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발전

 이신건

 

몰트만 교수가 "삼위일체와" 관련하여 또 한 권의 책을 펴냈다. 하지만 이 책은 "이전의 저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처럼 삼위일체론에 관해 체계적으로 쓰여진 것은 아니다. 이 책은 그가 여러 기회에 발표한 논문들과 다른 신학자들, 철학자들과 대화한 논문들, 그리고 자신이 걸어온 신학의 과정을 소개한 자서전적 고백을 한데 묶은 것이다. 이 책의 원 제목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이다. 그럼에도 내가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라는 제목을 임의로 붙인 것은 그의 이전의 저서를 연상시킬 수 있어서 좋고, 서로 대조해서 읽으면 더 좋겠다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의 저서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는 친교적 특징을 지닌 사회적 '삼위일체론'이 일신론적 신정통치의 의미를 갖는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신학적, 정치적 관련성을 갖는지를 고찰한 책이다. 여기서 몰트만은 하나님의 나라 개념을 그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써 보완 내지 수정하려고 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안의 만물의 친교로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몰트만은 이 책이 출판된 이후에도 계속 삼위일체에 관해 깊이 성찰하였으며, 그 결과물을 이 책에 담고 있다. 이 책에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에 관한 이전의 입장을 반복할 뿐만 아니라, 특히 하나님의 여성-모성적 속성과 '아빠'를 부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내적인 삶을 유달리 강조한다. 이런 면에서 이 책은 여성신학자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될 만한 남성 신학자의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보다 나에게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실로 이 책은 나의 신학순례의 길에서 결정적인 이정표 내지 반환점이 된 책이다. 만약 몰트만의 이 책이 없었더라면, 나의 부족한 "어린이 신학"(한들 출판사, 218쪽, 1998년)은 결코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을 집필하기 전에 나는 몰트만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가 왜 하나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부르면서 유독 "어린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가?"라고 묻었더니, 그는 곧장 답장을 보내어 주었다. 기대 밖에 그는 "나의 생각이 탁월한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조속한 집필을 촉구하였으며, 어저께 도착한 편지에서는 만약 내가 이 책에 관해 독일어 논문을 써서 보내 준다면, 독일의 유명한 신학잡지(Evangelische Theologie)에 실어줄 것을 약속하기까지 하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로부터 많은 통찰을 얻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의 이론을 보완하기도 하고, 때로는 수정 혹은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 책의 입장과 내용을 잘 압축하고 있는 <머리말>만을 소개하겠다. 내용을 소상히 알고 싶으신 분은 얼마 전에 나온 책을 구입하시길 바란다(대한기독교서회, 360쪽, 1998년, 11,000원).

 

들어가는 말: 오늘 날의 삼위일체론의 몇 가지 질문들

삼위일체론은 지난 십 여년 동안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하는 점이 표명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을 상대화하고, 보편적 다원주의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포기한다면, 이런 행위는 다른 종교들과 대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누가 그리스도교다운 점을 더 이상 분명히 대변하려고 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들과 대화하는 일에 관심을 갖겠는가? 유대인들, 이슬람교인들과 신학적인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맺는 중에 우리 자신 조차도 새롭게 이해하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론을 상대화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지하게 대화하다 보면, 각자가 갖는 특성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더 높다고 생각되는 진리를 옹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입장을 포기하는 자는 대화할 능력도 없거니와, 대화할 자격도 없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삼위일체론을 포기함으로써 "신은 항상 더 큰 분이다"(deus semper major)라고 하는, 보편적인 동의를 얻어낼 수 있는 일신론에 도달하려는 시도들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교의 독특성과 차별성에 부딪혀 좌초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난 십 여년 동안 삼위일체론에서 중요하게 되었던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삼위일체적 사귐의 개념, 2. 남성적 은유들과 여성적 은유들에 대한 질문, 3. 삼위일체적 십자가 신학의 계속적 발전 그리고 4. 삼위일체적 역사이해의 전망.

1 . 사회적 삼위일체론

지난 십 여년 동안 삼위일체론을 위해 기여한 논문들 가운데서 "사회적 삼위일체론"(社會的 三位一體論)이라는 사고는 폭넓은 기반을 갖게 되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미하엘 슈마우스 아우구스틴(Michael Schmaus Augustin)이 이름붙인 "심리적 삼위일체론"(心理的 三位一體論)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칼 바르트(K. Barth)와 칼 라너(Karl Rahner)가 대변한 하나님의 초월적 주체성의 삼위일체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부적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그 가치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세 신적인 위격들 자신에 의해 이루어지는 유일독특한 사귐(Gemeinschaft)이라는 생각이 관철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치성은 더 이상 동질적인 신적 실체(Substanz)나 동일한 신적 주체(Subjekt) 안에서 이해되지 않고,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영원한 순환(Perichoresis) 안에서 이해된다. 구원사(救援史)와 인간의 하나님 경험의 해석학(解釋學), 인간의 하나님 형상됨에 관한 이론, 하나님을 반영하는 창조의 표상, "삼위일체의 모상"(模像)으로서의 교회의 일치와 형태에 관한 이론 그리고 새롭고 영원한 창조의 사귐에 대한 종말론적 기대는 바로 이러한 통찰의 결과를 폭넓게 받아들였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 개념 안에서 군주론적, 성직계급적이고 가부장적인 점을 정당화하는 일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변한다. "사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의도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런 생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비록 이 생각은 로마 교회의 성직계급에 잘 맞는 것은 아니지만, 카톨릭 신학에서 하나의 전역사(前歷史)를 갖고 있다. 미하엘 슈마우스(Michael Schmaus)는 삼위일체론을 "완성된 친교론"으로 이해했다. 쉐에벤(M.J. Scheeben)에 따르면, "신적인 위격들은 이러한 철저히 유일하고 탁월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데,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동일한 형태를 갖고 있고, 유사하며,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하며 본질적인 이상(理想)이다." 비간트 지벨(Wiegand Siebel)은 그의 저서 '관계로서의 성령. 하나의 사회적 삼위일체론'(1986)에서 이런 전통을 폭넓게 받아들였다. 정교회 신학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을 "사귐"으로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점을 갖고 있지 않다. 이미 위대한 카파도키아 학파의 학자들도 그렇게 이해했던 것이다. 그리스-정교회 신학자 크리스토스 얀나라스(Christos Yannaras)와 루마니아-정교회 신학자 두미트루 스타닐로에(Dumitru Staniloae)가 나의 책을 우정어리고 박수갈채하는 심정으로 비평한 일은 동방교회의 삼위일체론과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의 새로운 합일을 지시하는데, 이런 합일은 "필리오케"(그리고 아들로부터)를 둘러싼 논쟁의 재개보다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신학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사귐의 사상을 언제나 늘 반추해 왔다. 이를 보여 주는 것은 포드 경(St. H. Ford)의 아름다운 논문 Perichoresis and Interpretation: Samuel Taylor Coleridge's Trinitarian Conception of Unity, Theology, Vol. LⅩⅩⅩⅨ Jan. 1986, Nr. 727, 20-23과 영국 교회협의회의 새로운 논문들이다: The Forgotten Trinity, 1. The Report of the BBC Study Commission on Trinitarian Doctrine Today, 2. A Study Guide on Issues Contained in the Report of the BBC Study Commission on Trinitarian Doctrine Today, London 1989. 탁월한 요약을 제공하는 것은 J. O'donnell, sj., The Trinity as Divine Community, Gregorianum 69, 1, 1988, 5-34; C. M. LaCugnal/J. O'Donell, Returning from 'The Far Country': Theses for a Contemporary Trinitarian Theology, Scottish Journal of Theology 41, 1988, 191-215.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귐으로서 그의 사귐 안으로 초대하며, 자연과 인간의 세계 안에서 자신을 정의롭고 생명력 있는 공동체의 원형으로 삼는다. 이 표상에 따르면, 교회의 일치를 보증하는 것은 "성령의 사귐"이지, 군주론적인 중앙집권주의가 아니다. "교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일치에 의해 일치된 백성이다"고 키프리안이 말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체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러한 공동체적 형태를 재발견하고, 이를 먼저 자신의 교회론의 기초로 삼은 후 그의 신론의 기초로도 삼은 자는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바닥 공동'(1980)이라는 책에서 그는 요한복음 17장 21절 이하에 따라서 교회의 성직계급적 형태에 반해 교회의 공동체적 형태를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 그는 로마의 신앙위원회에 불려 가서 교리심문을 받았으며, 그 결과로 운이 나쁜 "침묵참회"의 형벌을 받았다. 그의 책 '삼위일체 하나님'(1987)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가 "삼위일체는 우리의 진정한 사회강령이다"라는 나의 명제를 자신의 명제로 삼고, "공산주의적 교회"를 위한 그의 제안의 근거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에서 끌어왔기 때문이다. 나는 레오나르도 보프의 교회론적이고도 삼위일체론적 명제들을 에큐메니칼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최상의 의미에서 카톨릭적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명제들이 "위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백성을 의존적이게 만들고 미성숙하게 여기는 권위주의적인 종교체제 앞에서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를 통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신학적 깊이를 얻게 되며, 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실천할 수 있는 목표의 지평을 얻게 된다. 인격성, 사회성 그리고 자연성이 평형을 유지하고, 인간들이 서로서로 그리고 지구의 자연과 더불어 생존하게 되는 하나의 인간적인 사귐이 나타날 것이다.

2. 삼위일체에서의 성(性)의 역할

하나님과 특히 삼위일체의 위격들을 나타내는 남성적인 은유들과 여성적인 은유들에 대한 질문이 여성신학에 의하여 절박하게 제기되었다. "우리에게 무한한 관심을 일으키는"(파울 틸리히) 상징(象徵)으로서의 하나님의 상징은 항상 인간의 상황을 정당화하는 역효과를 갖기 때문에, 수 세기 동안 억압당하고 비하당하고 착취당해 오다가 오늘 날에 이르러 자신의 존엄성을 깨닫기 시작한 여성들이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하나님의 상징들을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더 이상 논의할 필요도 없다.

여성신학자들의 종교비판의 첫째 시기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하나님"의 상징들이 비판당하고 배척당했다. 메리 델리(Mary Daly)는 "하나님 아버지 너머에 있는"(beyond God the Father) 하나님을 파울 틸리히로부터 물려받은 중성적인 존재론적 개념들로써 파악하려고 했다. 인간의 문화, 다시 말하면,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문화가 지구의 자연에게 가져온 생태학적 위기를 보더라도, "최고의 존재", "존재의 깊이"와 "존재 위의 존재"와 같은 존재론적 개념들은 유용하다. 왜냐하면 이런 개념들은 순전히 인격적인 하나님 표상들과 같이 그렇게 인간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리고 자연의 비밀로서의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격적이고 역사적인 하나님 표상들은 실제로 충분하지 못하다.

여성신학자들의 종교비판의 둘째 시기에서는 하나님의 상징들을 남성적이고도 여성적으로 평준화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이를 위해 성서연구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지상적 활동을 나타내는 여성적 표상들을 제공했다. 물론 야훼는 주와 왕으로, 구원자와 심판자로 표상되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경험에 따라서 그의 지상적 활동은 두드러지게 여성적인 은유들로써 묘사되었다(야훼의 루아흐, 야훼의 호크마, 야훼의 쉐히나). 카발라(중세기에 생겼던 유대교의 신비종교)의 전통에 따르면, 쉐히나(하나님의 임재)는,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이 증명한 대로, "하나님의 여성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엘레인 페이젤(Elaine Pagels)이 지적한 대로, 시리아와 이른 바 "영지주의적" 공동체의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성령은 그의 존재와 활동 안에 하나님의 여성적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외경인 히브리 복음서는 예수를 "성령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야훼의 루아흐는 "나의 아들아, 나는 모든 예언자들 안에서 너가 오길, 그리고 내가 네 안에서 안식하길 소원했다"고 말한다. 도마 복음서는 성령, 더 정확히 말하면, "거룩한 여성의 영"을 "창조의 어머니"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는 어머니"라고 부른다. 시리아의 교부들은 성령을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첫째로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로하듯이, 보혜사는 위로한다. 둘째로 신자들은 성령으로부터 새로이 "태어난다". 실로 성령은 처음 태어난 아들 예수의 본래의 어머니인 것과 마찬가지로 신도들의 자비로운 어머니이다. 하나님의 영의 이러한 어머니 직책의 표상은 마카이로스(Makairos)의 50편의 설교문을 거쳐서 동방과 서방의 신비적 경건생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성령의 여성됨을 삼위일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족한가? 그렇게 되면, 여성됨은 하나님 안에서 아버지됨과 아들됨에 여전히 종속하지 않는가? 이처럼 성령을 여성적인 은유들로써 나타냄으로써, 여성됨이 남성적 표상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단지 그것을 보충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만약 어머니의 원천적 능력이 아버지의 원천적 능력에 추가된다면, 인간을 자율적인 상태로 해방시키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닌가? 만약 하나님이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불린다면(요한 바오로 1세), 하나님의 지배는 부권지배이면서 동시에 모권지배이기도 하다. 인간의 자유를 위한 여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므로 여성신학의 종교비판의 다음 단계는 삼위일체의 모든 위격 안에서 여성적인 측면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와 관련하여 볼 때, 이것은 부성됨과 자비로움을 성서적으로 결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자비를 의미하는 히브리적 표현에 따르면, "자비로운 아버지"는 "모성적인 아버지"이다. 성령과 관련하여 볼 때, 우리는 단지 원래적인 야훼의 루아흐로 돌아가서 그 여성적인 측면을 발견하기만 하면 된다. 니케아 신앙고백이 성령을 "지배하시는 자와 살리시는 자"(dominium et vivificantem)라고 부를 때, 이것은 "해방시키는 주"와 "살리게 하는" 어머니를 의미한다. 그러나 정말 놀라운 발견은 "완전한 인간" 그리스도의 표상에서 이루어졌다. 갈라디아서 3장 27-29절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로 옷입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도 없고, 종이나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나 여자도 없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약속에 따라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물려받을 자들이다. 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인간이 "남자도 그리고 여자도 아니다"라고 말하는가? 분명히 여기서는 성을 초월하는 인류의 제3의 성(tertium genus)이 생긴다는 말이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타락만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아담(Adam)을 남자 이쉬(isch)와 여자 이샤(ischa)로 창조된 그대로 나누는 것(창 15, 45)도 폐기되며, 성(性)에 선행하는 인류의 일치가 회복된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롬 5, 14)인가, 아니면 "마지막 아담"(고전 15, 45), 성을 초월하는 인간인가? 카발라 학파의 아담-카드몬-신화도 이와 일치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새 창조가 양성적(兩性的)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말인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창조 자체가 수정된다는 말인가? 세례에 대한 양성적 해석을 따르자면, 실로 "남자도 그리고 여자도 없다."고 여겨진다. 이 점은 이른 바 "영지주의적" 공동체에서 나그-함마디 문헌 이래로 입증되기도 한다. 19세기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사상의 예수상도 구원자의 "무죄성" 배후에 항상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의 조화로운 통일, 즉 아니무스(animus)와 아니마(anima)의 일치도 보았다. 그러나 양성적 인격성이 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두가 그 자신으로서 완전하고 아무도 남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개인주의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인이 된 인간은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실로 양성적 인간이 되는가? 아니 여성됨과 남성됨은 구분하고 살리는 영의 특별하고 다양한 은사들이 아닌가?

끝으로 삼위일체적 사귐의 사상은 여성신학을 대변하는 여신학자들을 매혹시켰다. 왜냐하면 여성신학이 생겨나게 된 문제의 소지가 성적 구분이나 부권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부권과 결합되었던 지배권에 있고, 남자가 된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남성중심적 문화를 낳았다. 신적인 세 위격들의 상호적 순환(Perichoresis)이라는 삼위일체적 사상은 실로 지배가 없는 교통을 표현한다. 니케아 신앙고백이 말하듯이, 신적인 위격들은 서로와 함께 존재하며, "다함께 서로 경배되고 존중된다". 이들은 자신의 위격적 독톡성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공유한다. 신적인 위격들은 서로를 위하여 존재한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하여 존재하고,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여 존재하며,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들을 서로를 위하여 완전한 대리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국 서로 안에서 존재하기도 한다. 플로렌스 공의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일치 때문에 아버지는 전적으로 아들 안에 있고, 전적으로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아들은 전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고, 전적으로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성령은 전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고, 전적으로 아들 안에 있다". 이들은 상호 간에 너무나 서로를 침투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안에서 존재하며, 서로 번갈아 가며 내주(內住)한다.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있다"고 요한복음의 예수는 말한다(요 14, 20).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지배와 억압이 없이 상호 간에 존중하고 상호 간에 인정하는 자유로운 사귐의 모체와 생활공간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체들과 사물들의 창조적 사귐을 위한 모체와 생활공간이다. 왜냐하면 물질구조와 생명구조의 형성 안에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의미는 바로 "사귐"이기 때문이다. 여성신학은 "상호성"(mutuality)의 개념을 자신의 기본개념으로 삼았다. 이 개념은 삼위일체의 순환에서 쉽게 찾을 수가 있으며, 이 개념을 취해온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의 철학'보다는 이 개념 안에서 더 풍부한 의미를 얻는다. 요한복음 17장 21절 이하에 따르면, 삼위일체의 원형적 특징은 아버지의 군주지배나 성령의 모권지배에 있지 않고, 개별적 위격에도 결코 있지 않고, 위격들의 사귐의 관계에 있다. 영원한 순환을 인식시켜 주는 토대인 삼위일체적 관계의 지평은 하나님의 유비적(類比的) 요소이다.

3. 삼위일체적 십자가의 신학을 위하여

나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구원론적 질문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신학적 질문으로 뒤바꾸어 놓음으로써, 삼위일체적 십자가 신학의 발자취를 뒤따랐던 적이 있다. 나의 대답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고통이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서 말하는 대로, 만약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면, 요한복음(14, 10ff)이 강조하는 대로, 만약 아버지가 "아들 안에 있고", 아들이 "아버지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십자가 처형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도 함께 고난받는 셈이 된다. 그는 "고난의 유발자"가 아니라 함께 고난당하는 자이다. 아버지의 고통과 아들의 죽음과 성령의 탄식을 초래한 것은 바로 유일한 신적인 고통, 상실된 피조물을 향한 사랑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적 본성은 본질적으로 무감정(Apathie)이라는 형이상학적 공리 대신에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은 본질적으로 고난(Passion)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1980). 폴 피데스(Paul Fiddes)는 이 점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창조적 고난"에 관해 말했다. 이 표상은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비하다는 말과 일치한다. 신적 본성이 본질적으로 무감정이라는 교리는 이제 결국 그리스도교의 신론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다.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기 위하여, 골고다의 십자가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보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중세기 서방교회의 "천국 보좌"에 있는 삼위일체의 그림은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원래 이것은, 미사에서 거행되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의 속죄희생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묘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화가들은 종종 십자가에서 겪은 아들의 죽음의 고통을 아버지의 얼굴에 반영시키곤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으로 천국 보좌의 그림들을 아버지가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하여 희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십자가 사건을 삼위일체론적으로 해석하는 데 확실한 어려움을 주는 것은 성령에 대한 침묵이다. 라일 데브니(Lyle Dabney)는 그의 튀빙엔 대학 박사논문에서 십자가의 성령론(pneumatologia crucis)을 추적한 적이 있다. 그는 겟세마네의 예수의 "아바 기도"에서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아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는 영의 활동에서 영의 임재를 발견했다. "영은 아버지의 부재 중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임재이다"라고 그의 논제는 말한다.

"속죄의 신학"과 관련하여 또 다른 문제가 등장한다. 나 자신도 삼위일체적 십자가의 신학에 관한 나의 저서들에서 불의와 폭력행위의 희생자들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의 연대성 안에서 그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연대성을 지적하기 위하여 항상 <연대성(連帶性)의 그리스도론>을 강조해 왔다. 이것은 또한 상황적인 근거도 갖고 있다. 가해자들의 불의의 그늘 안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은 희생자들과 그리고 그들의 고난에 대한 회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자들에게 "화해"를 제대로 제공할 수 없다. 이들은 희생자들에게 머리를 숙이기 전에는 결코 화해를 빌 수 없다. 만약 가해자들을 위한 화해가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희생자들로부터 주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의 그리스도론은 의식 중이든 무의식 중이든 희생자들을 향해 있었다: "세상의 고난을 지고 가는 자여..." 그러나 희생자들을 위한 그러한 <연대의 그리스도론>으로부터 가해자들을 위한 <속죄의 그리스도론>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는 사실은 옳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자여..." 나는 이 점을 항상 암시하긴 했지만, 스스로 분명히 밝히진 않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 Urs von Balthasar)의 시적-드라마적 신학의 영역에서 카톨릭 신학자 노베르트 호프만(Nobert Hoffmann) 등은 두 개의 중요한 출판물(속죄 - 대리의 신학, 1981; 삼위일체. 속죄의 신학을 위해, 1982)에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는 칼 라너의 <연대의 그리스도>에 맞서서 <속죄의 그리스도론>을 제시하긴 했지만, 이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속죄죽음을 속죄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계시로 묘사하고, "우리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는 영원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위일체론 때문에 비로소 십자가의 역사적 진리는 그 신학적 광채를 발하게 된다"(52). 물론 나는 저자의 관념적인 사고과정을 다 따라갈 순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속죄의 신학은 나를 고무시켜서 연대의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속죄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도록 했고(Ⅰ, 5),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그 일방적인 가해자 편향성으로부터 해방시켜 희생자와 가해자를 모두 지향하는 해석을 하도록 만들었다. 즉 하나님의 의(義)는 정의를 창조하는 의(義)이면서 의로 인도하는 의(義)다.

 

4. 삼위일체적 역사이해를 위하여

삼위일체적 사고는 영원한 순환운동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고, 예배의 송영처럼 반복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역사적 사고는 근대 이래로 과거로부터 시작하여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직선적인 진보를 맹신했다. 양자(역자주: 순환과 직선)의 중재는 구원사적 삼위일체를 삼위일체적 구원사 이해로 되돌려 놓음으로써 생겨났다. 이것은 이미 중세기 초엽에 이루어졌다. 유명하면서도 동시에 논쟁이 분분한 대표적 인물은 요하힘 피오레(Joachim von Fiore)이다. 그가 삼위일체를 종말론적 특징을 갖는 구원사로 "해체시켰다"고 말할 순 없다. 하지만 그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영원한 역사와 종말론적으로 통일시키려고 시도한 점에서, 역사적 역동성을 보여 주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내가 2부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칼 라너, 칼 바르트와 에른스트 블로흐와 전개하는 토론은 항상 거듭 이 점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적 인식이 현실을 종말론적 목표를 가진 역사로서 해명한다면, 태초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화해를 거쳐 종말론적 완성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운동을 용인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거-현재-미래는 초시간적 영원의 세 연속적 전개가 아니라, 이 시간이 완성되고 종료될 하나의 미래를 지향한다. 자연의 나라, 은총의 나라 그리고 영광의 나라는 하나의 하나님 나라의 세 측면들이 아니라, 그 완성의 길 위에 있는 세 단계들이다. 그러므로 자연과 은총 혹은 창조와 계약의 2단계 신학은 충분하지 못하다. 만물은 영광 중에 재창조될 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탈리아 신학자 브루노 포르테(Bruno Forte)는 요하힘 폰 피오레,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지암바티차 비코(Giambattista Vico)와 베네데토 그로체(Benedetto Croce)의 남이탈리아 역사사상(歷史思想)의 전통 안에서 그의 삼위일체론을 "역사로서의 삼위일체 - 살아 계신 하나님 - 살아 있는 자들의 하나님"(Mainz 1989)이라고 불렀다. 그는 "삼위일체의 고향"(고전 15, 28)을 지시하는 삼위일체적 역사이해를 전개함으로써, 역사로서의 삼위일체를 따른다. 비록 그가 세속적 역사이해들과 논쟁하지 않고 실제역사 내의 부정적 요소들을 분명하게 부정하지 않는 점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의 사상에 매우 가까이 다가 서 있다.

미국과 영국의 과정신학자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과정사상을 삼위일체적 사상과 중재시키려고 노력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풍부한 관계를 맺는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면, 이것은 찰스 하르트숀(Charls Hartshorne)의 "하나님의 상대성"(Divine Relativity)의 개념과 분명히 일치하게 된다. 노만 피팅거(Norman Pittinger)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과정철학적으로 새롭게 파악하려고 했다(The Divine Triunity, Philadelphia 1977). 슈버트 오그덴(Schbert Ogden)과 존 캅(Joh Cobb)의 학파에서 이 내용에 관한 논문 시리즈가 나왔다. 물론 분명한 "자연적" 과정신학과 전통적으로 계시에 근거한 삼위일체론 사이의 고랑은 여전히 깊다. 또한 종말론적으로 해명되는 역사이해와 자연을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서 유래하는 역사이해 사이의 고랑도 넓다. 현실을 인간의 역사와 비인간적인 자연으로 분리하는 것에 저항할수록 양자 간의 중재(仲裁)는 더욱 더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와 또 그와 더불어 인간 역사의 묵시적 위협은 바로 이러한 분리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W. Pannenberg, 조직신학Ⅰ, 1988, 283ff)는 "삼위일체적 관계의 구체적 형태로서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상호 간의 자기구분"(335ff)이라는 사상으로부터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발전시켰다. 이로부터 삼위일체적 위격들은 비단 상호 간에 위격성(位格性)만을 세우지 않고, 신성(神性)도 역시 세운다는 사상이 파생된다. 판넨베르크는 "아버지의 군주지배"를 고수하기 때문에, 신적 순환이라는 사귐의 사상을 포기하며, 그 대신에 삼위일체적 관계 안으로 군주지배를 이끌어들인다. 왜 그가 군주지배적 사상을 고수해야만 하는지를 나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