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유신론 너머의 새로운 하나님을 찾아서

- 하나님에 관한 현대 신학의 동향 -

 

박영식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신학교와 교회를 제외하곤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에 무신론적 색채를 띤 베스트셀러들로 인해 우리는 다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끄집어내게 되었다.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무엇)인가? 모든 무신론은 그것이 비판하고 있는 특정의 유신론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비판하고 있는 고전적 유신론이, 현대 신학자들조차도 외면하고 낡은 것으로 치부해 버린 것이라면 이들의 비판은 무료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신앙인들이 무신론 비판에 바짝 긴장하게 되는 것은, 무신론자들의 먹잇감인 고전적 유신론을 자신들의 양식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먼저 서구 신학사 깊숙이 들어와 앉아있는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유신론에 대해 살펴보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현대신학의 하나님 사유를 간략하게 스케치 해 보고자 한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신들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신들에 관한 생각과 말들이 과연 모두 신적 본질에 적합한 것일까? 존재하는 것들의 최종적 근거와 근원을 사유하던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들을 만물의 아버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은 시인들의 신들에 관한 이야기(theologia)를 비판하면서 신학의 규범들(typoi)을 설정한다. 1) 신은 선하다. 2) 신은 불변한다. 가장 훌륭하고 아름답고 최상의 존재인 신은 자신의 본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완전한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은 보다 못한 쪽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최상의 존재인 신은 항상 동일자로 머물며 불변한다. 플라톤의 신학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에 대한 형이상학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이제 단순히 신에 대한 잡담이나 이야기꺼리를 넘어, 이성적 사유를 통해 신적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을 의미한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학(theologik)은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신들에 대한 신화적 언설 뒤에 놓여 있는 궁극적 실재에 대한 비판적 숙고를 의미하는 제1철학을 의미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신은 모든 운동의 제1원인으로 존재의 근거와 근원이다. 또한 신은 제1원인으로서 무엇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끔 하는 부동의 원동자이다. 그렇다면,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다른 존재를 움직일 수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은 간단하다. “사랑받음으로써” 본질적인 의미에서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신은 사랑의 대상일 뿐이다. 이로 인해 존재형이상학의 피라미드적인 구도가 그려진다. 덜 존재하는 것은 더 많이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며 이를 추구한다. 완전한 존재인 신은 모든 운동의 시작일 뿐 아니라 또한 목적(telos)이다. 스토아 철학의 신학에 대한 세 가지 구분, 곧 시인들의 신화적 신학과 통치자들의 국가 수호신에 대한 정치적 신학과 자연철학에 근거한 철학적 신학의 구분은 향후 기독교 신학의 과제를 철학적 신학의 과제와 동일시하게끔 만든다.

교부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복음의 하나님과 이방신화들 속의 신들과의 차이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철학적 신학을 차용하게 된다. 4-5세기에 이르러 이제 신학은 곧 철학적 신학을 의미하며, 기독교의 하나님과 그리스 형이상학의 궁극적 존재는 동일시되었다. 기독교화된 형이상학 안에서 하나님은 최상의 존재이다. 하나님은 삶과 죽음, 생성과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여타의 조건과 제약 속에 있는 존재자들과는 달리, 스스로 존재하는 자기원인(causa sui)이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운동 속에 있는 존재자들과는 달리, 순수 현실태(actus purus)로서 영원한 동일자로 머물며, 만물의 더 깊은 원인과 궁극적 목적이다. 또한 형이상학의 하나님은 시간과 역사 안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영원한 현재 속에서 자신의 결의에 따라 예지 예정하는 전능한 존재로 이해된다.

향후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수용한 중세의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며, 자신의 십자가 신학을 주장한다. 또한 신학은 인간이성의 주체성이 아니라 묵상과 기도와 시련이라는 하나님 경험의 수동성을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루터에 의해 기존의 형이상학적 하나님 이해가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17세기 파스칼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과 관련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자 헤겔도 새로운 시대의 종교는 (형이상학적) 하나님 자신이 죽었다는 감정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듯이 헤겔은 현실 전체를 사유하는 형이상학의 기초 위에서 하나님 사유를 전개하며, 신학을 철학과 동일시한다. 비록 간헐적으로 반론이 제기되었지만, 전통적 형이상학의 존재질문은 기독교의 하나님 질문과 동일시되며, 형이상학의 궁극적 존재와 기독신앙의 하나님을 동일자로 상정하는 것이 서구철학사와 신학사의 기조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하나님 사유는 다시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고전적 유신론은 성서의 하나님과 양립가능한가? 순수 현실태인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일 수 없으며, 부동의 원동자인 하나님은 감정에 움직이지 않는 분이기에 우리의 궁핍함에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분은 본질적인 차원으로 무감정한 존재이다. 과연 무감정의 신은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는가? 불변하는 신은 인류 구원을 위해 종의 형상으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일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고전적 유신론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할 수 있을까?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 흐름이 있을 수 없다. 그분은 영원한 현재 안에 모든 것을 통찰한다. 이처럼 모든 일들이 신적 예지와 예정에 의존한다면, 인간의 행위와 의지의 자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진정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도덕적 책임을 어떻게 인간에게 물을 수 있는가? 자기원인인 신,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신에게 과연 우리는 기도할 수 있으며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가? 예배와 찬양으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고전적 유신론에 대한 가장 치명적인 질문은 신정론의 질문이다. 악의 현실 앞에서 신의 정당성을 추구하는 신정론의 질문은 이미 고대철학과 기독교 신학의 난제일 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가장 거추장스러운 문제로 남아있다. 신이 선하다면 악은 어디서 왔으며, 신이 전능하다면 악은 왜 극복되지 않는가?

고전적 유신론의 형이상학은 이미 19세기를 넘어오면서 점차 현실과 무관한 사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위기에 함몰되어 간다. 헤겔과 니체의 신 죽음의 선언은 현실성을 상실한 형이상학의 종말을 뜻한다. 고전적 형이상학의 역사는 니체에겐 오류의 역사로, 형이상학의 하나님은 알 수 없고 도달 불가능한 실재일 뿐 아니라 더 이상 소용없고 불필요한 관념이며 제거되어야 할, 아니 이미 우리가 제거해 버린 우상으로 판명 받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더불어 그 위에 또는 아래에 혹은 배후에 또 다른 실재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단 하나의 인간적 현실만이 존재한다는 현실이해 속에서, 형이상학적 하나님은 만들어진 신이며 이성의 지나친 사변이 꾸며낸 불필요한 잉여물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이제, 오늘날 변화되어 버린 현실이해와 더불어 기존의 하나님 사유와 언설에 대한 힘겨운 수술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20세기 신학의 길을 열어놓은 칼 바르트는 이러한 무신론의 형이상학 비판을 환영하며, 이들과 더불어 인간의 이성에 의해 설정된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을 우상으로 몰아세운다. 이제 그는 인간적 가능성을 토대로 설정된 모든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하나님 사유를 부정하고, 신학의 가능성을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근거시킨다. 이때, 하나님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하시는 주체로 등장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말과 사유의 가능성 안에 놓여있는 우상을 파괴하시는 분이시며, 기존의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대립적 실재이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는 형이상학에 대한 공격이다. 하나님은 “전적 타자”로서 인간의 사유와 경험에 대해 언제나 낯선 분이다. 그는 “유일회적으로” 하나님 아닌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여타의 다른 경험과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두 거짓이다.

바르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하여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 오늘날 바르트의 이런 형이상학 비판을 이어가는 신학자들은 보다 날카롭게,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라 무(無)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란 단순히 존재의 반대어도 아니며, 현실세계 밖의 또 다른 어떤 현실도 아니다. 오히려 무로서의 하나님(Gott ist Nichts)은 존재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음(No-thing)을 의미할 뿐 아니라 우리의 존재세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와, 없는 것을 있게끔 하는 새로움의 사건적 차원을 함축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은 이 세계의 연장선에 있는 것도 아니며 만물의 원인(causa)도 목적(telos)도 아니다. 오히려 존재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폐하시며, 없는 것들을 있게끔 하시는 생명의 하나님이다.

오늘날의 하나님 사유 속에는 고전적 유신론의 형이상학적 틀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만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수용하면서 수정하고 보완하는 모델도 제시된다. 틸리히는 고전적 형이상학을 따라 존재질문을 하나님 질문과 동일시하지만, 존재의 근원을 단순히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주객분열의 도식이 극복된 계시적 상황 속에서 출현하는 ‘존재의 힘’으로 이해함으로써 고전적 유신론의 정적 분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언설의 상징적 가능성 안에서 비로소 인격적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틸리히에게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유신론은 단순히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롭게 해석되어야 할 논제였다.

또한 판넨베르크는 고전적 형이상학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라고 말하지만 그는 고전적 유신론의 무시간적 실재 대신에 하나님 계시의 역사성과 미래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역사는 모든 것을 규정하는 실재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표현하는 장이며, 이와 더불어 서로 상충되는 진리주장들이 대결하고 충돌하는 장이다. 참된 신적 실재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역사 속의 다양한 신적 경험들과 표현들의 참됨을 판단하는 진리실험을 떠맡게 된다. 판넨베르크에게 고전적 유신론의 영원성, 전능성, 편재성은 하나님의 미래성과 연관되어 해석되면서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판넨베르크와 마찬가지로 몰트만도 미래의 지평을 하나님 사유와 연결하지만 그는 무엇보다도 고전적 유신론의 무감정한 자기원인으로서의 하나님을 비판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며, 아들의 죽음 안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자기원인 속에 갇혀 있는 무감정한 존재나 전능한 존재가 아니며, 세상을 향한 사랑 안에서 자신을 제한하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최근 영미권의 하나님 사유는 보다 과감하게 고전적 유신론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거부한다. 열린 유신론(Open theism)으로 불리는 신학적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보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다. 라이스(Richard Rice)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은 피조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돌봄 뿐 아니라 피조물의 영향력도 수용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역사의 미래를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세계에 의존적이며, 다양한 사건들로부터 오히려 배운다. 여기에서 인간 존재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의 동역자로 이해된다. 따라서 열린 유신론은 고전적 유신론에 함축된 예지예정의 교리를 근본적으로 거부하며, 하나님의 자유와 사랑은 미래에 대한 완전한 지식인 예지와 예정과 대립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미래를 예정하거나 예측하는 분이 아니라, 자유로운 피조물과의 교감 속에서 미래를 함께 기획해 나간다.

과정신학 역시, 열린 유신론의 하나님 사유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의 자유를 강조한다. 새로운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과정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표현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 사유 가능한 하나님의 실재를 새롭게 규명하고자 한다. 과정철학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 깊이에서는 생성소멸의 과정적 계기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가장 기초적인 이 현실적 계기들이 서로 아무런 구성력 없이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구성력 있는 새로운 형식을 취할 수 있도록 매개하는 현실적 존재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하나님이 새로운 사건들의 매개자 역할을 떠맡는다.

특히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여타의 현실적 계기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현실적 존재로 이해되지만, 다른 현실적 계기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생성소멸의 현실적 계기들을 자기 안에 수렴하고 기억 보존하면서 새롭게 생성될 현실적 존재에 목적을 부여하는 탁월한 존재이다. 이 과정 속에서 과정신학의 하나님은 작용인과 목적인의 역할을 떠맡지만, 그의 영향력은 상대적이다. 즉, 그는 강압적으로 세계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세계를 설득하며 다른 현실적 존재들과의 상호관련성 속에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사건에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과정신학도 전통적인 예지와 예정의 교리를 거부하며, 하나님과 세계의 상호영향성과 모험성을 강조한다. 현대과학의 실재이해와 신학적 대화를 시도하는 과학신학에 따르면, 신학과 과학의 진리언설은 하나의 동일한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차원의 상호보완적 진리주장으로 이해된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활동은 인간의 영혼이나 실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물리적 세계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의 활동은 우주의 탄생을 알리는 무로부터의 창조로 시작하여 우주와 생명의 진화의 과정 속에서 역사하는 계속적인 창조로 지속된다. 하나님은 계속되는 창조의 과정 속에서 이미 자신 속에 예정되었던 세계를 전개하시는 분이 아니라, 피조물들에게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자유를 수여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우주 전체의 사건들을 홀로 장악하고 통제하는 우주적 군주가 아니라, 전개되는 우주의 역사와 상호 연관하면서 우주의 창조적인 즉흥연주를 총괄하는 지휘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형이상학적 사유 안에 있는 고전적 유신론의 수정과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현대 신학자들의 하나님 이해를 대략적으로 스케치해 보았다. 고전적 유신론이 성서적 하나님 이해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적 현실과도 양립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둔 새로운 하나님 이해는 과연 성서적으로 타당하며 현실적으로 적합한가? 이에 대한 대답은 독자에게 넘겨야 하겠다. 오늘날 하나님 사유는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고 침묵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적어도 우리는 하나님 사유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지속함으로써 “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신학적 사유의 철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경험과 현실 속에 돌연히 찾아와 우리를 놀라게 하는 하나님께 “당신은 도대체 누구신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은 더 이상의 질문을 불가능케 하는 대답이 아니라, 항상 다시금 침묵을 깨고 일어나는 철저한 질문으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기독교사상 2011년 2월호 게재)

박영식 l 박사는 서울신대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고, 독일 빌레펠트의 베텔신학대학 학위를 받았다.(Dr. Theol./ 조직신학) 현재 경산좋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계명대, 서울신대, 한세대에서 강의하고 있다.