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린이시다

- <어린이 신학>으로의 초대 -


 이신건

 

오늘날 특히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들이 가장 심하게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론보도를 통하여 목도하고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나는, 두 어린 아들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이 시대의 구원을 고민하는 목사로서, 그리고 종교의 본질을 추구하는 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극복할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찍부터 어린이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온 기독교도 "어린이"를 언제나 종교교육의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왔을 뿐, 신학적 반성의 주제로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서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성지배적-가부장적 사회에서 소외-학대당해 온 여성들이 오늘날 소위 <여성신학>을 주창하듯이,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에 의해서도 종종 학대를 받는 어린이들을 위해 <어린이 신학>(Theology of child)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즉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리와 표상, 이미지를 남성-아버지나 여성-어머니가 아니라 어린이의 관점에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는 일찍이 어린이를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그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말씀을 어디까지나 도덕적, 교육적 교훈으로만 받아들여 왔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연구에 착수하게 되면서 놀랍게 된 것은, 이런 시각과 제목으로 연구된 글이 2천년 기독교사에서 전혀 없다시피 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외람되지만 나의 <어린이 신학>은 서구의 위대한 신학자들의 통찰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재해석할 뿐만 아니라, 독창적으로 그들의 이론을 뛰어넘는다고 자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희망의 신학>으로 필자의 스승 몰트만(J. Moltmann) 교수도 나의 이런 신학적 모티브를 칭찬하고 조속한 집필을 격려하였으며, 독일의 신학잡지(Evangelische Theologie)에 기고할 것도 권면하였습니다.

이 책은 올해 초에 출판되었으며(218쪽, 한들 출판사), 이 책을 구입할 수 없는 독자들을 위해 전 내용을 <자료실-인터넷북>에 올려놓았습니다(유감스럽게도 각주는 생략되었음). 그러나 시간 상 이것을 읽을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어린이 신학>의 기본 착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할까 합니다. 여러분의 고견을 <토론 마당>에 올려 주십시오.

왜 하나님은 어린이신가?

우리의 "궁극적 관심의 대상"(틸리히)인 하나님은 인간의 여하한 개념과 표상도 초월한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의 특정한 개념과 표상에 의해 완전히 파악된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무한자, 초월자, 창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일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사 55:8).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설 수 없다. 설령 경험을 넘어선 그 무엇을 인정하고 또 때로는 인식한다고 주장하더라도, 다시 말하면, 심오한 깨달음이나 계시적 경험을 통하여 경험 세계를 초월하는 그 무엇과 접촉하였다고 확신하더라도, 그런 경험도 어디까지나 인간의 개념과 표상으로 밖에는 달리 표현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가장 포괄적으로 증언하는 기독교도 매우 일상적이고 경험적인 세계를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갖는 하나님 개념 혹은 하나님 표상은 결코 인간의 경험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초월적 계시의 경험조차도 인간의 경험 세계로 전달되지 않으며,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주로 동양 종교는 절대자를 비인격적인 언어로 표상하고 있다. 공자의 천(天), 노자의 도(道), 석가의 법(法), 무(無), 공(空)이 대체로 그러하다. 그러나 기독교를 위시한 서양 종교에서는 인격적인 종교 언어가 지배적이다. 신-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자주 비인격적인 언어, 예를 들면, 바위와 산성, 사르는 불과 거센 바람, 피난처 등으로 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인 언어가 훨씬 더 풍부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목자, 주님, 용사, 왕이시다. 더욱이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기도 하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언어보다도 친밀하고 인격적인 아버지, 아빠로 하나님을 불렀다.

유일신을 믿는 자들은 주로 그들의 헌신의 대상을 남성적인 표상으로 그려 왔다. 로마-희랍 사회에서도 신은 종종 아버지로 불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아버지보다는 주, 왕이라는 언어를 선호하였지만, 고대 사회에서 주, 왕은 거의가 남자였다. 신약성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다는 극히 예외적인 사실을 제외하면, 항상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로 불렀다. 그러나 다신론, 특히 자연신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여성-모성적인 언어가 지배적이다. 특히 땅의 신은 생산적인 어머니 신으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을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남자로 표상되었고, 성령은 주로 비인격적인 힘, 에너지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성령도 인격적인 분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자들은 종종 그를 여성적으로 이해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성령은 우리를 낳고 또 거듭나게 하는 신적인 어머니이시다.

하지만 비록 성령 하나님이 여성적인 이미지도 지니셨다 하더라도, 오랜 가부장적 전통에서 성령이 공식적으로 어머니라고 불린 적은 거의 없었다. 비록 성령이 어머니로 불리더라도, 삼위일체 안에서 두 남성과 한 여성의 관계는 그 얼마나 깨어지기 어려운 남성지배적인 관계인가? 요즘에 와서 비로소 종종 남녀의 관계가 뒤바뀌어지는 경우도 종종 드러나지만, 남성지배적인 고대 사회에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 전혀 균형이 이루어질 순 없었다. 하물며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에서, 그것도 한 여자를 여자로 이해하고 부르기 어려운 형편에 남녀의 불균형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일단 우리가 중립적인 자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어머니(성령)의 동등한 위치와 권리를 인정한다고 치자. 사실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세 위격 간의 그 어떠한 서열도 배제하였던 것이다. 이 서열은 어디까지나 논리적 서열이지, 존재론적, 시간론적 서열, 선후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아들을 낳으시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신다고 해서, 아들과 성령이 시간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열등하시다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한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방식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들은 누구인가? 물론 "아들"이라는 말은 남성적 언어이다. 그러나 아들 하나님을 단지 남성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남성편향적이고도 가부장적인 언어의 잔재다. 영원한 2위의 하나님은 남성적인 로고스(Logos)이시기도 하지만, 여성적인 소피아(Sophia)이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로고스 기독론의 승리와 우세로 말미암아 2위의 하나님은 주로 남성적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2위의 하나님은 남성적이나 여성적으로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남녀 양성을 포괄하면서도 초월하는 "자녀" 혹은 "어린이"의 모습으로 이해되는 것이 마땅하다. 고대 교회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이론을 받아들여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출생된다"고 선언했을 때, 자신의 아들을 영원히 출생시키는 아버지 하나님은 어머니와 같은 분이며, 영원히 출생되는 아들은 영원히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함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상적, 역사적 예수에게로 돌아가 보자. 앞에서 말했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압도적으로 "아빠"라고 불렀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차갑고 무서운 율법의 하나님, 무한한 권력을 방자하게 휘두르는 세상 권력자와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과 병자, 잃은 자를 찾으시고 상처입은 자를 싸매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 악인에게도 해와 비를 허락하시고, 악인조차도 무한히 용서하시는(원수사랑의 계명!) 긍휼하신 아버지, 자신의 자녀를 용납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는 친구와 같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다면, 이것은 차라리 자신을 낳고 품어 주는 자비로운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어린 아기의 언어(맘마)와도 같다. 즉 예수의 "아빠"는 "맘마"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유대교의 하나님과는 철저히 다른, 혁명적으로(?) 변화된 하나님을 본다. 예수의 생생한 언어(J. Jeremias)인 이 "아빠"는 유대인들의 혐오증을 불러일으켰을 법하다. 감히 아버지라고도 부르기 어려운 지엄하신 하나님을 "아빠"라고 하다니! 이 무슨 무식한 시골뜨기 예수의 그 무슨 유치한 언어인가? 그래서 신성모독으로 십자가에 못박혔던 예수도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을 더 이상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아버지"라고 불렀던가? 여기서 예수는 자신을 버리시는 아버지를 도저히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던가? 이 메시야의 비밀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만을 자랑하노라"고 고백한 한 바울은 계속 예수의 언어인 "아빠"를 계승하였고, 또 그래서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며 신뢰하였다. 그러나 기독교가 철저히 남성중심적이던 로마-희랍의 가부장적 사회로 넘어가면서 다시금 삼위일체에서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교회에서도 남자가 지배하게 되었다(특히 카톨릭 교회의 교황, "파파"는 바로 가부장의 화신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는 가부장적 유교 문화가 이러한 요소를 더욱 강화하여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어머니시기도 하다. 하나님은 결코 남성적인 하나님만은 아니시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는 남자로서 인류를 구원한 분이 아니다. 그는 새 인간(아담)을 대표하는 분이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 아버지(성부)와 어머니(성령)의 영원한 어린이다. 바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직 어린이와 같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가며, 오직 어린이와 같이 온유한 자가 천국에서 큰 자임을 가르쳤던 것이다. 우리는 오직 어린이 예수와 같이 됨으로써만,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고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을 수 있다. 오래도록 잊혀진, 아니 억압된 바로 이런 어린이다운 예수, 어린이다운 하나님을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이 땅의 어린이를 억압, 학대하지 말고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어린이가 되어야만 이 땅에 진정한 낙원을 이룰 수 있음을 역설하려는 것이 나의 <어린이 신학>의 취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