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호 목차

 

 

 

 

    모든 것

     

    모든 것을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맛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아직 못보지 않은 어떤 것을 찾으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야 하고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하려면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곳으로 가야 한다

    모든 것에서 모든 것에게로 가려면

    모든 것을 떠나 모든 것에게로 가야 한다

    모든 것을 가지려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이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  

 

 

<처음으로>


 뒤늦은 인사말씀

 

라후 부족 선교 사역에 동참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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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의 국경 지역에는 여러 소수 부족들이 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라후 부족은 여러모로 우리 민족과 흡사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동정심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학설에 의하면 라후 부족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때에 중국으로 건너간(끌려간) 우리 동족이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라후 사람들의 유전자가 우리 민족의 유전자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가 그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는 것은 단지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서울신대의 입학 동기생이요 친구인 박윤식 목사가 그곳에서 훌륭하게 선교사역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경비의 문제로 용기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작년에 축구를 하고 싶어하던 큰 아들의 진로 문제로 태국 방센에서 축구사역을 하는 오필환 선교사를 만나러 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태국 방콕에는 역시 서울신대의 입학 동기생이요 친한 친구인 김용식 목사가 한인연합교회에 시무하고 있는데, 그 친구의 배려로 세미나와 예배를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으로 태국에 간 저는 내친 김에 치앙마이 선교센터를 둘러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큰 사역을 하리라고는 이루 상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산등성에서 살아가는 라후 마을을 방문한 저의 심정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참담 그 자체였습니다. 돼지 움막과 같은 집, 깡마르고 더러운 어린이들, 절대적으로 부족한 농지와 식량, 마을마다 존재하는 무당집 등은 제가 살아온 가난한 시절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요즘 미국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여간 밉지가 않습니다만, 그래도 그들이 건네준 밀가루와 강냉이 가루, 버터와 우유 등을 먹고 자라난 과거를 생각하면, 그들이 참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전해준 복음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의 눈부신 복음화와 오늘의 저의 삶이 어찌 존재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복음선교와 후원사역은 생명을 이어가는 사역입니다. 이 땅의 소중한 생명과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사역 말입니다. 그리고 생명의 사역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특히 라후족 어린이들과 학생들을 복음 안에서 양육하는 사역은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사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거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자라난 제가 지금까지 무화과 나무처럼 잎(입)만 무성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스스로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부족한 몸이지만 강의를 통해 선교 사역에 동참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올해 2월에 강의를 하고 왔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여행 경비를 후원해주신 수정동 교회(남봉현 목사님)와 아현교회(조원근 목사님)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3일 동안(2월 5일-7일) 온종일 "사도신경"을 집중 강의하였습니다. 사도신경은 12사도가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세계선교를 위해 떠나기 직전에 신앙고백을 하였다 하여 붙여진 전설적인 이름입니다만, 실제적으로도 사도적인 가르침이 압축되어 있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입니다. 우연하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12명의 신학생들이 강의를 들었습니다. 바울과 베드로 등... 기독교 역사에서 단 한 사람이 이룩한 위대한 선교 사역을 생각해 볼 때, 12명은 절대로 적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라후 부족의 학생들 하나하나가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게 보였으며, 그들의 눈망울은 초롱초롱 빛이 났습니다. 처음으로 독일에서 유학한 신학박사가 왔다니까, 호기심과 기대감이 어울려 강의실은 매우 진지하였으며, 온 종일 공부하는 과정에도 몸이 거의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였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강의 전체를 다 소화할 수 있었으며,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알기 쉽게 요약하며 가르쳤습니다. 그곳에 다녀온 후로 신동운 선교사로부터 학생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고 하며, 그래서 내년에도 꼭 와 달라는 편지(이 메일)를 받았습니다.

틈을 내어 학생들의 방을 둘러보았으며, 어린이 선교센터 두 곳도 둘러보았습니다. 좋은 시설과 많은 봉사의 손길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창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읽을거리가 너무 없다는 사실에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남은 시간을 멍청하게 보내거나 오락거리로 소일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왕성하게 성장해야 할 시기에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것은 매우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 문서와 문화를 매개로 한 사역도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귀국할 때에 라후어 사전과 성경 등 라후어를 익힐 수 있는 자료들을 가져왔습니다. 틈틈히 라후어를 익혀서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라후어 통역과 번역 사역에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를 위해서도 아낌없는 조언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미력한 저와 성결신학연구소를 격려하시는 모든 분들께 뜨거운 감사를 드립니다.

 

2002년 4월 10일 이신건 목사 드림

<처음으로>


 

  구약성서 이야기

 

형 에서와의 화해를 준비하는 야곱(1)

(창 32장)

차준희(한세대 교수)

 

 

 1. 계속되는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창 32:1)

 여우같은 라반의 착취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빠져 나온 야곱은 이제 호랑이 같은 에서와 부딪혀야 할 운명의 시각이 다가오자, 걱정과 근심에 싸이게 된다. 라반과 평화적으로 헤어진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들을 만난다. 1절은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고 함으로써 야곱이 우연히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의도적으로 야곱을 만나준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사람들을 인도하고 보호해 주신다. 시편 기자도 이 점을 분명히 노래하고 있다: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천사)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시 91:11). 하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을 만나주셔서 힘과 용기를 주신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복을 가로챘다가 오히려 고향을 등지고 낯선 이방세계로 도피해야 했던 야곱이 벧엘에서 잠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은 꿈속에서 야곱을 만나 주셨다(창 28:10-12).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오랜 세월을 타향에서 보내고 이제는 고향으로 향하며, 형 에서와의 화해를 염려하며 고민하는 야곱을 천사를 통하여 만나 주신 것이다. 이것이 야곱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인생 여정에 늘 함께 계시면서 우리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오늘의 천사들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적절히 도우신다.

 

 2. 야곱의 참회와 용서를 구함: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창 32:4)

 야곱은 형 에서가 있는 에돔벌 세일 땅으로 심부름꾼을 자기보다 먼저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너희는 이같이 내 주 에서에게 고하라. 주의 종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라반에게 붙여서 지금까지 있었사오며 내게 소와 나귀와 양떼와 노비가 있사오므로 사람을 보내어 내 주께 고하고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 하더라"(창 32:4-5). 야곱은 에서를 과거처럼 형으로 부르지 않고 자기와는 격이 다른 높은 사람을 가리키는 '주(主)'로 호칭한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결코 겉으로만 형의 환심을 사서 눈앞의 화를 면하고자 하는 것만은 아니다. 야곱은 진정으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면서,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형으로부터 용서를 구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4-15절에 나열되어 있는 에서에게 바칠 엄청난 양의 가축들도 뇌물이라기보다는 참회의 표시로 보인다.

 야곱은 더 이상 형과 다투는 경쟁자가 아니다. 또한 형을 속이는 사기꾼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옛날의 야곱이었다. 이제 막 에서 앞에 선 현재의 야곱은 형에게 진심으로 참회하며 용서를 구했다. 과거의 야곱이었다면, 참회와 용서의 간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변화된 야곱이기에 가능했다.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된 사람만이 진정한 참회를 하며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참회와 용서의 간구는 누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리라.

 

 3. 인간의 노력 그리고 기도: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창 32:11)

 야곱은 심부름꾼을 형 에서에게 보내어 참회의 마음을 표하고 용서를 구하였으나 아무런 회신도 받지 못한다.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심부름꾼의 짤막한 보고는 야곱을 더욱 더 불안하게 하였다. 거친 세일 땅에서 다른 족속들과 생존의 사투를 벌이기 위해서 에서는 잘 훈련된 군사들이 필요했을 것이고, 언제나 그들을 대동하고 다녔을 것이다. 이에 비해 야곱을 둘러싸고 있는 무리들은 전쟁을 대비한 강력한 군사 조직체라기보다는 야곱의 가축떼와 남녀 하인들 및 식솔들에 불과했다.

 야곱은 에서가 자기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해 오는 줄로 생각한 것 같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자 야곱은 혼비백산할 지경이 되었다: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7절). 형 에서와의 무력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 야곱은 비상수단을 간구한다. 그는 자신과 함께 한 종들과 가축들을 두 패로 나눈다. 에서가 한 패를 치면 나머지 한 패를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7-8절). 이제 인간적으로 필요한 조처는 다 취한 셈이다.

 그런데 야곱은 여기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한다. 9-12절까지의 본문이 그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내용이다: "야곱이 또 가로되 나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야웨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 하옴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냄이니이다"(9+11절). 그는 심부름꾼을 미리 보내어 자신의 참회모습과 용서를 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또한 모든 소유를 두 패로 나누는 등 인간적인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도움도 간절히 요청했다.

 불안과 초조함에 안절부절하였던 야곱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빌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취했다. 우리도 어떤 어려운 문제에 부딪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 자신들이 해야 할 일들도 더불어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대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기도만 하고 나 자신은 손가락하나 움직이지 않는다든지, 또는 반대로 제 혼자의 힘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기도를 소홀히 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며 행동(인간적 노력)하고, 행동하며 기도하는 것이 문제에 직면한 성도의 올바른 태도이다.

 

 4. 재산보다 화해: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창 32:13)

야곱은 자신의 소유 가운데서 형 에서에게 바칠 상당량의 예물을 따로 챙겨 놓는다. 여기에서 예물이란 히브리어로 '민하'이다. 이 단어는 친밀감과 존경을 표하는 '선물'(창 43:11, 15, 25-26)이나 제공자가 종속된 지위(상태)에 있음을 인정하며 드리는 '공물'(삼하 8:2,6; 왕상 4:21)을 뜻한다. 본문에서 이 예물이 '선물'인지 '공물'인지는 이것을 받게 되는 에서의 판단에 맡겨진 듯 하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여 진다해도 야곱에 대한 에서의 노여움이 풀어지면 그만이다. 이것은 화해의 제스쳐이기 때문이다(창 32:20).

 야곱이 에서를 위해서 따로 떼어논 예물의 목록이 창세기 32장 14-15절에 열거된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약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이 가축을 모두 합산하면 무려 550 마리에 이른다. 예물치곤 어마어마한 분량의 예물이다. 야곱은 인생의 황금기인 청장년기에, 그것도 20년 동안 종살이하며 모은 재산보다 피붙이인 형과의 화해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용서를 구하는 화해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요구된다. 진정한 화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성실히 지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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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마당: 가신 님을 기리며

 

1. 이명직 목사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는 시대마다 달라져 왔다. 말에서 글로, 글에서 영상으로. 오늘의 시대는 바야흐르 영상의 시대다. 그래서 영화와 인터넷, 모바일, 디자인 등이 인기를 모은다. 본 연구소도 몇 권의 책을 출판해 보았지만, 도대체 몇 사람이 이 책의 겉장이라도 쳐다보았는지 의심스럽다. 정보 확산의 효과와 경비 절약 면에서 인터넷은 단연 압도적이다. 그래서 재정이 부족한 본 연구소는 가급적 인터넷을 통하여 많은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한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이명직 목사의 주요 저서인 <기독교의 사대복음>과 <그리스도교의 대강령>을, 그리고 정진경 목사의 대표적인 저서인 <신학과 목회>의 주요 내용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마침 지난 3월은 이명직 목사님이 서거하신 지 29년이 되는 달이었다. 그래서 활천도 특집으로 그분을 다루었다. 이명직 목사님은 생전에 성결교회의 지도자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신 분이다. 그래서 그분에게 사부, 교부라는 명예로운 이름이 붙여지곤 한다. 목창균 교수의 말대로 한국성결교회사를 논하면서 이명직 목사님을 빼놓는다면, 한국의 풍광을 말하면서 백두산이나 한라산을 빼놓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동안 그분의 사상과 활동을 체계적으로 조명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서 그분에 대한 연구가 조금이라도 더 활발해지기를 소원해본다.

다만 그분을 말할 때라도 너무 미화하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 것이다. 그분의 영향력 아래 사역하시는 분이 절대적으로 많았던 지난 시절에는 그분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분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특히 이명직 목사의 친일 발언과 행동은 후대에게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한다. 특히 최근에 국회위원들이 공개한 친일인사 명단에 그분이 들어갈까 나는 조마조마하였다. 다행히 이번의 명단에는 빠졌지만, 언젠가 다시 명단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교단적으로 대표할 만한 분들이 대신 공개적으로 참회하고 매듭을 지었으면 좋겠다. "남을 대신하여 참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분들도 있겠지만, 친일 행위를 한 자들의 자손들이 그렇게 한 예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참회와 용서의 힘을 믿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내가 부끄러운 일을 하고도 참회하지 않고 -아니 못하고- 죽었다면, 내 자손이 대신 해주길 진정으로 바란다. 우리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집단적인 인격(아담)이 아닌가? 설령 하나님 앞에서는 각자의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역사 앞에서는 영광과 죄책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겠는가?

친일 행위 외에도 이명직 목사님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내용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생의 행동은 본받지 말되, 가르침은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행동하지 않는 이의 가르침조차 외면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조차 분간하지 못하는 짐승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우리에게는 누구든지 비판할 자유가 얼마든지 있다. 그렇지만 우리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가능성을 얼마든지 갖고 있다. 그러므로 혹독한 비판조차도 철저한 연대감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까닭에 성결신학연구소의 홈 페이지에는 비판을 받을 만한 -나도 충분히 비판을 받을 만하다- 분들의 가르침을 가급적 많이 올리려고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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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응조 목사

  

 

 본 연구소는 올해부터 매달 성결교회 지도자들의 출생일이나 서거일에 맞추어 <이달의 신학자> 혹은 <이달의 인물>의 제목으로 그들을 홈페이지 전면에 소개하고 있다. 마침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성결대학을 창립하신 김응조 목사님은 1991년 4월 17일에 9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기에, 처음으로 그분을 조명해 보았다.

그 동안 자료의 미비와 교단적 정서 때문에 김응조 목사님은 나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성결교회의 신학의 역사와 특징>을 출간할 때에 김응조 목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포함하길 원하였지만, 집필을 약속한 성결대학의 모 교수의 약속 불이행으로 뜻을 이루지 못해 기분이 조금 씁쓸하였다. 하지만 성결대학 측에서는 그 동안 그분에 관한 연구와 출판, 강연 등이 나름대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 같으며, 작년에는 24권으로 이루어진 <성서대강해>가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저술의 양으로 보면, 기성에서는 그 만한 분이 없다. 그러므로 교단의 분리 이전이나 이후에나 김응조 목사님은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큰 스승임이 분명하다. 그분은 김상준, 이명직과 더불어 성결교회의 제1세대의 신학자에 속하기에 마땅한 분이다. 무엇보다도 이 세 분은 <사중복음>을 집필한 분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마침 성결교회가 연합의 분위기를 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상대방 교단의 인물을 조명하는 것은 연합 정신의 구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분의 사상과 행적은 본 연구소의 홈페이지를 통해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를 본받기를 원했던 그분은 한국성결교회의 모세로 불리고 있다. 다만 이 이름이 성결교회의 분리와 예성교단의 설립을 상징하는 이름으로 오용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독립활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르신 그분도 최근에 친일 행위 여부로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급기야는 이를 반박하는 책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 문제도 물론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교단 분열의 명분이 참으로 정당했는지를 더 간절히 묻고 싶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의 분열 배경에는 대개 신학적인 명분보다는 정치적 야심이 더 깊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대한 저술을 통해 그분이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도 자못 궁금하다. 좌우간 우리는 남의 떡만을 더 크게 생각하고 우리의 훌륭한 유산들은 너무 홀대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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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용칠 목사

 

 

4월 1일에 김용칠 목사님이 훌쩍 세상을 떠나셨다. 그분은 말보다는 삶으로 성결인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라고 생각된다. 3째 성결교인인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교단의 어른은 교단의 초석을 놓고도 욕심을 버리신 김상준 목사님과 일신의 안일을 버리고 부흥운동을 전개하신 이성봉 목사님이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는 분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 여간 큰 기쁨이 아니다. 사실 성결에 대해 말하자면, 백 마디 말은 한 가지 행동보다 못하다(百言不如一行)고 생각한다. 성결의 본체이신 예수님도 성결을 입으로 말씀하신 경우가 참으로 희귀하다. 오히려 그분은 그 당시 성결의 기수로 자처하던 지도자들을 가장 혹독하게 비판하셨다. 비판의 요지는 언행불일치, 위선과 교만, 배타심이다. 고로 성결교회의 신학자인 나는 그분의 눈에는 악(불결)의 축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우해(遇海=어리석은 바다) 김용칠 목사님은 정말 모든 것을 사랑으로 품으신 어리석은 바다이셨다. 모친을 살해한 공산당원을 용서하셨으며, 가족보다 신자와 이웃을 더 사랑하셨으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선교 사업에 내어놓았으며, 끝내는 자신의 시신까지 병원에 기증하셨다. 교단장은 물론 교회장까지 거부하시고 조촐한 가족장을 원하셨으며, 자신의 죽음을 광고하는 것을 금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추모할 기회까지 거부하셨다. 화환과 조의금을 사양하셨으며, 장례예식을 환송식이라 부르도록 명하셨다.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계산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양반이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 행하신 가장 어리석은 일은 아들에게 후임의 자리를 물려주신 일이다. 아차, 이것은 평생 욕심 없이 성결하게 사신 분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가 아닌가? 광림교회의 일명 목회자 세습 사건이 터졌을 때에 아마 그분은 가장 곤혹스러워 하셨으리라. 누가 보아도 참으로 후회할 만한 어리석은 일이다. 왜 한번의 실수로 평생의 명예를 되돌리셨을까? 자녀에 대한 애착만은 그토록 끊기 어려웠단 말인가?

하지만 사정을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든 당회원들과 압도적으로 다수의 교인들이 일평생 한 교회를 위해 희생하신 '어버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효심에서 아들을 강제로 앉힌 것이다. "우리도 효도하는데, 아들이 왜 효도하지 않느냐?"는 말에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출세(?)하기를 거부하던, 잘 나가던 아들은 차마 후임의 길을 거부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부터 이미 아들은 교회에 사직서를 제출해 놓고 있었다. 이것도 결코 얕은 속셈이 아니라고 본다. 그 아들도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났으니, 그런 어리석은 짓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용칠 목사님을 잘 모른다. 생전에 단 두 번 뵈었을 뿐이다. 한번은 아들의 소개로 태평교회의 마당에서 뵌 적이 있었는데, 내 손을 꼭 잡으시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시냐? 용기를 가시세요!"라고 격려하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내 일평생, 이렇게 진심어린 큰 격려를 받아본 적이 없다. 눈에 서린 물방울이 바로 이를 말해준다. 아, 일평생 말만 떠벌리며 사는 미천한 나를 이렇게 격려하시다니! 그분의 그림자조차 밟기 어려웠다. 삶으로 실증된 성결신학이여, 이 땅에서 영원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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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신학

아직 아무도 발 들여놓지 않은 땅

슈패만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에 찬 어린이는 삶의 리듬 속에서 같은 일이 거듭 일어남을 알아차리며 소중히 여긴다. 세상이 거듭되는 습관을 통해 편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린이는 이와 동시에 삶을 시원한 새 물이 끊임없이, 그때그때 독특한 모습을 띠고 솟아오르는 샘으로 이해한다. 어린이는 아침이 밝아올 때마다 그날이 마치 아직 아무도 발 들여놓지 않은 땅인 양 새로운 기대를 가진다. 어린이는 사물의 질서나 형태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못박는 자기 나름의 마무리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보다도 그때그때 일어나는 일, 뜻밖의 발견과 뜻밖의 선물에 늘 마음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 맞추어 역시 그때그때 새로운 착상을 가지고 행동하며 말한다.

예수의 삶의 하루는 활짝 열려 있다. 그분은 그 하루가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할지를 미리 정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당신 스스로가 길이시다. 그러나 그 길을 가시는 가운데 그분은 바로 다음에 내디딜 발걸음, 즉 현재만을 알고 계신 듯하다. 아버지께서 그분을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에게는 늘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지며,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새로운 인간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분은 그때그때 전혀 다른 행동과 말씀으로 그들의 삶 한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가져오신다. 그분은 어떤 계획이나 강령은 세우시지 않는다. 전략가도 아니며 꼭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지도 않는다.

어린이다움을 잃어버린 사람은 삶을 더 완벽하게 자기 손에 쥐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그는 삶은 빈틈없이 계획하고 조종한다.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는 세계는 시간이 갈수록 기계의 톱니바퀴 장치와 같은 성격을 더해간다. 복음의 본질이 되는 범주인 기대하지 못한 일, 미리 예상하지 못한 일, 모험 등의 범주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러한 세계 내에서 설 자리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우리의 삶이 하나의 노래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는 우리가 일상의 사소한 만남 속에서도 그분의 계시와 그분의 오심에 대해 믿음의 문을 닫지 않을 때 가능해진다. 우리는 이 사실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날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생수가 솟아오름을 볼 것이며, 전혀 기대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빛보다 더 밝은 빛이 우리 일상 가운데 비치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문화 엿보기

환상을 좇는 현대인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중의 한 장면

 

영국의 평범한 한 여성이 쓴 환상 소설 "해리포터 시리즈"가 경이적인 판매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 책은 온 세계에서 약 1억3천만부가 팔렸다고 하며, 앞으로도 계속 나올 거라고 한다. 이 책은 아마 성서 다음으로 최대의 베스트 셀러로 기록될 것이며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영국의 명성을 높인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도 지금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이와 유사한 환상 소설과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반지의 제왕"도 이에 못지 않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바야흐르 환상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미래학자들에 의하면 미래는 3F의 시대가 될 거라고 한다. 즉 환상(Fiction)과 여성(Feminism), 패션(Fashion)이 장차  문화의 기본적인 특징이 될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중 매체와 문학, 예술, 만화와 전자 게임은 요즘 들어 부쩍 환상적인 내용을 자주 소개하고 있으며, 사람들도 이에 대해 점점 더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표한다.  

왜 인간은 환상을 열렬히 추구하는 걸까? 일반적으로 말하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거나 체념하지 못한다. 인간은 현실과 환경의 지배를 받기도 하지만, 이에 매여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과 창조성, 초월성과 개방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과 동물 간의 본질적인 차이라고 생각되며, 종교와 예술와 문화도 흔히 이로부터 설명된다.

하지만 요즘 들어 현대인이 유별나게 환상을 좇는 것은 특히 문화적, 시대적 환경에서 비롯한다. 점점 더 기계주의, 물질주의로 치닫고 있으며 무한 경쟁을 부추기는 살벌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소외감과 무력감의 수렁에 더 깊이 빠진다. 과학-물질 문명은 한편으로는 인간에게 편리와 유용성을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정서를 점점 더 메마르게 하고 사회를 삭막하게 만든다. 그래서 과학-물질 문명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쇠퇴하기는커녕 점점 더 번성할 수밖에 없으며, 환상을 채워주는 산업은 호황을 누리게 된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도 영성(靈性)을 강조하는 현상이 유행하는 것도 다 이런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환상을 제대로 구분해야 한다. 영(靈)이라고 무조건 믿지 말고 영의 분별을 잘 해야 하듯이, 우리는 환상이라고 무턱대고 좇을 것이 아니라, 옥석을 올바르게 가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인간을 건강하게 하는 환상이 있는가 하면, 인간을 병들게 하는 환상이 있다. 인간의 인격성, 역사성, 현실성, 공동체성을 진지하게 여기고 고양하기보다는 이를 파괴하고 이로부터 도피시키는 환상은, 비록 일시 동안은 현실의 불만을 달래고 심리적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위로적 기능은 할 수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구원하는 진정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건강한 환상을 보호하고 양육할 뿐만 아니라, 성서가 제시하는 가장 위대하고 진정한 환상인 하나님 나라의 환상(Vision)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구태의연한 태도와 고착된 사고방식을 과감히 깨뜨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창조성과 개방성을 최대한 발휘하여 현대인을 감동시켜야 한다. 만약 교회가 현실에 질질 끌려가거나 뒷북치기만을 좋아한다면, 만약 교회가 세상의 환상을 비난하거나 방관하면서 건전한 환상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장차 점점 더 많은 신자들을 잘못된 사이비 종교에 빼앗길 것이다.

<처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