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호(창간호)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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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말씀: 사닥다리를 만들면서/이신건] [성탄절 설교/바르트]

[성탄절을 위한 기도/바르트]  [성탄의 뜻/로흐만]

[연말 설교/바르트] [설교: 신앙의 본질/니더슈타인]

[찬양의 의미: 비거만] [조직신학강좌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이신건]

[공지사항]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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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닥다리를 만들면서...

 

 

그 동안도 삶과 목회의 현장에서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매일매일이 벅찬 영적인 싸움의 연속이지만, 요즘처럼 그리스도인의 삶이 치열한 싸움과 같은 적도 별로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이유는 단지 교회의 성장이 멈춧거리거나 뒷걸음친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욱이 경제적인 불황조차 우리의 진정한 싸움의 대상일 순 없습니다.

정치가 혼미한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새삼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할 싸움은 바울이 말한 대로 혈과 육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늘의 정사와 권세와의 싸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싸워야 할 이 정사와 권세는 무엇입니까? 옛적의 정세와 권세는 하늘의 별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어진 운명의 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성좌의 운행을 좌우하면서 이 땅의 운명마저 좌우한다고 믿어졌습니다.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우상적 힘들의 공포 아래 떨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구원과 화해의 능력을 선포했습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써 이 어둠의 권세를 장악하고 물리쳤기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 할 공포의 운명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만유 안에 만유의 주가 되신다고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념의 우상들이 물러간 자리에 온갖 다른 우상들, 권세들이 어지럽게 활개치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온갖 우상들, 하늘과 땅의 신종 권세들이 점점 더 거세게 활개치고 있는데, 이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영적인 활력과 신뢰성, 자기확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한 위기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커녕 교회의 청년들과 자녀들에게조차 삶의 분명한 지표를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과 더불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옛 그리스도인들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가 세계를 구원하고 화해시키는 능력임을 확신있게 증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는 오직 우상들만이 활개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시금 "그리스도가 인류의 기쁨과 소망임"을 확신시켜 줄 시급한 전환기에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지?"를 심각하게 묻고 대답해야 할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자면 영적인 전투를 위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형식과 과시의 경건이 아닌 실천과 능력이 되는 경건, 공허한 공리공론과 인기를 위한 전위학문이 아닌 치열한 진리 탐구와 실천과의 결합을 추구하는 학문. - 이 두 가지(경건과 학문)의 새로운 결합을 통하여 새로운 탈출, 새로운 종교개혁, 새로운 하늘과 땅을 지시해야 할 무거운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본인은 본의가 아니지만 2년 간의 교단생활에서 삶터로 되돌아 왔습니다.

아직 변변한 직장이 있거나 목회지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니지만, 야곱처럼 광야에서 방황하며 잠을 청하다가 꿈을 꾸기 시작했고, 그래서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물론 제겐 천사가 보이진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오라", "땅에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라"는 강한 내면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위에서 내려오는 방법, 땅에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로 다시 올라 갈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가, 그 중의 하나로서 이와 같은 어설픈 작품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이 지면을 빌려서 매월 한번 삶과 목회의 현장에 계신 여러분에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삶과 목회의 경험으로 제게 다가와 주십시오.

이 사닥다리는 1. 가급적 교회력에 맞춰서 제가 조달할 수 있는 유익한 신학과 설교의 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2. 그리고 기획연재로서 교회현장, 평신도의 눈높이에 맞춰서 조직신학을 쉽게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신앙이란 무엇인가?"는 이미 성결신학연구소의 회보 '카도쉬'에서 보내드린 바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 지면을 통해 연재할까 합니다). 3. 그리고 독자 여러분들도 여러 글들(설교, 에세이, 목회정보, 신학정보 등)을 통해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보내 주시면, 걸러지 않고 함께 읽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떤 자리에 있게 되든지, 여러분들이 저와 어떤 관계에 계시든지, 꼭 제가 중심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 성결교회 안에서도 여러분들이 함께 열린 마음으로 꾸려가는 대화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은 겨자씨가 큰 나무가 되어 많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아니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분의 구원의 메시지(신학)와 구원의 능력(실천)을 함께 묶어 "오늘도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주가 되심"을 힘차게 증언하십시다. 함께 해 주십시오! 아니 함께 하십시다!

1996년 11월 22일

이신건 올림


 

성 탄 절

칼 바르트


"오늘날 다읫의 동네에서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누가복음2장 11절)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고 주의 천사는 말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만 되기를 원하시지 않고, 인간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은 작은 자가 되셨습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리하여 여러분은 일으킴을 받았고, 그분에게로 인도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이 얻으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원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여러분을 위하고, 우리를 위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 성탄절 사건은 우리에게, 우리와 함께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일어나는 한 사건입니다.

이제 다른 측면을 생각해 봅시다.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어떤 교리 책자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과도 다른 것입니다. 주의 천사는 나처럼 한 교수가 아닙니다. 교수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인간들에게 구주가 나셨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이란 보편적인 인간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것입니다. "나는 이 인간들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을 자는 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극장이나 영화관에서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될 때 말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주의 천사는 목자에게 말하며,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의 소식은 우리를 향해 말을 거는 소식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주가 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이 소식을 이해하는지 않는지, 우리가 착하고 경건한 사람인지 아닌지 묻지도 않습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보십시오. 성탄절의 역사는 우리가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역사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끝으로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우체부가 올 때처럼, 어떤 사람이 "내게 뭐 좋은 일이 있어?"라고 물을 때처럼 그렇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 소식은 우리가 편지를 읽을 때처럼, 그 편지를 못마땅히 생각할 때처럼, 다른 사람이 옆에 다가와 어깨 너머로 편지 내용을 바라볼 때처럼 그렇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편지를 혼자 읽으려고 합니다. 편지는 개인의 일입니다. 베들레헴의 사건은 결코 개인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다." 주의 천사는 당신에게 말하며,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너희에게"라고 말합니다. 그의 소식은 마치 우리가 다같이 아버지로부터 예쁜 선물을 받은 딸들인 양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도 없으며, 나중에 온 자도 없습니다. 여기에는 특권을 받은 자도 없으며, 손해를 본 자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여기에는 모자란 자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맏형인 자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식탁인 성만찬에서 하나의 빵을 먹고 하나의 잔으로 마십니다. "들고 먹어라! 다함께 잔을 마시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온 생활은 단 하나의 큰 사귐입니다. 즉 구주와의 사귐이요, 그래서 또한 서로와의 사귐입니다. 구주와의 사귐이 없는 곳에는 서로와의 사귐도 없습니다. 그리고 서로와의 사귐이 없는 곳에는 구주와의 사귐도 없습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천사가 말한 "너희에게"라는 말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너희에게 오늘날이라고 주의 천사는 말합니다. 구주가 태어났을 때, 천사는 "오늘날"이라고 말합니다. 어둠의 한복판에서 새 날이 동터 왔습니다. 구주 자신이 바로 이 날의 태양, 모든 날들의 태양이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새 날, 이 날은 단지 성탄의 날만이 아니고 우리의 생명의 날입니다.

오늘날, 이것은 단지 그 당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또 이것은 "모든 시대여, 이 소식을 들어라!"는 뜻을 갖지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주의 천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그 당시 목동에게 말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새 날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들어도 무방합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상황들과 관계들 안에서, 우리의 생애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출발이 이루어졌습니다. 어제의 슬픔과 죄와 불안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구주가 나셨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은혜로 가려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더 이상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용기를 가져도 좋습니다. 우리는 다시금 모여서 새로운 도약을 해도 좋으며, 안심해도 좋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스스로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주의 천사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구주가 나셨기 때문에, 새로운 날이 밝아 왔습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구주는 바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 우리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도우시는 분, 자유롭게 하시는 분, 구원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되실 수가 있습니다. 만약 그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온갖 고난 속에서 구원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분이 구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주, 그분은 거저, 은혜로, 우리의 공로와 협력이 없이, 계산서가 없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손을 내밀기고 구원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구주, 그분은 조건이나 예외가 없이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인간으로 오심으로써, 그분은 우리 모두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처음으로]

 


 

성탄절을 위한 기도

                                                                                  칼 바르트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를 높이시기 위해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우리가 부유해지기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우리가 당신에게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영접하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영생에 참여시키시기 위해,

우리와 같은 한 인간이 되셨습니다.

당신은 단지 하늘에만 거하려고 하시지 않고,

우리 곁으로, 이 땅으로 오길 원하셨습니다.

단지 높은 곳에서 크신 분으로서 존재하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처럼 낮고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단지 우리를 지배하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를 섬기려고 하셨습니다.

단지 영원 속에서 하나님이길 원하시지 않고,

우리를 위하여 인간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대의 온갖 어두움과 고난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많은 잘못들과 오해들을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암담하게 견디어야 하는 차가운 현실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을 위협하는 크나큰 위험들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이런 위험들을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인류를 엄청난 위험으로 몰아넣는 냉전과 상호위협의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

통치자들에게, 대중의 여론을 형성하는 자들에게,

새로운 지혜와 인내와 결단력을 주소서.

당신의 선한 땅에서 모든 자들이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으려면,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병든 사람들, 정신적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추방당한 사람들, 억압당하는 사람들, 불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사람들,

부모가 없는 어린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도울 수 있고 돕도록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

재판관들, 공무원들, 교사들, 학자들과 언론인들, 의사들과 간호원들을 생각합니다.

여러 교회와 모임에서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이 모두에게 성탄의 빛이 이전보다 더 밝게 비추어,

우리 모두가 도움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처음으로]

 


 

성탄의 뜻

장 밀러 로흐만

 

성탄절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오셨다는 '하나님의 행차'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므로 이 우주 가운데 우리가 사는 땅 위에,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고향이 생긴 셈이지요..

옛 사람들은 지상에서 얼마나 자주 고향상실을 경험했던가요!

또, 근대의 인간은 얼마나 소외를 느끼는가요!

"끝없는 우주 공간이 나를 경악케 한다"라고 파스칼은 고백했습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수없이 다르게 말해지고 있는 이 말은

의기소침해진 우리와 동시대인의 경험이요,

우리의 개인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성탄절은 고향상실이라는 우주적이고 전인류적인 곤궁과 관련을 갖고 있습니다.

이 우주 안에서, 이 땅 위에 베들레헴의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기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지워버릴 수 없는 교두보를 확보했던 것입니다.

더 이상 완전히 버려진 우주는 없고,

더 이상 완전히 고향을 상실한 인간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요..

우리는 더 이상 목표없이 떠도는 방랑자와 고향 없는 외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한가운데 있기에(눅 17:21),

우리는 비록 어두워질지라도 이 지상의 삶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으며"(요 1:5)

육신이 된 하나님의 사랑의 성탄절 빛이 성탄절 이후의 일상을

밝게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경꾼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는 하나님은

우리들도 역시 시대의 곤궁에 직면하여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적인 것은 어떠한 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우리들도 역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이 지상에서 동료인간들과

피조물들에 대하여 연대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소외된 세계와 고향을 상실한 인류의 한가운데서

인류를 화해시키면서 새로운 고향을 일구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화해의 봉사자로 부르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도처에서 고향을 상실한 사람들을 위해 지칠 줄 모르며,

새로운 고향을 세우는 일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처럼 이해될 때, 성탄절은 향수에 젖어

과거로 눈길을 돌리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

믿음 안에서 미래를 향해 용감하게 발길을 내딛도록 하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연말

칼 바르트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편 31:15)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이 말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내 시간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시간은 단지 내게 주어진 것이요, 언제라도 취소되고 반납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질문받습니다. 당신의 시대 안에서 당신은 도대체 누구였습니까? 당신에게 주어진 시대 안에서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내 시대, 이것은 무엇입니까? 내 시대란 내 생애입니다. 즉 탄생으로부터 시작된 내 과거, 죽음에 이르는 내 미래 그리고 매우 분명하게 내 현재, 즉 과거로부터 미래로 항상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늘 다시금 와서 늘 다시금 사라집니다. 우리의 생애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공간이요, 우리 모두에게 삶을 위해 제공된 기회입니다. 그것은 제한된 공간이요, 단 한 번만의 지나가는 삶의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오게 되면 우리는 이 공간과 작별하고, 이 기회는 끝장나기 때문입니다. 이 짧거나 긴 내 생애는 주의 손에 있습니다. 하지만 "내 시대"는 이보다 더 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루터가 번역한 말은 내 운명입니다. 내 시대는 내가 괴로워하고 만들어 내는, 또 앞으로도 괴로워하고 만들어 낼 모든 것들을 지닌 내 생애 전체입니다. 내 생애는 주의 손에 있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요약해서 간단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시대는 바로 나입니다. 이제껏 살았고 지금도 살고 앞으로도 얼마간 살아야 할 나, 선하거나 덜 선한 성격을 갖고 있는 내 자신입니다. 내 시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운명지워진 내 자신입니다. 또 내 시대는 거짓과 왜곡의 심연을 지닌 내 자신이기도 합니다. 이제껏 살아온 나, 지금의 나, 그리고 앞으로 살 나, 주께서 잘 아시는 나는 바로 주의 손에 있습니다.

내 생애가 주의 손에 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주는 내 생애를 항상 거듭 필요로 하고 사용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생애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어둡고 칙칙한 숙명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나는 숙명과 다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님과 다툴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또 내 생애는 그 어떤 위대한 인물이나 보잘 것 없는 인물의 손에도 있지 않습니다. 끝으로 내 생애는 내 자신의 손에도 있지 않습니다. 내가 내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참으로 축복입니다. 나는 내 자신의 주가 아니며, 내 생애가 내 손에 있지도 않습니다. 내 시간, 내 생애, 나 자신은 주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손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갈고리 손과는 훨씬 다른, 훨씬 나은, 훨씬 숙달된, 훨씬 강한 손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손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손이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모두를 모든 방향에서 감싸고 있고 껴안고 있으며 지탱하고 있는 그분의 행위, 그분의 활동, 그분의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주의 손"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입니다. 이 손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그가 부르실 때 크게 뻗치신 손입니다.

이 손은 어린이를 축복하신 그의 손입니다. 이 손은 병든 자를 만지시고 고치신 그의 손입니다.

끝으로 이 손은 특히 우리를 위해, 하나님과 우리의 화해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박힌 그의 손입니다. 이 손은 곧 하나님의 손입니다.

강한 아버지의 손, 연약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 신실하고 도와주는 친구의 손, 은혜로운 하나님의 손입니다. 우리의 시대는 바로 이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너희를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사람도 천사도 마귀도 내 죄도 내 죽음도 나를 주의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나는 태어났고, 자라났으며, 보호받고, 구원받았습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었다가 취한 지나간 세월, 좋았고 나빴던 세월은 다 주의 손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원과 은혜의 세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세월이 주의 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올지 안 올지 모를, 좋을지 나쁠지 모를, 편할지 힘겨울지 모를, 아마도 더 힘들지도 모를 내일도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 어떤 세월이 아니라 주의 세월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신비한 현재, 이 찰나의 신비도 주의 은혜와 통치 안에 있습니다. 나의 시간, 바로 이 시간이 주의 손에 있기에, 이것은 내게, 하나님에게, 우리 모두에게 결단의 시간입니다.

오늘 밤 우리가 침실에 들기 전에, 큰 목소리나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더 "내 생애는 주의 손에 있습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진리를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얼마나 멋진 연말입니까!


[처음으로]

 


 

신앙의 본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7-11)"

Peter Niederstein(독일 Tamins 지방교회 목사)

우리는 모두 우리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날 우리들의 관계가 얼마나 허약해졌는지를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처럼 관계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짧은 관계보다는 계속되는 관계로부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관계는 실로 세 가지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삼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 동물과 다른 피조물들을 포함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 -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나는 이 삼차원이 정삼각형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한 면이 깨어지면, 전부가 깨어집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바로 이 삼차원적 관계로부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선물로써 우리는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책임을 떠맡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나름대로 이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 당시 터키 반도(半島)라고 불리던 소아시아 교회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이 편지는 그 당시의 신앙생활의 위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위기는 사회적 소외와 비난 속에서 소수로서 살던 초대 교회의 심각한 상황에서부터 생겨났습니다. 이 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입각하여 고난을 잘 견디고 희망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에 대한 권면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른 편지 가운데서도 이와 유사한 권면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도 이 권면을 반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는 여기서 "신앙의 본질"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본문의 구절을 따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이 본문의 배후에는 세계의 종말이 임박해 있다고 믿던 그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이 종말은 물론 생각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우리의 생활 속에서 깨어서 늘 본질적인 것을 생각해야 할 긴박성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권면이 덧붙여졌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때로는 감사하고, 때로는 간구하지만, 또 때로는 "사랑하는 하나님, 당신은 내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가깝거나 먼 사람들과 다른 피조물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간구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나는 이 본문을 다음과 같이 옮겨 놓고 싶습니다. "우리는 늘 적대감을 갖고서 살지는 못하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늘 전쟁을 하면서 살지는 못하고, 평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늘 상처를 주면서 살지는 못하고, 서로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가했던 상처는 싸매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는 말은 바로 이 뜻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적대감을 치유합니다. 우리는 불완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너그러이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관용 안에서 실천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 즉 우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일은 이 편지가 쓰여지던 그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은 단지 여행을 위한 편의제공일 뿐만 아니라, 머물 곳이 없는 나그네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신앙의 의무를 이행하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웃을 대접하는 일도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을 대접하기를 꺼려하는 오늘날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웃을 대접하는 문화를 가꾸어야 할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알버트 슈바이처가 1919년에 슈트라스부르크의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설교할 때, 그는 이 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습니다. "나는 남에게 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그 누구도 말하지 마십시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당신에게 속해 있는 이 땅의 재산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당신의 은사, 당신의 시간, 당신의 마음, 당신의 노동력, 다른 사람과 교제할 수 있는 당신의 능력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한 주인이 포도원을 경작하기 위해 찾는 일꾼과 같습니다. 어디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필요로 하시는지 조용히 겸손하게 물으십시오. 그리고 기다리고 찾느라 지치지 마십시오."

여기서 슈바이처는 오늘날 점점 퍼져가는 생각, 즉 종교와 신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이라는 생각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베드로전서의 의도를 잘 드러내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당시 소아시아 교회의 위기상황 속에서 베드로의 편지는 "각자가 자기의 은사대로 자기의 일만을 돌보라."고 말하지 않고, "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너그러이 대해야 합니다. 사랑은 관용 안에서 실천됩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손님을 대접하는 일, 즉 우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일은 이 편지가 쓰여지던 그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일은 단지 여행을 위한 편의제공일 뿐만 아니라, 머물 곳이 없는 나그네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신앙의 의무를 이행하는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웃을 대접하는 일도 신앙생활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각 개인은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지금까지도 적용되는 권면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말과 행위는 쌍둥이와 같이 함께 속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소외와 비난 속에서 살아가던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한 것처럼, 행함은 하나님의 힘을 필요로 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산상수훈의 첫마디를 연상시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나는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바로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써 시작합니다. 산상수훈을 읽어 내려갈 때, 나는 당혹해 하는 얼굴들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고난을 당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고난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그리고는 나는 빌리홉쉬머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름다운 것과 건강한 것을 전혀 참지 못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오아시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한 어린 야자나무를 보자, 그는 무거운 돌멩이를 하나 집어서 한 어린 야자나무의 꽃부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킬킬거리며 떠났다. 하지만 야자나무는 이 돌을 굴려 내리려고 애썼다. 가지를 흔들고 비틀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무는 땅에 더 깊이 뿌리를 내리면서, 뿌리가 땅 밑의 수맥까지 닫도록 애썼다. 이런 땅밑의 힘과 하늘의 태양이 합쳐져서, 이 나무는 돌멩이도 들어올릴 수 있는, 왕과 같이 기풍있는 나무로 자라나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돌멩이를 올려놓았던 그 남자가 기형이 된 나무를 보고자 되돌아 왔다. 그러자 힘이 센 나무가 꽃망울을 내려서 돌멩이를 가르치며 말했다. 당신에게 감사드려야 하겠군요. 당신의 짐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본문도 찬양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계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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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의 의미

Karl-Friedrich Wiggermann


예배를 위해 모인 회중인들은 자신들을 찬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찬양한다. 그들은 항상 커지는, 그리고 종종 생활을 온통 지배하는 많은 골치아픈 문제들로부터 거리를 취한다.

예배 중에서 그들은 모든 제도적인 생활을 탁월하게 능가하는 실재를 경험한다. 찬양 중에서 그들은 하나님에게만 향하기 위해 - 어떠한 목적도 없이 - 자신들을 잊는다.

찬양하는 회중들은 세계의 전위대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알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인류의 전위대일뿐만 아니라 온 피조물, 온 우주세계의 전위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 중에서 창조만물의 깊은 비밀을 열어 보인다. 만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예배는 대단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배는 지나친 긴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 해방된 회중들은 하나님을 향해 감사하면서 즐거이 노래한다. 영적인 큰 은사를 가졌던 신학자 프리드리히 보델쉬빙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 찬양은 영혼에게 자유로운 숨결을 준다." 비록 회중들이 져야 할 무거운 짐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거룩하고 기뻐하고 놀라는 무리가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이렇게 넘치는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보델쉬빙흐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들이 무한히 열린다."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은 임상심리적으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회중들에게 힘을 주기 위하여 찬양을 임의로 다룰 수 없다.

비록 찬양이 일상적인 예배순서에 따라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예배진행은 입으로 찬양할 수 있는 용기와 겸손을 항상 다시금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함께 찬양하고 노래하며 감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가장 우수한 문제'처럼 논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건한 이론의 광야에서 헤매지 않는다.

우리는 찬양한다. 찬양 가운데서 우리는 '더높은 신학'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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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강좌

제1강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이신건 목사(신학박사)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을 남달리 구별하는 특징은 무엇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이 여러분을 대할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여러분을 평가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아니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은 어떠한 의식과 특징을 지니고 그들에게 나타나며, 여러분의 모습과 인격 혹은 생활이 그들에게 어떻게 비취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참으로 여러분을 무신론자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과도 구분하는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점에 관해서 물론 사람들마다 견해가 엇갈리겠지만, 나는 모름지기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엇을 믿고, 바라며,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는 앞으로 자주 상세히 다룰 예정이니 일단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서 볼 수 있는 정신적 혹은 심리적(주관적) 특징인 '신앙과 소망과 사랑'을 한번 살펴보기로 합시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세 가지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 "(고린도전서 13:13).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하여 다시금 옛 조상들이 물건을 나를 때 사용하던 '달구지'를 비유로 들어 보겠습니다. 달구지는 뭔가를 실어 나르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나 달구지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이것을 끌어 줄 소나 말과 같은 짐승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달구지와 짐승과 물건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를 이루며 서로 도와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바로 이 세 요소와 비교할 수 있는 것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신앙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신앙은 수레에 비유될 수 있고, 소망은 짐승에 비유될 수 있으며, 사랑은 물건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1. '소망'의 사람

신앙은 달구지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달구지는 그 자체로서는 움직일 수 없습니다. 달구지를 끌어 줄 짐승이 필요하듯이, 신앙도 자신을 끌어 줄 힘을 필요로 합니다. 이 힘을 우리는 '소망'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짐승이 없다면 달구지를 끌 수가 없듯이, 소망이 없다면 신앙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소망은 신앙을 끌어가면서 신앙이 지치지 않도록 하고, 좌절하지 않도록 하고, 주저앉지 않도록 하며, 신앙에게 늘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바로 소망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다운 점은 무엇보다도 이 소망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바로 소망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나 종교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만큼 이 세상 한가운데서 고통의 문제를 극복하는 희망에 대하여 줄기차게 증언하는 종교는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교가 생겨난 환경이 다른 종교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 예컨대 불교나 도교 등은 농경문화권에서 자연의 원리로부터 터득된 종교입니다. 석가는 "만물이 돌고 돈다"는 윤회(輪廻)의 법칙을 가르쳤고, 노자는 "무엇이든지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살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개척하려는 삶보다는 자연의 원리나 운명에 맡겨 사는 삶의 태도를 가지며, 잘못된 역사를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역사의 변화에 초연하거나 이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역사에 참여하려는 생각이나 역사의 미래에 희망을 거는 신앙은 이런 종교로부터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어떠합니까? 물론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즉 세상이 저절로 잘 되어 갈 거라든지, 인간은 항상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아무 때나 희희낙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조건 비관주의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아무리 인생살이가 암담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버리고 딴 세상으로 도망가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할 것이다. 그러니 이 더러운 세상을 떠나서 어서 다른 세상으로 갑시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세상이 암울하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철저히 심판하실지라도, 하나님은 결국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 주셨고,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은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철저히 희망의 하나님을 믿기에, 철저히 이 세계의 미래를 희망합니다.

요한이 환상 중에 기록한 요한계시록을 읽어보십시오. 비록 사탄이 온통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이 사탄을 정복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하늘나라로 데려 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늘의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만을 철저히 희망하지만, 희망이 다른 세계(피안)에서야 비로소 성취될 것이라고 믿지 않고, 희망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와 이 세계 안에서 성취될 것을 기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의 신앙경험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인은 유목생활 중에서 길을 인도하시며 미래의 땅을 약속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탈출, 족장들의 유랑, 에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탈출, 광야의 유랑생활, 이스라엘의 멸망과 메시야 기대,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의 복음, 그의 부활과 재림 등은 바로 이 세계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희망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역사 안에서 희망을 일으키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할 이유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특징은 무엇보다도 이 희망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 곳에서는 악습과 절망, 억압과 미개를 타파하는 희망도 항상 전파되었습니다.

2. '사랑'의 사람

아무리 소망이 좋은 것이라고 하지만, 소망 그 자체는 내용이 없이 공허합니다. 왜냐하면 소망은 미래의 힘, 삶의 원동력이지, 삶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며,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갑니까?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 사람은 모름지기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소망은 사랑을 끌어가는 힘이요, 신앙은 사랑을 싣는 수레입니다. 그러므로 소망과 신앙은 사랑에 봉사하는 종이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바울이 "사랑이 제일이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수레나 짐승이 필요한 것은 바로 짐 때문입니다. 목적지(천국)에 도달할 때까지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짐(사랑)이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짐승(희망)이나 수레(신앙)는 내버려두고 주인(하나님)에게 짐(사랑)만을 넘겨 줄 따름입니다. 천국이 무엇입니까? 사랑이 충만한 곳입니다. 지옥이 무엇입니까? 미움이 가득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이지, 신앙이나 희망이 아닙니다. 마지막 심판의 비유(마태복음 25장)를 읽어 보십시오. 장차 심판자로 오실 예수님은 오직 사랑의 열매만을 찾으십니다. 신앙만이 목적인 양 살아온 사람들(입으로만 주의 이름을 부른 사람들)과 사랑의 열매가 없는 공허한 희망에 빠진 사람들(주의 이름으로 기적은 행하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낭패를 당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나 나중이나 사랑만이 제일 소중합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가장 큰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일서 4:8).

사랑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온갖 아름다운 언어로써 사랑을 여러모로 찬양했지만, "사랑은 끌어당기고 모으고 살리고 연합하는 힘이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흩어진 온갖 질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물론 인간의 마음에도 우주 안에도 남을 깨뜨리고 배척하는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힘들도 실제로는 다른 그 무엇과 연결되어 있고, 크게 보면 잠시나마 우주의 안정과 통합에도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도 죽음과 파괴, 미움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하여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리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미움과 파괴조차도 사랑의 힘으로 끌어안고서 사랑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미움을 끌어안고 사랑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악을 극복하기 위하여 악을 지고 견딥니다. 즉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악이 선으로 변화될 날을 고대합니다. 즉 사랑은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보십시오! 그분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하여 악을 지고 견디고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부활의 승리, 아니 사랑의 승리가 밝아 왔습니다. 그래서 가장 참혹한 실패와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조차도 이제 그리스도인에게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승리!

3. '신앙'의 사람

소망은 수레를 끄는 짐승에 비유되고, 사랑은 수레가 싣고 가는 짐에 비유된다면, 신앙은 수레에 비유된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소망이 없이는 신앙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듯이, 신앙이 없이는 사랑을 태우고 갈 수레가 없는 셈이 됩니다. 만약 신앙이 없다면, 미래를 희망할 수도 없습니다. 즉 수레(신앙)가 없다면, 수레를 끌어 줄 자(소망)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또한 신앙이 없다면, 사랑도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즉 수레(신앙)가 없다면, 누가 짐(사랑)을 운반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빈 깡통이 요란하고, 짐을 싣지 않는 수레가 시끄럽듯이, 사랑이 없는 신앙은 요란하고 시끄러울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반대로 깡통이 없이는 음식을 담을 수 없고, 수레가 없이는 짐을 싣고 나를 수 없듯이, 신앙이 없이는 사랑을 담을 수도 없고 실어 나를 수도 없습니다.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면, 신앙은 사랑의 꾸러미요, 사랑은 신앙의 내용물입니다. 혹은 신앙은 사랑의 뿌리요, 사랑은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절대적 신앙의 대상을 흔히 '신'(神)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신(神)'이란 무엇을 일컫는 말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궁극적인 신뢰를 걸고 있는 대상, 온 뜻과 마음과 생명과 정성을 다 바쳐 섬기는 대상을 일컫는 용어 혹은 상징입니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종교는 이 대상을 주로 비인격적인 원리로 생각하고(法, 道),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는 이 대상을 주로 인격적인 헌신의 목표로 생각합니다(야훼 하나님, 알라 신). 그렇지만 모든 종교가 다같이 이 대상을 궁극적인 신뢰, 신앙, 의지, 헌신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이 대상을 '신'(神)이라는 상징으로 통일해서 칭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에서 신(하나님, 천주님, 주님)은 창조와 역사와 인생의 궁극적 원인과 토대, 목표로 신앙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신뢰하고 인식하고 고백합니다. 비록 사람이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고백하더라도, 신앙의 출발점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에게 있다고 그리스도인은 고백합니다. 그분은 신앙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으로서 신앙의 근거이면서 신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물이 있기에 나는 그 물을 의지해서 수영하려고 합니다. 수레가 있기에 나는 나의 짐(사랑, 염려)을 그 위에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삶의 토대요 반석이신 그분 안에서 감사히 살고, 사랑하고,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하여, 소망과 사랑과 신앙의 원리를 살펴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더 말하자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모름지기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소망하고 사랑하고 신앙하면서, 아무리 힘겹고 고달프더라도, 그분이 요구하신 진리와 사랑의 길을 끝날까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은 절망의 밤중에 빛나는 소망의 별이요, 미움의 얼음장을 녹이는 사랑의 불꽃이요, 불신앙의 공격에도 깨어지지 않는 신앙의 반석입니다. 신앙과 소망과 사랑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소망과 사랑의 하나님이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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