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로제와의 대담"

  

 

떼제 공동체는 고독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1940년에 F. 로제는 25살의 나이에 전쟁의 한 가운데서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로 발길을 옮겼다. 그가 간 곳은 그의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부그고뉴(Burgund) 남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들에 정착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 형제들이 그에게로 왔다. 50년이 지난 후부터 떼제는 지구 곳곳에서 평화, 화해와 사귐을 연상시키는 이름이 되었다.

어떻게, 왜 당신은 떼제에서 형제들의 사귐을 형성하셨습니까?

젊었을 때,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입술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들의 갈등을 합리화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매일 매일 화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헌신적인 삶보다 더 분명히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길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남자들의 사귐을 형성하는 일이야말로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삶을 헌신하기로 결단하고 언제나 화해를 실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귐을 말입니다.

1940년 여름에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났다. 곳곳마다 슬픔뿐이다. 드디어 새로운 출발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습니다. 나는 기도하고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언젠가 공동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집 한 채를 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떼제로 오게 되었습니다. 마을에는 포장된 도로도 없었고, 하천도 없었으며, 전화도 없었습니다. 목사의 집은 프랑스 혁명 이래로 비어 있었습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몇몇 노인들이 진심으로 나를 반겨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식사에 초대하신 부인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우리는 정말 외롭습니다. 겨울은 너무 깁니다. 그 말에 나는 떼제에 머물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머물던 곳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프랑스의 점령 지역에서 도망을 나온 사람들을 숨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만약 내가 공동체 생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기를 바란다면, 고난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입니다.  

1950년 말엽부터 갈수록 많은 젊은이들이 떼제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지금 그 숫자는 만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매 주일, 일년 내내, 지구 곳곳에서 몰려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처음 젊은이들이 떼제로 왔을 때, 젊은이들의 모임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올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960년대에 우리는 유럽의 중부 혹은 동부로 가서, 거기에 있는 젊은이들의 말에 귀기울이고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이에 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젊은이들이 동쪽에서 옵니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사이에 신뢰가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부터 젊은이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기도의 자리는 왜 비어 있습니까? 어찌하여 젊은이들은 멀리 있습니까? 만약 우리 형제들이 떼제에 젊은이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여러 나라에서 그들과의 만남, 특히 1978년 이래로 해가 바뀔 때마다 큰 도시에서 5일 동안 유럽의 젊은이들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사귐 가운데서, 그분의 몸인 교회 안에서 버림을 당하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을 만나실 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젊은이들을 위해 무엇보다도 경청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며, 결코 영적인 생활의 스승이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특히 공동 기도를 통해 그들과 함께 신뢰와 믿음의 근원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기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행위로서 영혼의 뿌리를 움직입니다.

당신은 그 어떤 조직적인 운동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하셨으며, 젊은이들을 교회 공동체로, 단체와 모임으로, 그들의 지역교회로 되돌려 보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왜 그리 하십니까?

 

 

1975년에 우리가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지역 공동체에 계속 참여하도록 권해야 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이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임을 알았습니다. 지역 공동체에서는 젊은이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마땅한 자리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의 사귐이 없다면, 만약 그분의 몸인 교회가 없다면, 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은 교회는 지겹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갱신은 가능합니다. 찬양이 넘치는 기도에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이곳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모두가 침묵합니다. 이런 요소들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할 수 있습니다.

 

떼제 공동체로 오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합니까?

지금껏 우리는 무엇보다도 복음의 세 가지 요소를 실천해 왔습니다. 그것은 곧 형제로서 공동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기쁨, 소박함, 자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젊은이의 모임을 위한 경비의 일부를 조달하며,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의무로서 특수한 상황에 처한 궁핍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일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는 젊은이들은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인생 전체를 거는 모험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적인 관계가 심하게 망가졌고, 사회적인 관계가 매우 허약해졌으며,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소외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젊은이들은 공동체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고, 그리고 자신의 삶을 바쳐야 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민감하게 느낍니다. 이 두 가지 일은 실제로, 그리고 즐겁게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은 무엇을 추구합니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당신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내게 오는 사람들의 매우 다양합니다. 그 동안 유럽 전 지역의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사람들도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낡은 버스를 타고, 심지어는 겨울에 유럽을 가로질러 아주 소박한 조건 속에서 살려고 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 중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등에서 온 젊은 정교회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들도 따뜻한 영접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그들은 곳곳마다 긴장이 넘치는, 고통스러운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들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에게서 우리는 비탄, 아니 절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서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유아적 혹은 소아적 상태 속에 깊이 빠졌고, 그래서 그들의 가족들은 해체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독을 종종 내적인 죽음처럼 경험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삶을 세울 수 있는 근원, 뿌리 깊은 내적인 생명이 필요합니다.

이와 동시에 젊은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개방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경계가 무너진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생활 방식과 노동 방식을 지향합니다. 적잖은 사람들이 기꺼이 많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다시금 생활의 활력을 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만약 화해의 다양한 몸짓이 없다면, 만약 용서가 없다면, 만약 이 땅에서 서로 나눔이 없다면, 안정된 사회도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의 가족 안에 신뢰를 이룩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다시금 함께 모이려고 애씁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희망을 싹을 틔웁니다. 이러한 희망은 - 우리는 이를 분명히 보고 있습니까? -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화해의 노력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오늘의 젊은이들은 우선 자신의 삶을 통해 복음의 소식을 믿을 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를 위한 부름은 중요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의 생활을 통해 사랑을 말하라."고 어거스틴은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용서하는 사랑이 없다면, 만약 화해가 없다면, 사람들은 어떤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시대가 바뀔 때마다 도처에서 화해의 부름이 들려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 속에서,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가족들 가운데서, 믿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런 부름을 들을 수 있습니다. 화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치의 부름은 허구적인 세상을 촉진할 따름입니다.

여기서 나의 할머님께서 외가 쪽과 화해하시려고 많은 애를 쓰셨다는 사실을 말해도 좋겠습니까? 젊은 시절부터 그분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원초적인 신앙을 카톨릭 신앙의 신비와 조화시키는 일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발견했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생활을 통해 사랑을 말하십시오. 개인에게 해당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신비에도 해당합니다. 교회가 신뢰와 용서, 동정의 문을 열 때, 많은 것을 베풀지 않으면서도 기쁘게, 그리고 소박하게 나그네를 영접할 때, 젊은이들은 신뢰성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그들은 인간의 마음 안으로 순수한 신뢰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