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복음주의 운동의 현황

박명수


 

서론

1925년 소위 스콥스 재판(The Scopes Trial)이라고 불리우는 현대주의자와 근본주의의의 논쟁은 20세기 미국 기독교의 역사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 진화론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한 테네시주의 교육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존 토마스 스콥스(John Thomas Scopes)를 둘러싼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자와의 논쟁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여지없이 패했다. 미국 일반 대중들은 진화론에 반대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다. 이 스콥스 재판을 계기로 미국의 근본주의와 보수주의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일반 여론에서 밀리기 시작한 보수주의는 이제 교단 정치에서도 밀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북장로교회와 북침례교에서 두드러졌다. 북장로교 신학의 본산인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정통보수주의의 기수로 이름을 날렸던 메이첸이 북장로교회가 현대주의자들을 포용하는 정책에 반대해서 1929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여 나갔고, 결국 그의 주총자들은 1936년 정통장로교회를 설립하여 분리되었다. 이것은 북침례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근본주의 침레교인들은 점증하는 현대주의를 교단에서 추방하고자 노력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침례교회가 강조하는 개교회의 자율성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좌절되었다. 1930년대 이후 미국 기독교에서 보수주의와 근본주의는 사양길로 들어서는 것 같았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는 1931년 판 [사회과학백과사전](Encyclopedia of the Social Science)에 실린 근본주의에 관한 항목의 논문에서 이 운동은 끝났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스콥스 재판이 일어난지 약 반세기 만에 미국 기독교에 새로운 반전이 이루어졌다. 1976년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지미 카터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 유명한 시사 주간지 뉴스 위크는 그 해를 "복음주의자의 해"(the Year of the Evangelical)라고 선언하였다. 진보주의 신앙에 의해서 패배하였다고 믿어진 복음주의가 다시 미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고, 많은 언론인들과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미국의 신 보수주의의 등장과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70년대 부터 미국 언론을 장식하는 종교기사는 진보주의자들의 정책이 아니라 복음주의자들의 정책이며, 80년대 90년대를 이어 오면서 미국의 복움주의자들은 아무도 무시못할 힘이 되어버렸다. 이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더 이상 분파주의자들이 아니라 미국의 언론, 정치, 대중문화, 학문의 영역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분명히 나타내는 당당한 세력이 되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어떻게 한때 역사의 흐름과 더불어 사라질 것으로 기대되었던 복음주의가 다시 미국 기독교의 전면에 다시금 부상할 수 있었을까를 살펴 보고, 아울러서 지금 복음주의의 현황이 어떤 것인가를 개괄적으로 살펴 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계교회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아울러서 한국교회의 위치를 발견하게 하려고 한다.

복음주의가 무엇인가라는 정의의 문제는 항상 논란의 초점이 되어 왔다. 최근의 많은 학자들은 복음주의를 하나의 단일한 운동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여러 다양한 모습을 가진 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부르스 셀리는 복음주의에는 다음의 7개의 그룹이 있다고 주장한다: 1) 개혁파 복음주의(크리스챤 리폼드교회), 2) 웨슬리안 복음주의(나사렛교회), 3) 오순절복음주의(하나님의 성회), 4) 흑인복음주의, 5) 평화파 복음주의(퀘이커), 6) 남부복음주의(남침례교회), 7) 독립교회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주의 교회는 성경을 신앙의 유일한 권위로 받아들이고, 중생을 신자의 참된 표시라고 믿으며, 선교를 신자의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본인이 여기에서 제시하는 전제는 복음주의 기독교가 일반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변화하는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였으며, 이것이 복음주의의 재등장에 결정적인 열쇠라는 것이다. 물론 복음주의는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이다. 하지만 복음주의는 단순한 신학운동이 아니라 보다 폭 넓은 대중에 뿌리를 두고 있는 대중 종교운동이다. 이점에 있어서 복음주의는 자유주의내지 현대주의를 능가하는 장점이 있다. 자유주의 내지 현대주의가 소수의 지적인 엘리트의 취향에 부합하는 반면에 복음주의는 대 다수의 대중의 취향에 맞는 신앙형태를 개발하였다.

1920년대에 근본주의는 반문화운동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들은 현대문화를 부정적으로 보며, 거기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와 90년대의 복음주의는 현대문화를 자기들의 목적으로 위하여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근대에 다시금 일어난 복음주의는 단순한 근본주의의 재현이 아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근본주의가 갖고 있는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열정을 그대로 갖고 있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을 새롭게 변형시켜 왔다.

 

1. 복음주의 교파의 부흥

복음주의의 부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복음주의 교파의 성장이다. 특별히 1960년대 부터 일기 시작한 복음주의 교파의 성장은 괄목하여 많은 종교사회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30년대 미국의 주요 교단에서 진보주의자들이 교권을 장악하였다. 소위 주류교회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을 거쳐서 19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윌 헐버그(Will Herberg)는 이 시대에 전형적인 미국인들은 바로 이 주류교단에 다니는 사람들이며, 이 교단에 멤버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주류에 속한다는 자기 표현이라고 한다. 여기에 비해서 천주교 성당이나 유대교의 회당에 다니는 것은 자신들이 이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 시대에 주류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이런 성장이 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터 멈추기 시작했고, 그 이후 부터는 계속 멤버쉽이 쇠퇴하였다. 이때 미국의 주류 교단은 소위 진보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성직자들에 의해서 채워졌고, 이들의 메시지는 전통적인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진보적인 성직자들은 성경말씀의 권위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지 않았다. 신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미국 주요 개신교 성직자들은 예언자적 메시지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강단을 사회 잇슈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그들 신자들의 주된 흐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미국의 팽창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보았는데 비하여 이들 진보적인 성직자들은 이것을 제국주의적인 행동이라고 공격하였다. 여기에 미국의 주류교회 성직자들과 주류교회의 평신도들의 ?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60년대 중반부터 주류교회가 쇠퇴하면서 산대적으로 복음주의 교회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출판된 책이 딘 켈리(Dean Kelly)의 [왜 보수주의 교회가 성장하는가]였다. 오랫동안 미국 NCC의 직원이었던 켈리는 이 책에서 보수주의 교회가 성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신념에 충실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기에 반하여 진보적인 교회는 자신들이 표면에 내세우고 있는 교리를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으며, 또한 종교의 본래적인 임무 보다는 사회적인 잇슈에 너무 몰두하기 때문에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러면 실제로 20세기 중반부터 미국교회의 성장은 어떻한가? 다음의 표는 1940년부터 1988년까지 미국의 주요 교파들의 성장을 통계로 표현한 것이다. 이 표에 의하면 미국 개신교에서 가장 큰 교단은 남침례교이다. 남침례교는 성서의 무오성을 믿는 복음주의 교단으로 남부의 보수주의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들은 1940년의 약 5백만의 멤버쉽에서 1988년에는 약 천5백만명의 멤버쉽으로 성장하였다. 이것은 199%의 성장이다.

한때 남침례교는 미국문화의 변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남침례교는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교단이 된 것이다. 최근의 한 연구에 의하면 현재의 미국 복음주의의 부흥은 미국 남부문화의 승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잇다는 것이다. 남북전쟁이후 미국의 남부는 미국문화의 주류에 끼이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남부의 성장과 더불어 남부인들의 북부 진출이 두드러졌고, 이와 더불어서 남부 복음주의 기독교가 미국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침례교의 성장은 보다 미국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국의 청교도는 처음부터 성경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권위의 근거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신앙은 유럽에서 들어온 자유주의에 의해서 도전받았다. 많은 진보주의교회가 여기에 굴복했다. 하지만 남침례교는 여기에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런 남침례교의 성장은 남침례교가 미국의 전통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침례교보다 더욱 급진적으로 성장한 교파는 성결/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다. 오순절 계통인 하나님의 성회와 하나님의 교회는 1940년 이래 각각 978%와 824%를 성장했고, 성결파 교단인 기독교연합선교회(CMA)와 나사렛교회는 각각 712%와 233%의 성장을 했다. 이런 교단들은 거의가 다 중생, 성결 (혹은 성령세례), 신유, 재림 등을 강조하는 체험적 복음주의이다. 아마도 20세기 미국교회사에서 가장 큰 성공은 이런 체험적 복음주의를 강조하는 오순절교파일 것이다.

미국 기독교는 영미의 강한 경험주의 전통에 서 있다. 미국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18세기, 19세기, 20세기에 걸쳐 주기적으로 종교적인 각성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런 각성의 밑바닥에는 부흥운동이 자리잡고 있었다. 18세기에 회중교회와 장로교회가 경험적인 기독교의 중심에 서 있었다면 19세기에는 감리교회가 중심에 서 있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서 이들은 더 이상 부흥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지 않는다. 부흥운동의 전통은 오순절운동이 계승하고 있다. 20세기의 성결/ 오순절운동의 부상은 이런 미국의 경험주의 전통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소위 주류교단들은 신각한 멤버쉽의 손실을 경험했다. 장로교회는 1980년부터 88년까지 13%의 신자가 감소했고, 감리교회는 5%가 감소했다. 이들교회는 미국 기독교의 전통인 성서의 권위와 체험적인 신앙을 잃어 버렸다. 미국의 기독교의 주류는 미국의 주류의 정신을 계승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교회가 쇠퇴하고 새로 등장한 복음주의 교파들이 성장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복음주의 교파들이 소위 자유 경쟁 시스템에 잘 적응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소위 전통적인 교파들은 소위 종교시장의 변화에 익숙하지 못하고 전통적인 권위를 고집하고, 거기에 집착한다. 하지만 새로운 복음주의 교파들은 그런 기득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종교심성을 재빨리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이것은 복음주의 교파들이 보다 대중 매체를 잘 활용하고, 보다 평신도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잘 이끌어 낸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은 미국교회의 지도를 바꾸게 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1990년 미국의 복음주의교파의 신자가 2천9백60만명인데 비하여 주류교회의 신자는 2천8백만명이다. 종교사회학자들은 소위 전통적인 주류교회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쇠퇴할 것인데 반하여 복음주의 교회들은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들은 미래의 미국교회의 중심은 진보적인 교회에서 복음적인 교회로 옮겨질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주류교회는 더 이상 주류교회가 아니라 단지 옛 주류(Old Mainline)에 지나지 않으며, 복음주의 교회는 더 이상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흥미있는 것은 미국의 주류교회들 가운데 복음주의로 돌아가려는 운동이 강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주류교단의 하나인 감리교는 애즈베리신학교를 중심으로 복음주의적인 굳 뉴스(Good News)라는 뉴스 레터를 발간하며 많은 감리교인들에게 웨슬리의 본래적인 정신으로 돌아갈 것을 호소하고 있다. 또한 70년대에 활발했던 감리교의 다원주의에 반대하여 감리교의 전통적인 신조를 다시금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드류대학교의 오든(Thomas Oden)교수도 여기에 가담하고 있다. 최근에 미국 감리교의 선교학교수들의 모임에서 선교의 본질은 복음을 전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이 표명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회가 전반적으로 복음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2. 새로운 전도방법: 파라쳐치(para church) 운동

미국 역사에서 복음주의 운동의 부흥은 단지 복음주의 교파의 성장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주의 운동의 부흥은 새로운 전도운동에 힘입은바 크다. 많은 교회사학자들은 미국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교파제도라고 말한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이후 다양한 전통의 교회들이 자유롭게 경쟁하는 교파 시스템이야말로 근대교회에 큰 역동력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런 교파 시스템도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 역동성을 잃어 버리고 경직화되어 버렸다. 일부 사람들은 교파제도가 하나님의 도구라기보다는 오히려 선교의 장애물이 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교파제도의 약점을 보완하고 보다 효과적인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새롭게 등장한 운동들이 있다. 이것을 파라쳐치 운동이라고 부른다. 복음주의운동은 이런 파라쳐치 운동을 수 많이 이용했고, 이런 파라쳐치 운동을 통해서 그 활력소를 얻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현대 미국의 파라쳐치의 숫자는 10,000개를 넘고 있다고 주장한다.

풀러신학대학원의 랄프 윈터 교수는 기존교회와 파라쳐치의 관계를 천주교의 modality 와 sodality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한다. 천주교에서 modality는 교구조직을 포함한 일상적인 기구를 말한다. 이것은 교회에 안정성을 가져다 준다. 여기에 비해서 sodality는 특별한 목적을 가진 특수 집단을 말한다. 여기에는 수도원 조직이 포함된다. 천주교의 긴 역사 속에서 천주교가 어려움을 겪을 때 여기에 새로운 역동성을 불어 넣은 것이 바로 수도원과 같은 sodality이다. 윈터교수는 개신교에 있어서 이런 sodality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파라쳐치라고 본다.

대부분의 파라쳐치는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교파의 경직성이 선교의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고 새로운 단체들을 만들어서 선교에 임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이런 파라쳐치 운동을 지지하는 수 많은 후원자들로 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이런 파라쳐치의 숫자는 놀랄만큼 크게 성장하고 있고, 실질적으로 기존교파보다도 더 큰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여기에 비해서 진보적인 교회들은 파라쳐치를 갖고 있지 않다. 이들은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대중적인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흥미있는 것은 복음주의적인 파라쳐치 운동은 대중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비해서 진보적인 교회연합운동은 기성 교파의 제도적인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 장단점이 있지만 현재로서는 파라쳐치 운동의 대중 지향적인 측면이 더욱 장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은 거의 파라쳐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은 특별히 학원전도에 있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근대복음주의에서 청소년 전도에 큰 성과를 보였던 단체는 YFC(Youth for Christ)이다. YFC운동은 1930년대에 뉴욕을 중심으로 청소년전도를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은 대규모의 청소년 집회를 게획하였고, 이것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이런 청소년전도집회는 미국의 중요 도시에서 계속되었고, 1945년 청소년 전도에 종사하는 사역자들이 모여서 YFC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 새로 생긴 단체는 빌리 그래함을 전임전도자로 고용하였다. 이때 부터 YFC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이 운동을 전후의 청소년들을 바로 이끌어갈 중요한 운동으로 간주했다.

YFC운동은 복음주의 내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왔다. 지금까지 근본주의로 대표되는 복음주의는 사회에 대해서 도피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하지만 제 2차 대전 말기에 많은 청소년들이 전쟁의 폐허로 많은 갈등을 겪고 있을 때, YFC는 신앙으로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YFC는 이제 막 등장하는 미국의 대중문화를 이용하여 복음을 전하였다. YFC 집회는 더 이상 전통적인 예배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그들이 좋아하는 노래가 있었고, 그들이 좋아하는 춤이 있었고, 또한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들이 등장했다. 여기에 복음주의 운동의 현대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인 신앙으로의 복귀가 모든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라고 믿는 점에서 여전히 보수적이며, 복음적이다. 또한 YFC 운동의 중요한 특징은 미래의 복음주의자들을 배출했다는 점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이곳에서 전도자로서의 자질을 쌓았으며, 후에 빌리 그래함 전도팀은 YFC에서 그들의 사역자를 발견하였다. 또한 월드 비젼의 창시자인 밥 피얼스도 YFC의 초기 전도자였다. YFC는 1986년 현재 미국 전역에 걸쳐서 1,065개의 그룹을 가지고 있고, 미국외에 56개국에 지부를 갖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주요 대학이 학문에 있어서 복음주의 입장을 포기했지만 복음주의 운동은 미국의 거의 모든 대학의 캠퍼스를 복음화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미국과 전세계에 걸쳐서 수 많은 대학생선교단체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IVCF와 CCC를 대표적으로 설명하겠다.

캠퍼스 사역의 가장 오래된 단체는 IVCF(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이다. dl 단체는 1870년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이 부흥회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학생선교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미국의 대학생선교운동으로 등장한 것은 1930년대 말이다. 그후 이 단체는 크게 발전하여 1986년에는 미국 전역의 750 캠퍼스에 27,200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복음주의 운동에서 IVCF가 갖고 있는 위치는 젊은 지성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기독교를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경계해 왔다. 그들은 이와같은 방법이 기독교 신앙을 퇴색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IVCF는 기독교신앙을 지성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IVCF는 그의 자매기관인 IVP를 통하여 수 많은 복음주의적인 출판물들을 발행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것을 교재로 하여 캠퍼스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신앙을 가르치고 있다. 또 다른 복음주의운동에 대한 IVCF의 중요한 공헌은 매 3년마다 일리노이즈 대학교 얼바나 캠퍼스에서 열리고 있는 얼바나 학생선교대회이다. 이 대회는 1946년에 시작되었는데 최근에는 18,000명 가량이 참석하고 있다. 이 대회의 중요 강조점은 선교인데 여기에는 유명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연사로서 참석하곤 해서 선교에 대한 열기를 북돋운다. 빌리 그래함은 이 대회의 가장 중요한 강사이다. 19세기 말 미국에서 일어난 학생자원운동이후 이 선교대회가 학생들의 해외선교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생선교운동으로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단체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이다. UCLA 캠퍼스의 대학생 선교단체로 시작한 CCC는 1951년 빌 브라랻(Bill Bright)에 의해서 세워졌다. LA에서 성공적인 사업가였던 브라랻은 헐리우드 장로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주의 사역에 헌신하기로 작정하였다. 그후 그는 프린스톤신학교와 훌러신학교를 다녔으나 학교를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러던 중에 그는 사업을 포기하고 UCLA에서 학생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CCC는 전세계 약 150국가에 약 16,000명의 사역자가 일하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학생선교단체이다. CCC는 미국의 전 도시를 통하여 조직적인 전도운동을 벌였다. 1977년 CCC는 미국 전역의 165개 도시에서 동시에 전도운동을 벌였으며, 자체 조사에 의하면 미국 전체 인구의 60퍼센트가 직간접으로 CCC의 전도운동과 접촉하였다고 한다. CCC는 미국 이외의 사역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74년 서울에서 열린 Explo '74에서는 약 130만명이 참석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복음주의 운동에 대한 CCC의 중요한 공헌은 전도이다. 빌브라랻은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네가지로 요약했다. 1)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2)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되었습니다. 3)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습니다. 4)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을 CCC에서는 사영리(Four Spiritual Principle)라고 부른다. 이런 복음제시를 통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다. 이런 전도방법이 지나치게 복음을 단순화시킨다는 비난도 있지만 CCC는 평신도들에게 전도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각성시켜 주었다.

파라쳐치 운동 가운데에는 전도단체도 있지만 자선단체도 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월드 비젼(World Vision)이다. 월드 비젼은 미국 나사렛교회 출신의 젊은 전도자 밥 피얼스(Bob Pierce)에 의해서 세워졌다. 피얼스는 1950년 한국전쟁 중에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전쟁고아들의 참상을 보고 이것을 미국교회에 알려서 전쟁고아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그후 그의 사역은 아세아로, 더 나아가서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아마도 월드 비젼은 한국에 뿌리를 두고 시작한 최초의 세계적인 자선기관일 것이다. 지금 월드 비젼은 전세계에 걸쳐서 50만명 이상의 고아들과 그들의 가족을 돕고 있으며, 4,500개의 프로젝트에 4000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월드 비젼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자선단체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월드 비젼은 단순한 자선단체만은 아니다. 밥 피얼스는 복음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서 원래 빌리 그래함과 같이 YFC의 전도자로 일했다. 그는 뛰어난 부흥사였으며, 그의 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뿐만 아니라 월드 비젼은 제 3세계의 교회 지도자들의 양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미래의 지도자들을 모아서 훈련하였다. 아울러서 월드 비젼은 세계교회의 선교현황을 연구하여 각종 선교단체들에게 자료를 게공하기도 한다. 이일은 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월드 비젼 본부에서 수행하고 있다. 또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월드비젼의 모금방법이다. 월드 비젼은 미국에서 최초로 TV를 이용하여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고아들의 참상을 미국의 가정에 알림으로서 모금에 있어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3. 빌리 그래함과 복음주의 운동의 위상

우리가 20세기의 복음주의 운동을 설명하면서 빌리 그래함을 빼 놓을 수 없다. 빌리 그래함은 20세기 복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빌리 그래함을 이해하는 것은 20세기 복음주의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일 것이다. 20세기의 복음주의를 정의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20세기의 복음주의는 아마도 빌리 그래함과 같은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빌리 그래함은 근본주의적인 토양에서 자랐다. 그는 16세의 나이에 부흥집회에 참석해서 진정으로 복음적인 신앙을 받아 들였다. 그후 그는 근본주의 계통인 밥 존스 대학과 플로리다 성서학원, 그리고 휫튼 대학에서 공부했다. 빌리 그래함이 전도자로서의 사역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40년대 중반 YFC의 전임 전도자로 일하면서 부터이다. 이 20대 후반의 전도자는 과거의 근본주의자들과는 달리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기독교적인 삶의 가치에 대해서 매우 설득력있게 설교했다. 빌리 그래함은 미국 사회의 가치관의 혼란은 복음적인 원칙으로 돌아갈 때만이 해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때 부터 매스컴은 빌리 그래함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래 언론들은 보수적인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은 다시금 보수적인 기독교를 미국 대중의 관심의 대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빌리 그래함을 이전의 근본주의와 구별하여 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만든 것은 1957년의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대집회 부터이다. 원래 근본주의적인 배경에서 자란 빌리 그래함은 진보적인 교단과 관계를 맺는 것을 꺼려왔다. 하지만 그는 대도시의 집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초교파적인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복음적인 메시지를 손상 시키지 않고서도 초교파적인 지원을 이끌어 낼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다. 결국 빌리 그래함은 뉴욕지역의 초교파적인 협조아래 16주 동안에 걸친 대대적인 대 부흥집회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근대 복음주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가져왔다. 근본주의의 연구의 권위자인 조지 말스덴에 의하면 근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비타협적인 전투적인 분리주의이다. 이들의 주 관심은 진보주의 그룹에서 자신을 분리시켜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빌리 그래함은 근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저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빌리 그래함은 칼 맥킨타이어(Carl McIntyre)나 밥 존스(Bob Jones)같은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빌리 그래함의 생각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하며, 형제끼리 사랑하는 것이 정통교리를 지키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복음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진리에는 충실하지만 전투적인 근본주의와는 달리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진보적인 단체와도 손을 잡는 유연성을 같는 집단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을 중심으로한 복음주의는 분명히 진보주의와는 다르다. 신학적으로 복음주의는 진보주의 보다 전통교리에 충실하고, 보수적이다. 그러나 이것과 아울러서 정치적으로로도 진보주의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50년대는 냉전시대이다. 미국은 자본주의를 대표하고 있었고, 이것은 미국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여기에서 복음주의는 분명하게 자본주의 편을 들면서, 공산주의를 기독교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미국의 정치적인 우파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때부터 빌리 그래함과 복음주의는 미국의 주된 정서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많은 학자들은 빌리 그래함의 성공은 그가 미국인의 일반적인 정서를 기독교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때부터 빌리 그래함과 복음주의는 과거의 근본주의자들 처럼 미국 사회의 변두리가 아니라 미국 사회의 주류의 흐름을 타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빌리 그래함을 자신의 동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왔고, 빌리 그래함은 2차대전 이후 계속해서 백악관의 비공식적인 종교자문의 일을 해 왔다는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빌리 그래함과 복음주의자들의 이런 행동은 진보주의 그룹인 미국 NCC의 입장과 비교해 볼 때 더욱 잘 설명될 수 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NCC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미국 NCC는 WCC를 통해서 제 3세계의 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이것을 미국의 외교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냉전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사회주의에 대해서 복음주의자들 처럼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인 입장은 미국 사회의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고, 미국의 NCC는 차츰 미국 주류사회의 흐름에서 유리되기 시작했다.

세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빌리 그래함의 또 다른 중요성은 선교에 대한 강조이다. 빌리 그래함은 원래 전도자이다. 그의 최우선권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런 빌리 그래함에게 세계선교의 흐름은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이미 WCC는 전통적인 의미의 선교는 포기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도의 모라토리움(moratorium)을 선언했다. 빌리 그래함은 이런 상황에서 복음전도를 재 강조하기 위해서 1966년에 독일의 베를린에서 세계선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는 104개국으로부터 1,2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들 가운데에는 선교사들, 신학자들, 교단대표들, 또는 파라쳐치의 대표들이 포함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이 대회에서 전도를 위해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지금 세계는 급변하고 있으며, 교회는 전도를 위해서 새로운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교회가 전통적인 방법에 계속 매여 있다면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리고 아울러서 선교를 위해서 전도자들은 모든 교파와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빌리 그래함은 1974년 다시금 스위스 로잔에서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150개국에서 2,400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15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을 작성했는데 이것은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문서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에 의하면 복음전도는 교회의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동시에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동일시하는 진보주의 입장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주의 교회가 사회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음을 회개하면서 기독교의 사회적인 책임도 강조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주의가 어떻게 근본주의와 구별되며, 동시에 진보주의와 구별되는가를 볼수 있다.

그러나 빌리 그래함의 보다 큰 관심은 전도에 있다. 그는 1983년과 1986년에 화란의 암스텔담에서 세계의 복음전도자들을 모아서 설교작성, 모금방법, 전도대회의 조직, 필름과 비디오 테잎 등의 사용과 같은 전도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를 교육시켰다. 첫 번째 대회에는 약 4,000명이 참석했는데 그중 70페센트는 제 3세계로부터 왔다. 두 번째 대회에는 전세계의 173개국으로부터 9,500명이 참석했다. 흥미있는 것은 1986년의 대회에는 오순절 계통의 전도자들이 비 오순절계통의 모든 전도자들을 합한 것 보다도 더 많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복음주의 운동에서 오순절운동이 차지하는 위치가 점증되는 것을 보여 준다.

위에서 지적한대로 빌리 그래함은 냉전체제의 시작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항상 자본주의와 미국을 지지했고, 그것을 기독교 메시지와 거의 동일시하였다. 그런데 빌리 그래함은 그의 생애 가운데서 냉전체제의 붕괴를 보았다. 냉전체제의 붕괴와 더불어서 빌리 그래함은 공산권에서 대중집회를 갖기를 원했다. 처음에 공산국가들은 빌리 그래함이 입국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점점 문이 열리 마지막에는 세계의 어떤 종교지도자도 받지 못한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88년에는 북경에서, 1922년에는 평양과 모스크바에서 대규모의 전도집회를 가졌다. 빌리 그래함이 공산권에 대중집회를 갖는 목적은 물론 전도이다. 하지만 이것외에도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는 그곳에서 고통받는 세월을 보낸 기독교인들에게 세계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또한 공산권에 속한 국가들에게 그들이 미국과 깊은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이것과 아울러서 세계를 향해서 복음주의적인 기독교의 위상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4. 복음주의와 세계선교

아마도 20세기의 복음주의가 미래 기독교를 위해서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일 것이다. 1920년대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에서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래 미국의 주요 교단의 선교정책은 진보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 졌다. 특별히 윌리암 혹킹(William Hocking)이 1932년에 [선교의 재고](Re-Thinking Missions)가 출판된 이후 진보주의자들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전통적인 의미의 전도는 포기되어져야 하고, 대신에 선교사들은 그 지역의 종교들과 연합하여 도덕의 증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진보적인 교단의 선교는 점점 쇠퇴할 수 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많은 평신도들을 분노하게 했다. 그들은 교단의 선교정책에 분개하여 전통적인 선교개념을 고수하는 선교단체들을 지원했다. 아울러서 현지에 나가있던 선교사들도 자신들의 소속을 보다 복음적인 단체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복음주의적인 경향의 선교가 기존교파의 선교를 뛰어 넘어 세계선교의 주역이 되었다.

카펜터의 연구는 30년대부터 주요 교단의 선교가 얼마나 쇠퇴했으며, 동시에 복음주의 단체의 선교가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통게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선교에 대한 논쟁이 한참일 때인 1935-6년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52년 사이에 주요교단과 복음주의 교단의 선교사의 변화는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크다. 장로교, 성공회, 감리교등 주요교단들이 1935년에 7,115명의 선교사를 보냈는데 1952년에는 6,390명으로 상당한 숫자가 감소하였다. 여기에 비해서 복음적인 단체들은 1935-6년에는 4,015명이었는데 1952년에는 6,146명으로 약 50%의 성장을 이루었다. 그렇게 해서 1930년대에는 복음주의 선교사가 주류교단의 선교사의 반을 약간 넘는 숫자였는데 1952년에는 거의 같은 숫자를 이루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져 1985년의 통계에 의하면 NCC관련 선교사는 4,439명인데 비해서 복음주의 선교사는 35,386명으로 성장했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 세계선교사의 90% 이상은 복음주의 계통에서 일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복음주의 교단의 선교는 계속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남침례교회이다. 남침례교는 미국에서 가장 현대주의의 영향을 덜 받은 교파이며, 남침례교 해외선교부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지금 남침례교는 108개국에 3,816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남침례교를 제외하고 제 2차세계 대전이후에 세계선교를 위해서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교단들은 성결-오순절교파들이다. 성결교파들 가운데서 가장 선교에 열심인 단체는 심프슨이 창설한 기독교연합선교회(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이다. 이들은 지금 1,214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사실 근대에 있어서 세계선교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는 오순절파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성회는 약 1,4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송하고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성결-오순절 계통의 선교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의 활동은 미래 세계의 기독교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또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복음주의 교파들의 선교에 대한 열정은 이런 교파들의 성장과 맥을 갖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세계선교에 있어서 보다 특징적인 것은 교파와 관계없는 신앙선교(Faith Mission)단체들의 등장이다. 19세기 말 관료적인 선교정책에 반대하여 오직 믿음에 근거하여 선교를 해야겠다고 해서 생긴 신앙선교단체들은 1930년대 기존교파들의 선교정책에 실망한 사람들로 부터 큰 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해서 1930년대 이후에 급격하게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교파선교부들을 능가하게 되었다. 이들 신앙선교단체들 가운데에는 남침례교회를 제외하고 선교사 파송의 순위에서 2(위클립프 성서번역회, 3,022), 3(예수전도단, 1,741), 4(New Tribe Mission, 1,438)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신앙선교단체들은 근본적으로 위에서 언급한바있는 파라쳐치 구조에 속해있다. 수많은 학생선교단체들이 기존교파들이 실패한 캠퍼스선교를 수행하고 있는 것 처럼, 신앙선교단체들도 기존교파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역동성을 가지고 세계선교에 임하고 있다.

복음주의 해외선교와 관련하여 언급해야할 것이 성경학원 운동이다. 19세기 말 기존의 신학교육이 지나치게 이론 중심적이어서 현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 일부 전도자들이 성경학원을 설립하여 현장사역에 중점을 둔 교육을 하였다.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디성경학원이다. 그러나 점점 기존의 신학교육이 진보주의적인 경향을 갖게 되면서 부터 많은 교회들(특별히 침례교회, 신생 성결-오순절교파들, 그리고 독립교회들)은 성경학원에서 자신들의 교역자들을 찾았다. 초창기부터 성경학원들은 세계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1930년대 부터 성경학원들은 선교사들을 배출하는 중요 교육기관들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독립선교단체들은 성경학원들을 자신들의 선교본부로 삼았으며, 이곳을 근거로 하여 모금을 하였다.

1962년에 만들어진 미국성서대학인준협회(Accrediting Association of Bible Colleges)의 통계에 의하면 당시 전체 개신교 선교사의 27,000명 가운데 적어도 50%는 성경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며, 이중에 2,700 가량이 무디성경학원의 졸업생이라고 한다. 지금 미국에는 약 400개의 성경학원이 있으며, 이들 가운데 미국성서대학인준협회에 의해서 정회원으로 인정받은 학교는 1980년에 77개교이다. 이들 인준된 학교들의 평균 학생수는 약 425명이다. (인준받은 신학대학원의 평균학생수는 약 300명이다). 이들 성서학원들은 미국 복음주의 운동의 풀뿌리가 되고 있으며, 미국의 어떤 교육기관보다도 해외에 더 많은 졸업생들을 가지고 있는 교육기관이다.

복음주의 운동이 세계선교의 주도권을 가졌다고 하는 것은 세계교회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앞으로의 기독교는 더 이상 유럽교회가 주도하지 못하고 제 3세계의 교회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제 3세계의 선교를 복음주의교회들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가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제 3세게에서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제 3세계의 문화는 서구의 계몽주의문화와는 매우 다른 보다 종교적인 문화라는 점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초자연적인 힘이며, 신앙은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런 것을 상실한 진보적인 교회의 선교는 이들에게 더 이상 매력이 될 수없다. 특별히 이것은 성결-오순절 운동의 특색을 생각할 때 더욱 분명하다. 그들에게 신유나 종말의 메시지는 서구 사회에서 보다도 훨씬 매력적이며, 성서의 내용은 이것들이 기독교의 고유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준다. 하지만 동시에 토착문화와 기독교의 구분을 흐리게 만들 가능성도 있다.

 

5. 복음주의와 사회참여

1970년대 부터 미국정치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 우파(Christian Right)의 등장이다. 사실 1920년대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논쟁에서 근본주의가 패배한 이후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정치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현대주의가 사회복음을 내세우며 현실참여를 강하게 내세울 때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은 정치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근본주의가 정치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세대주의 때문일 것이다. 세대주의는 세상은 점점 타락해서 결국 망할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원래 19세기의 복음주의자들은 사회문제에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근본주의는 사회참여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

1940년대 부터 복음주의 내에서 이런 근본주의의 현실도피적인 자세에 대해서 비판적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칼 헨리(Carl F. H. Henry)가 1847년 출판한 [현대근본주의의 불편한 양심](Uneasy Conscience of Modern Evangelicalism)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헨리는 복음주의자들이 사회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헨리 이후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복음주의적인 사회참여의 모델을 생각하고 그것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 복음주의의 역사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복음주의 혹은 보수주의가 사회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것은아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보수주의는 미국의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강하게 연대해있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이중에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였다. 제 2차세계대전이후 미국의 제 1의 적은 공산주의였고, 여기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강하게 연대해 있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적일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적이었다. 따라서 기독교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 자본주의와 연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칼 매킨타이어였다. 그는 미국 정부의 반공세력과 연대해서 강력한 반공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복음주의내에는 미국내의 진보주의 그룹과 연대해서 사회참여를 한 경우도 있다. 특별히 1960년대 이후에 미국에는 진보주의적인 사회참여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흐름에 영향을 받은 젊은 복음주의 세대들이 사회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복음주의와 사회참여가 결코 양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성서에서 사회참여에 대한 근거를 찾을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역사적으로 복음주의가 얼마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가를 밝혔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19세기의 복음주의는 노예문제, 여성문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적극적인 태도를 가졌다. 그리고 이런 전통에 근거하여 복음주의는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쿠베덱스(Richard Quebedeaux)는 "젊은 복음주의자들"(Young Evangelicals)이라고 불렀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의 수 많은 사회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이 여성운동이다. 진보주의적인 여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복음주의 여성들이 복음주의적인 각도에서 여성의 문제를 재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성의 입장에서 성서를 재 해석하고 역사를 재해석했다. 1973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복음주의자들의 "시카고 선언"(Chicago Declaration)에서 전통적인 기독교는 남성들로 하여금 계속적으로 지배적인 태도를 갖도록 만들었고, 여성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순종을 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하면서 올바른 복음적인 남녀관계는 상호 순종(mutual submission)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상호순종이란 진보주의자들으리 평등(equality)과 비교되는 개념이다. 그후 복음주의 여성들은 1975년에 워싱톤에서 대회를 열고 복음주의여성대회(Evangelical Women's Caucus)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 단체는 [사라의 딸들](Daughters of Sarah)이라는 잡지를 통하여 계속활동하고 있다. 이단체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지고 있으며 수천명의 여성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미국의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친 복음주의의 사회운동은 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기독교우파의 정치참여이다. 7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에는 보수적인 경향이 분명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보수주의는 기독교 우파의 지원에 크게 도움을 받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이후에 공산주의와 싸웠던 기독교 우파는 70년대 후반 부터는 미국의 세속주의와 싸우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국의 진보주의의 영향아래 있는 세속주의가 전통적인 미국의 가치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이전부터 계속 있어 왔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이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미국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70년대 후반에 기독교 우파가 강력한 힘으로 미국정치에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첫째로 복음주의 교회의 성장이다. 이미 뉴스 위크는 1976년을 "복음주의자들의 해"라고 성언했다. 지금까지 미국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소수라고 생각해왔다. 당연히 그들의 제일 중요한 관심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었다. 하지만 70년대 말부터 복음주의자들은 보다 자신감을 가지고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발언할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느꼈고, 이것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둘째로 새로운 매체의 활용이다. 이미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라디오를 활용하여 왔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매킨타이어이다. 여기에 덧붙여서 60년대 부터 TV시대가 등장하게 되었고, 복음주의자들은 TV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라디오와 TV를 통하여 수백만명의 고정적인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었고, 이들은 그때 그때 일어나는 잇슈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견해를 전할 수 있었다. 다시말하면 방송매체를 통해서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런 복음주의자들의 여론을 투표에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청취자들에게 복음주의적인 견해에 대한 정치가들의 입장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예를 들면 어떤 후보가 낙태반대, 공립학교에서의 기도허용, 중국에서의 종교자유의 허용과 같은 복음주의적인 견해를 지지하는가를 알려주었고, 따라서 복음주의적인 견해를 갖지 않은 정치가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것은 미국정치에 있어서 놀라운 변화였다. 지금까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미국의 일반정서를 대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을 정치적인 힘으로 성장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 일반 풀뿌리 미국기독교인들의 목소리가 정치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수많은 기독교 우파단체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도덕적 다수"(Moral Majority)이다. 1979년 TV 전도자인 제리 폴웰(Jerry Falwell)이 창설한 이 단체는 진보적인 여성운동, 동성연애자들의 합법적인 결혼문제,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음란비디오의 보급과 같은 민감한 잇슈들에 대한 정보를 자신들의 회원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한때 400만명의 회원 주소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워싱톤에 로비스트들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입법화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기독교우파단체들이 있다. 그중에는 1986년 미국의 대통령후보로 출마했던 팻 로벗슨(Pat Robertson)이 있다. 예일법대 출신으로 방송전도자였던 그는 1980년 "예수를 위한 워싱톤"(Washington for Jesus)이라는 집회를 주도해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는 또한 그가 가지고 있는 "700인 클럽"이라는 방송프로그램을 통하여 자신의 견해를 계속 홍보하고 있다. 이외에도 수 많은 단체들이 있다.

이들의 주요 잇슈는 궁극적으로 가정과 신앙의 자유이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사회의 구조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반면에 복음주의자들은 가정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가정에 관한 복음주의자들의 많은 운동 가운데 "살 권리(Right to Life)를 위한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반 낙태운동이 있다. 사실 미국 사회에서 낙태에 관한 논쟁은 수 없이 많이 있어왔다. 특별히 천주교는 여기에 대한 강한 반대입장을 표명해왔다. 그러던 중 1973년 미국의 대법원이 낙태에 관한 법률을 위헌이라고 결정한 이후에 낙태반대자들은 급증하였다. 특별히 1970년대 말 수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낙태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이것이 미국 사회에서 하나의 문화전쟁으로 까지 비화하였다. 반 낙태운동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시민운동이 되었다. 여성의 인권과 사회진출의 기회를 주장해온 진보주의자들은 낙태를 찬성하는 한편 생명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은 낙태를 반대했다. 여기에 천주교와 복음주의의 연합전선이 구축되기도 하였다. 이런 문제 외에도 복음주의자들은 혼전순결준수, 이혼예방, 가정에서의 부권회복문제, 마약금지, 음란물에 대한 재제등을 위하여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신앙의 자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미국은 원래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나리이다. 초창기의 청교도 교육은 기독교교육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독립과 함께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그후에도 각 주의 결정에 따라 사립학교 뿐만이 아니라 공립학교에서도 성경읽기, 기도회 같은 것이 실시되었다. 이것이 20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정교의 분리가 무엇인가라는 중대한 잇슈를 제기했다. 여기에 대해서 1940년 미국의 대법원은 정교분리의 문제는 각주의 문제가 아니라 대법원이 결정할 문제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후 계속 미국 대법원은 공립학교에서 성경읽기와 기도회 같은 것을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그후부터 미국내에서는 복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대법원의 결정을 번복하기 위한 법률제정 노력을 계속해왔다. 비록 이 시도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복음주의자들은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1940년의 대법원의 결정이 미국의 건국정신에 위배될 뿐만이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흥미있는 것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이제는 미국의 외교문제에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전세계에는 기독교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은 반독재를 위한 인권탄압에는 깊은 관심을 가져왔지만 기독교신앙을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들에 대하여는 무관심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복음주의자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종교박해에 대한 수 많은 사례들을 수집하여 미국정부에 제공하고, 미국 정부로 하여금 신앙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임을 해당국가에 강조하도록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복음주의자들의 노력의 결과로 미국 국무성에는 종교의 자유를 위한 자문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종교의 자유의 보장을 미국의 외교정책 가운데 하나로 삼게 만들었다. 또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의 단체인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는 1996년 종교의 자유의 문제를 다룬 양심선언서를 채택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98년에는 미국의 종교지도자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의 장쩌민과 중국 기독교인들의 박해문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맺는 말

많은 사람들은 시대가 발전하면 복음주의적인 신앙은 쇠퇴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예측과는 달리 복음주의적인 신앙은 다시 부흥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부흥하고 있는 복음주의적인 신앙은 옛날의 보수주의와는 다르다. 이들은 새로운 모습을 가지고 역사에 등장하고 있다.

그러면 복음주의 신앙이 부흥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첫째 복음적인 신앙에 철저하기 때문이다. 죄에 빠진 인간은 하나님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는 복음의 내용은 시대를 뛰어넘는 적응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가 서있는 것이다. 두번째 복음주의는 일반 대중에 뿌리를 내렸다. 진보주의가 소수의 지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반면에 복음주의는 풀뿌리 대중들에 기반을 내렸다. 오늘날은 소수의 엘리트 중심의 사회가 아니다. 현대사회는 대중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복음주의는 대중을 이해했고, 그들에게 맞는 접근방법을 개발했다. 세번째는 대중매체의 이용이다. 복음주의는 현대 대중문화의 중심인 대중매체를 잘 활용하였다. 그들은 라디오나 TV를 선교의 도구로 삼았고, 이것을 통해서 직접 대중들에게 접근했다. 아울러서 이들은 일반 대중들의 문화를 이용해서 복음을 전달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노래, 춤, 스포츠, 연극등 수많은 새로운 접근법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넷째 선교구조의 갱신이다. 전통적인 교회들은 기존교회 구조를 통해서 선교를 하는 반면에 복음주의 교회들은 수 많은 파라쳐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기존의 교회구조가 감당하지 못하는 수 많은 새로운 일들을 하고 있다. 오늘날 대학생선교, 특수선교, 해외선교, 문화선교등 수 많은 새로운 선교의 장르가 파라쳐치 운동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다섯째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사실 현대문화는 합리주의적인 과학문화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또한 합리주의적인 현대문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복음주의의 초자연적인 진리의 선포가 현대문화의 한계에 부딪힌 현대인들에게 매력이 되고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의 부흥은 그 자체 안에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기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지나치게 대중을 의식한 나머지 천박한 대중문화와 야합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성직자가 대중 스타의 흉내를 내기도 하고, 부흥사들이 대중 스타들과 같은 스캔들에 휘말리기도 한다. 또한 지나치게 감정을 강조한 나머지 이성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다. 또한 복음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이들의 교회는 부요해졌고, 따라서 이들이 처음에 가졌던 순수한 신앙과 경건한 생활 등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도 많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복음주의자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복음주의의 성공이라고 지적한다. 어떤 운동이든지 초기의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면 쓸모없는 소금과 같이 버리우게 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본인은 현대 복음주의의 동향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이 논문에서 설명한 것이 복음주의의 모든 모습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복음주의 신학과 신학교육기관의 발전, 수 많은 독립교회들의 등장, 오순절운동의 확산등 20세기의 복음주의의 현황을 보여주는 수많은 요소들이 있다. 앞으로 우리는 현대의 복음주의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와 어떻게 관련되고 있는지 계속 주목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