아, 나오라!

 (1992.6.27, 신덕교회 청년회)

 마가복음 5:1-20

 

 

우리 주위에는 많은 귀신들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 귀신들은 사람에 붙거나 사람 속에 들어가려고 배회하다가, 일단 성공하면 사람을 죽기까지 괴롭히며, 여간해서는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은 항상 귀신들의 희생자만은 아니다. 아니 많은 사람들은 이 귀신을 불러들이고 모셔 드린다. 그러나 일단 귀신을 모셔드린 다음에는 사람은 여간해서는 이를 쫓아내지 못한다.

인간을 가장 지독하게 괴롭히고 부려먹는 귀신들은 어떤 것들인가? 돈 귀신? 처녀귀신? 총각귀신? 원귀(원한에 차있는 억울하게 죽은 귀신)? 이런 것들도 사실 무섭다. 그러나 정말 더럽고 악독한 귀신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 군대귀신이다. 오늘의 본문 속에서 이 귀신의 정체를 살펴보자. 이 귀신의 속성은 어떠한 것인가?

 

1. 군대귀신은 죽음, 죽임의 귀신이다.

 이 귀신에 붙잡힌 자는 무덤 사이에 거처하면서,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만든다. 인간을 사로잡는 군대귀신, 아니 인간이 스스로 불러들인 군대귀신은 인간을 죽이고 상하게 할뿐이다. 이 땅에서, 한반도에서 설치는 군대귀신, 온갖 살상무기로 얼마나 많은 아까운 생명을 제물로 잡아먹었는가? 이 군대귀신을 섬기는 군대(군사) 문화는 얼마나 많은 자유와 인권을 압살했는가? 무기는 얼마나 우리를 죽이려는 자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는가? 도리어 무기는 더 큰 무기를, 파괴는 더 큰 파괴를,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불러들이지 않았는가? 도리어 우리를 지켜 주리라던 무기는 우리를 향해 돌진하지 않았는가?

군대, 무기로 영원한 평화를 이룩한 시대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할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귀신들은 여전히 한반도를 떠돌아다니며 제물을 찾고 있다. 그 많은 무기들, 군대귀신들은 사람의 수호천사인 양 가장하지만 결국엔 죽음의 사신, 죽임의 망령임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 많은 무기들의 일부만이라도 녹여서 농기계를 만든다면, 얼마나 많은 굶주려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칼 바르트(K.Barth)가 미국 프린스턴의 어떤 형무소를 방문한 후 고백한 말을 들어보자. "그렇게 많은 비용을 핵무기와 인공위성에 쓰고 있으면서 형무소를 이렇게 버려 둔다는 사실은 하나의 모순이다. 여기에 비하면 우리 스위스의 형무소는 낙원이다." 그러나 수많은 인간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수백만 달러가 무기구매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더 참을 수 없는 모순이다. 군수산업은 불안을 미끼삼아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장사를 하고 있다. 두 사람의 과학자들 중에 거의 한 명은 군수산업과 관련된 일을 하고있다. 지난 50년 동안만 계산하더라도, 인간은 인류를 몇 십번 완전히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들을 개발했다. 특히 핵무기는 우리의 매일매일이 종말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있다.

체르노빌 사건에서 경험했듯이, 한번 터지면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는 핵, 이 핵 귀신이 남한에서 완전히 나갔는지 북한에서 만들어지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죽음의 신들이 한반도를 여전히 배회하고 있음엔 틀림없다. 이 신들이 기승을 부리는 한, 제2의 동족상잔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다. 아직도 전쟁의 원귀들이 피를 찾고 있다. 아직도 죽음의 신들이 칼을 갈고 있다. 어찌하면 좋을 것인가?

 

2. 군대귀신들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린다. 그래서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군대귀신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과연 진화한 동물인가? 동물은 배가 고플 때에만 약한 동물을 잡아먹지만, 인간만은 배가 불러도 계속 인간들을 살상한다. 동물은 부득이한 경우엔 최소한의 희생만을 감수하고 대부분의 무리를 보존하려고 하지만, 인간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때까지 무모한 전쟁을 감행한다. 동물은 자신의 처지가 불리할 땐 물러가거나 거리를 유지하며될 수 있는 한 평화구역 안에서 지내려고 애쓰지만, 사람은 끊임없이 전쟁을 도발하고 전쟁을 준비한다. 동물은 여러 대를 이어서 계속해서 투쟁하지 않지만, 인간은 전쟁의 비참함을 쉬이 잊고 부단히 또 전쟁을 일으킨다. 인간은 과연 하등동물보다 더 진화한 동물인가? 적어도 전쟁에서만은 인간은 지구상에서 가장 저급하고 퇴화한 하등동물이다. 적어도 평화에서만은 인간은 가장 어리석고 망각적이며 유치 한 백치동물이다.

 왜 그런가? 왜 인간만은 유독 군대귀신으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가? 불안 때문이다. 우리는 안보를 말하나 전쟁무기를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성적이라고 말하나 동물적인 아니 동물보다 못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신뢰를 말하나 불안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는 불안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있다. 우리는 불안을 진지하게 다루려 하기보다는 쫓아내려고 한다. 그럴수록 불안은 더 커지고 불신은 더 커진다. 그래서 더 큰 무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거짓된 평안, 불안한 안정을 누리고 있다. 더 큰 무기가 들이닥칠 때까지. 누가 우리에게 불안과 비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겠는가? 누가 우리에게 동족, 이웃, 인간 간의 신뢰를 열어 보일 수 있겠는가? 누가 군대귀신의 제어할 수 없는 불안의 힘을 깨뜨릴 수 있겠는가?

 

3. 이 군대귀신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만 쫓겨날 수 있다.

예수가 군대귀신더러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서 나오라" 하니, 자기의 정체를 밝히고 돼지 안에라도 들어가길 간청했다. 예수가 이를 허락하자 비로소 군대귀신은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와 함께 몰사했다. 예수는 불안의 법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의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다. 예수는 책임적으로 말하고 자유롭게 행동했기 때문에, 불만의 귀신을 장악할 수 있었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 불안을 가지지 않고 밀쳐 버리거나 피하고자 하는 일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감으로써만 구원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했다"(E.Drewermann) .

그도 물론 불안을 알고 있었지만, 불안을 극복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 :25). 예수는 환상, 비현실적 이상을 가르친 게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것, 불안의 극복, 폭력과 전쟁의 극복, 군대귀신의 추방을 가르쳤다. 그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불안의 원자탄을 깨뜨렸다. 사랑과 신뢰 외에는 그 어느 것도 불안을 몰아내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크면 클수록 인간에 대한 불안은 적어진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의 자녀만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자신과 이웃의 불안을 추방할 수 있고, 그래서 군대귀신을 추방할 수 있다.

 더러운 군대귀신은 오직 인간의 단합된 힘만으로 물리칠 수 있다. 군대귀신이 완전히 물러가는 때를 성서는 평화(샬롬)의 때라고 부른다. 조화와 일치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메시야가 오는 시기이다. 그런데 메시야는 단순히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주기 위하여, 인간의 부패성과 나약성을 치료해 주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오는 게 아니다. 메시야는 인간이 일치성을 달성하며 평화를 준비할 때 나타난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의 분리, 소외, 불일치를 극복함으로써 실현된다. 이 평화는 모든 관계가 새롭게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이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음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귀신이 완전히 물러가고 인간의 마음 속에 오직 일치와 조화의 상태가 완성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 인간의 결정에 맡겨져 있다. 우리 모두 마음과 뜻을 합하여 분단과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 한반도에서 더러운 군대귀신을 영원히 추방하자. 더러운 군대귀신아, 나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